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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은 어떻게 내가 될까?

창작물의 일관성

by 찐한

창작물에서 어떻게 나만의 개성을 일관성 있게 창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언젠가부터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정말 다양한 카테고리의 서적들과, 인터뷰들을 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미디어에 얹은 것은 나 자신의 삶 자체가 곧 나만의 개성이라는

물에 젖은 종이에 적힌 글 같은 희미한 단서였다.


그럼에도 줄곧 어떤 식으로는 행동으로 옮겨보고 있었다.

행동하는 것이 돌아더라도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탁월한 답안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영화 연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교육을 통해서 감독의 강의를 듣고 영상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또, 29초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해보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부족함에 무언가 채워줄 필요성을 느꼈다.


이럴 때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교보문고 사이트를 털기 시작했다.

6권 정도의 책을 구비했고, 그중에 '시간의 각인'이라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던 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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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핍진성과 내적진리는 사실에 충실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낌의 전달에 충실했을 때 나온다.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은 철학에서 일부 명제들이 다른 명제들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는 개념이다. 핍진성의 문제는 하나의 거짓된 이론이 다른 거짓된 이론보다 진리에 더 가까운지에 관해 분명히 하는 문제이다.

- 위키백과


이 문장을 읽고, 느낌의 전달이란 느낌의 시각화고

이것이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같은 영화를 봐도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글로 쓴다면 또 다르게 표현이 되고.


개개인의 삶이 생각에 녹여져 있기 때문에,

각자의 시선의 방향은 다르게 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개인의 개성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정답이었다.

다만 그 행위의 사실만 봤을 때는 같은 방향처럼 보일 수 있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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