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작년 가을 황정산 시인 북토크 준비 하면서 '시'가 나의 유년을 환기시켰다.
시집 속의 '어처구니'라는 한 단어에 마법에 걸려
나는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오래 유랑했다.
지난 4월『징후의 시학』을 읽고 김효은시인 북토크를 했다.
계획에 없었지만 갑자기 자리에 함께 하신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님께 낭독을 부탁드렸다.
평론집 뒷부분 <허연의 시 세계> 내용을 밑줄 쳤고, 시인으로 등단해서 세 번째 평론집을 낸 김효은시인평론가를 소개하기에 좋은 글이었고, 이 글을 시를 쓰는 신부님이 읽어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부탁드렸지만 긴 글을 모두 읽어주신 신부님의 음성은 시처럼 들렸고, 소녀였던 김효은 시인이 스승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을 순간을 헤아리며 북토크를 열었다.
"허연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사제를 꿈꿨던 그러나 '문학적 신앙'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또 다른 한 사람을 상기한다. 『불온한 검은 피 』의 해설을 쓴 황병하 평론가이다.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로 진로를 바꿔 외국으로 유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시, 평론, 소설, 보르헤스 번역을 남겼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1998년 10월 작고했다. 피부와 머리칼과 눈동자가 유난히 검었던, 그러나 눈빛만큼은 태양처럼 이글거리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그의 문학 강의는 적도에 내리쬐는 단 한 번의 태양처럼 강렬했다. 그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은사님이다. 과도하게 팽만했던 우주적 자아의 우저적 질문. 저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시인이 못되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심각하게 고백하던 스무 살의 한 여대생을 기억한다. 시를 못 쓰면, 나처럼 비평을 하면 되지? 하고 털털하게 웃으시던, 그러나 사뭇 진지한 눈빛과 어조로 포기하지 말라고 전언하시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인연이라는 것은 이토록 무섭고 끈질기다. 고(故) 황병하 평론가가 첫 시집 해설을 쓴, 허연 시인의 지층을, 경악을, 절창들을, 그러나 사랑의 시학을 어설프게 시 연구자가 된 그의 제자가 다시 읽어내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을 , 운명이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만난 것도 실존이고 실존해명의 순간들이 아닐 수 없었으니, 다만, 짧고 강렬해서 더 행복하게 남은 기억이라 말할 수밖에."
시인은 그 시간 동안 말하지 않으며 말을 했다.
"절벽에 혼자 서있었던 순간에 언제나 나를 강렬하게 붙들어준 건 시와 문학 그리고 영혼과 물성이 함께 담긴 책(冊)이었다"라고.
그날 참가했던 손님 중 강유환 시인이 있었다.
그분의 시집 『장미와 햇볕』을 읽었다.
돌이켜 아파하는 시간을 새로운 심신으로 교체하고 있는 시기에 잘 만나고 말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나는 떠나버린 강아지들의 눈, "공정 또한 불공정 반열에" "아무리 공정이어도 불공정이다"를 읽으며 무수했던 일들이, <싱크홀>을 읽다가 원인 기사를 , <그냥 1><그냥 2>를 읽으면서 아무리 너무한 사람이었더라도 내게 그런 사람 단 한 명이었음을...
세상에 아파하는 시인, 예민한 시인으로 다가오자 그날 북토크 때 질문을 통해 들었던 허스키한 목소리는 시인의 '절규'로, 봄꽃으로 피어나는 시인의 절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으로 며칠을 함께 하다가 결국 세 권을 더 사고 재고가 있는 다른 책도 함께 주문했다.
『고삐 너머』『존재, 그 황홀한 부패 』
시는 가성비가 크다.
읽는 시간 대비 저며드는 감동과 일으키는 파도가 크다.
내 곁 여기저기 있던 시집을 한 곳으로 모아두며 서가를 흝다가 가지고 있던 이창동 각본집 '시'를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 글을 여기서 또 만났다.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 씨밖에 없네요."
사는 일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과 살아온 시간을 속죄하는 일"로 좁히며 삶을 더 단순하게 체를 치고 싶게 한 이 한 문장의 힘을 책 속에서 직접 만나보시길.
5월 17일 언니 생일이어서 어제 광명 언니 집에 갔다.
언니집과 3킬로 정도 떨어진 <꽃과 생활>에서 꽃다발을 준비했다.
꽃과 생활 대표님은 이미 약속이라도 하고 나를 만난 듯, 시집을 주셨다.
빗길에 열어보지도 못하고 집에 와서 펼쳤다.
많이 반가운 나희덕 시인의 시집, 내 이름의 친필 사인이 적혀있었다.
"모든 물질들에게 감사를!" 『시와 물질 』
꽃을 받으러 갔는데 '시'를 받다니!
나희덕 시인이 머물었던 조선대학교를 우리는 '조대'라고 불렀다.
조대치대언니오빠들이 치과스케일링 봉사를 해주곤 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로 나희덕 시인이 일터를 옮긴 소식을 듣고 아이처럼 서운했다.
많이 팔았던『파일명 서정시 』 이후 이제야 새 시집을 만났다.
그동안 시를 잊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 전 읽은 <존엄한 퇴거> 시 한 편이 늦은 아침까지 누워있게 했다.
"완벽한 영점으로 돌아가는 것. 존엄한 퇴거였다"
살아가는 시간 '시'로 지키며 살아가야지.
오늘은 우리 언니 생일이다.
어린 시절 받았던 편지를 들춰보면 '시'가 적혀 있다.
나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건네주던 울언니의 문학적 '시' 성분은 사라지고 없지만
동생들에게 부어준 삶의 '시'가 고마워 황인수 신부님의 시같은 에세이를 놓고왔다.
『쓸쓸한 밤의 다정한 안부 』
어느 날 '시'를 '조우'했다.
"그냥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성이 안 차고 작정하고 만난 것도 아니다."
"작정하고 만난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진 것도 아니다.
우연한 만남, 필연적 따름."
거기엔 '시'같은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