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일요일의 코임브라 산책 도중 눈이 딱 마주친 그분.
앞발 뒷발 모두 얌전히 접어 몸뚱이 아래 숨긴 모습.
저도 잘 때 어떻게든 이불 속과 베개 밑에 손과 발을 숨기는데, 어릴 적에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에 의하면 자는 사이 홍콩 할머니였나 그 친구분이었나 하여간 무서운 그분이 손톱을 뽑아간다고 하여 그때부터 악착같이 숨기게 되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지금까지 뭔가 섬뜩해서 꼭 숨기고 잠-.-
그나저나 요쪽 벽에도 낙서가 많구나
이 하얀 문장에선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다쥐liberdade 라는 단어 딸랑 한 개만 알아보것지만
요쪽 노란 영어 문장을 읽어보니 왠지 좀전의 하얀 문장이 어떤 뉘앙스일지 알 것만 같습니다.
and 요것은 그래도 짧길래 후다닥 사전을 찾아 보니 4월 25일 하루 죙일 파업greve하자는 얘기로 추정되는구만요.
말씀드리는 순간 샤르륵 밖으로 나오는 고양이들
밝은 색 애가 뭔가를 하면 검은 색 애가 그걸 보고 사회생활을 배우는 듯 한데
어우야 세수도 좀 하고 그래
이건 뭐지 킁킁
카메라를 의식한 듯 잠시 알짱대다가
됐지? 하고는 저어쪽으로 올라갑니다.
문 닫힌 가게 창문에 가위 그림이 있길래 미용실일까 했는데 검색을 해 보니 의상실로 추정되옵니다. 가봉 약속이 있으신 분은 요 번호로 연락을 달라는 뜻이구만요.
아아 나는 왜 쓸데없이 이런 게 궁금해서 핸드폰을 두드리며 단어를 찾고 있는가
그렇게 인기척 없는(아니 진짜 다들 어디 갔지) 일요일의 코임브라 구시가지 골목을 걷는 중입니다.
한편 사진과 십자가가 담겨 있는 이 종이는 망자의 추도식 장소와 시간 등이 적힌 안내문인데
일전에 불가리아를 여행할때 이런 안내문을 처음 보고 생소하다며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전까지는 이런 안내문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이후엔 금세 눈에 들어옵니다.
언덕 위 구시가지를 걷다 보니 어느새 스리슬쩍 다시 언덕 아래, 강변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윗동네는 그렇게 조용하더니 역시 큰길에 가까와지자 사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왼쪽에 펄럭이는 현수막은 날짜, 시간, 장소를 보아 하니 아마도 어제 학생들이 진행하던 행사에 대한 내용 같구만요.
몬데구 강rio Mondego 요쪽은 구시가지, 저어쪽은 신시가지입니다.
포르투갈 내에서 흐르는 강 중에선 제일 길다는 몬데구 강. 리스본에서 보았던, 마치 바다같은 떼주 강rio Tejo이 훨씬 더 길지만 그건 이베리아 반도를 관통해 흐르는 강이구요.
그나저나 어이구 사진 맨 왼쪽에 숙소 건물이 보이네요. 저기서 더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코임브라 기차역이고, 사진 오른쪽 끝의 동상 뒤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거대 머랭을 비롯해 미친듯이 단 것들을 잔뜩 쌓아둔 빵집이 나옵니다. 코임브라 차암 아담하죠!
말씀드리는 순간 꺄아꺄아 친구에게 달려가는 그분 and 뭔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다른 그분들
음?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뭐죠 이 분위기는?
쫄바지를 매우 사랑하는 1인은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쫄력에 이끌려 그분들의 뒤를 따라 몬데구 강을 건넙니다.
그리하여 강 건너편 신시가지에 도착해 뭐죠뭐죠 골인지점 이거 뭐죠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렇습니다 컬러 런The Color Run 코임브라 대회가 바로 오늘이었던 것입니다 껄껄
라는 것은 사방에 오색 가루가 훨훨 날아다닌다는 소리임. 서울에서 열린 컬러 런 대회에 참가하려다 난 이거 감당 못하것소 하며 마음을 접었던 1인은 허허 뜬금없이 여기 와서 이 구경을 하게 되었구만요.
실은 제가 몸에 뭐 뭍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니까 뭐 뭍으면 닦을 때 까지 계속 그게 신경쓰이고(예를 들어 던킨 도나스에서도 가루가 최대한 적게 뭍어있는 것을 고르고 최대한 손가락을 뾰족하게 해서 잡고 먹음 and 그러다 참 잘 떨어트림) 빗물이 손에 닿으면 손이 썩을 것 같고 젖은 우산 만지는 것 괴롭고 바닷가 가서도 어지간하면 물에 들어가지 않고 모래가 어디 달라붙을까봐 계속 털고 공원에서도 잔디 위에 그냥 앉는 것 힘들어 하고(몸 속으로 뭐가 막 기어 들어갈 것 같은 상상을 함) 벤치에 앉느니 그냥 서 있는 것이 편한데
이렇게 쓰니까 왠지 자기 연민이 막 생길락 말락 하지만 전 그저 지지 뭍는게 싫을 뿐이옵니다. 흐흑... 지지...
그런 관계로 제 부모님께선 제가 그 성격을 장착한 채로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걸 매우 신기해 하시는데 호호 여행 중에도 똑같음. 그래서 몇 년 전 벨리즈로 EBS 테마기행 촬영을 갔을 때 주로 들어간 곳이 바다! 동굴! 호수! 숲속! 우어어! 그리하여 매일 밤 가루가 된 멘탈을 눈물로 다시 반죽해야 했던 기억이 있사옵니다. 야 이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더 예민해 지고 있어요 흐허허ㅎㅎ
근데 웃긴 건 먹는 거는 또 전혀 신경 안쓰고 잘 먹음.
우얏든동 그런 성격이 요맨~큼(과연?) 있는 1인은 우와 컬러 런이다 우와 재밌겠다 라는 동시에 안돼 가루 안돼 카메라에 가루 안돼 내 코에 가루 안돼 콧기름과 섞여 안돼 라는 괴로움을 함께 느끼며 잠시 구경을 하다 빗방울이 톡토독톡 떨어지기 시작하길래 다시 구시가지 쪽으로 돌아가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달두왈을 먹으며 적절한 와이파이의 은총 아래 또 책을 읽습니다.
아까 코임브라 대학교랑 기념품 가게들을 쫘악 구경하고 스윽 들어가 단 걸 먹었던 그 까페 말고 고 옆집에 들어온 것인데, 사실 분위기도 그렇고 달두왈의 위용도 그렇고 그 집이 훨씬 나았으나 새로운 집에도 가 봐야 하지 않겠냐며 한번 와 본 것이에요.
그리하여 꿀렁꿀렁한 레이뜨 크레미leite creme를 푹푹 퍼 먹는 1인이옵니다.
레이뜨 크레미라는 것은 생긴 것만 봐도 감이 오실 것 같은데 그니까 프랑스에선 Crème Brûlée라고 하고 스페인에서는 Crema Catalana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Trinity Cream 내지는 Cambridge Burnt Cream이라고 하는 갸가 바로 야여요.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 밖에선 음악 소리가 계속 쿵짝쿵짝. 강 건너 편 결승선 있는 곳에서 콘서트가 열린 모양입니다. 한참 책을 읽다 어우 저녁때네 하며 나와보니 콘서트도 이제 다 끝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구시가지로 넘어오는 중이구만요.
후딱들 가서 박박 씻어라이.
저도 숙소로 돌아와 노트 정리도 하고 TV도 보며 뒹굴뒹굴하다
8시쯤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왼쪽이 숙소 건물인데 호호 이렇게 예쁜데 진짜 퀴퀴한 냄새만 안나도 좋을텐데 호호호
저녁을 먹기는 해야것는데 점심때도 그랬지만 일요일 영업을 하는 곳이 참으로 적은 관계로 여차저차 딱 봐도 관광객만 가득한 곳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가게 앞에서 메뉴판을 든 오빠가 다 해서 10유로라고 매우 열심히 호객을 하여 파닥파닥 낚였어요 and 비수기의 소도시라 어찌나 거리가 휑한지 딱 저만 바라보고 있는 그 오빠를 무시하기 어려웠어요.
그리하여 원하는 음료(저는 탄산수)와 스프(요것은 당근 크림 스프)
그리고 메인 요리와 달달한 디저트에 커피까지 해서 10유로 되겠습니다.
제가 고른 메인 요리는 레이타오 아사도leitão assado 라는 것으로 레이타오leitão는 새끼 돼지 중에서도 아직 어미 젖을 먹는 어린 돼지를 뜻하고 아사도assado는 굽는 조리법을 뜻하니 합하면 애저 구이인데
통채로 구워 먹을 만치 이렇게 슥슥 썰어 줍니다. 파슬리라던가 월계수 잎 같은 허브랑 올리브 오일을 섞어 드음뿍 드음뿍 문질러 발라 재웠다 굽는다는데, 그래도 아주 어린 짐승 고기 특유의 맛(누린내와는 또 다른)이 느껴져 아 새끼는 새끼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마무리는 세라두라serradura와 커피. 세라두라는 비스킷을 가루낸 것 한 겹, 크림 한 겹, 다시 가루 한 겹, 또 크림 한 겹 하는 식으로 쌓아 만드는 디저트인데 요렇게 케익처럼 모양을 잘 잡아 잘라 먹기도 하고(근데 입에 넣으면 샤라락 해체됨) 컵에 챡챡 쌓아 만들기도 합니다.
우얏든동 그렇게 식사를 멀쩡히 마치긴 했는데 그래도 역시 이왕이면 동네 사람들이 가는 식당을 한 번이라도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오늘처럼 대부분 문을 닫았다면 차라리 이것 저것 장을 봐다가 숙소에서 먹는 게 낫겠어요... 라고 뒤늦은 후회와 앞으로의 다짐을 매우 건전하게 해 보는 여인.
저녁을 먹은 후에는 무엇을 했느냐, 물어 물어 파두fado 음악을 연주한다는 곳을 찾아가 음악을 듣고 술도 조금 마시고
밤거리를 멍하니 헤매며 다녔습니다.
그러다 마주친 조각. 파두 기타인 기타라 포르투게사guitarra portuguesa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네요.
그 아래엔 파두 곡 <코임브라 메니나 이 모싸Coimbra Menina e Moça>의 가사가 이렇게.
아름다운 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