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예희 Apr 17. 2017

불행 배틀에 관하여

"How are you?"라는 질문엔 "Fine, thank you. And you?"라는 대답이 줄줄 나온다. 이게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이유는 완벽한 단 하나의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 영어 문장 한 줄을 세뇌당하듯 줄줄 외우며 배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요즘 일 어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우, 죽겠어요. 힘들어요."라는 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실제로 상황이 좋든 좋지 않든 항상 똑같다.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자영업자의 근황 매뉴얼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식의 인사말을 주고받는 요령이 아마 제 1장에 적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야 이 대답 되게 부정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잘 되면 잘 된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야지 맘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왔을 때 실행했는데,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갔다.


상대방 : 그래, 요즘 일은 어때요? 바빠요?

나 : 네. 일 여러 가지 하느라 좀 바쁩니다.

상대방 :응? 아, 그래요? 어우, 잘 나가나 봐? 좋은 가봐? (feat. 미묘한 표정)


순간 후회가 밀려오는 동시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묻기 전에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지만 질문을 받았을 땐 나름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하는 일이 잘 되어도, 좋은 일이 새로 생겨도 그런 것 전혀 없는 척해야 하는 것인가. 그건 겸손이 아니라 의뭉스러운 거짓말 아닌가.


모두들 불행 배틀에 뛰어든다. 누가 더 힘든지 경쟁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만나면 다들 우리 회사가 얼마나 갑갑한 조직이고 내 상사는 얼마나 한심한 인물이며 내 부하직원은 얼마나 싸가지가 없고 내 업무는 또 얼마나 고된지 신세한탄을 한 보따리 두 보따리 풀어놓는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야, 넌 그래도 나보단 낫지, 라며 맞은편에서 더 암울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와중에 혼자서만 별 얘기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니 눈치가 보인다. 금세 이런 하소연을 빙자한 공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넌 그래도 회사를 안 다니니까 편하지?"

"넌 좋아하는 일 하니까 스트레스가 없지?"

"네가 무슨 걱정이 있겠니. 정년이 있니 뭐가 있니?"

"신랑도 없고 애도 없고, 너처럼 세상 편한 애가 어딨니?"


그러니 실은 나도 힘들다며 뭐가 됐든 일단 꺼내야 한다. 별거 아닌 얘기라도 어떻게든 쥐어짜고 과장해 부풀려야 한다. 내 불행 보따리가 이렇게 푸짐하니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달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마 모임을 마치고 각자의 집에 돌아가선 그래도 걔보단 내가 낫네 라며 안도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