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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안 Oct 06. 2022

밤과 낮의 바다

제2장 아주 사적인 여행

밤과 낮의 바다

니스



*제일 맛있는 술

이탈리아로 가면 밥값이 싸요.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에서 들은 말이다. 니스로 말할 것 같으면 부자들이 몰려오는 대표적인 휴양지다. 니스 옆에 모나코 왕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나코 왕국은 카지노가 국가사업이다. 대표적인 면세국가이기도 하다. 전 세계 부자들이 모나코 왕국에 페이퍼 컴퍼니를 차리는 방식으로 탈세한다. 바다에는 사람보다 고급 요트가 더 많다고 들었다. 니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도로를 그대로 두어 길이 울퉁불퉁했는데, 그 위로 람보르기니가 지나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

밤마다 바다 근처 술집을 찾았다. 니스에서는 나도 부자가 되어 보고 싶었으므로 무리해서라도 메인 요리를 시키곤 했다. 밤에는 파도 소리만 들렸고,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빛났다. 간간이 들리는 묵직한 스포츠카 엔진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고급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돌아다니며 빈 잔에 물을 채웠다. 종업원을 부를 때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주문할 때는 목을 눌러 최대한 멋있는 억양을 흉내 냈다. 턱은 사십오도 각도로 들었고, 허리를 곧추세웠으며, 어깨를 적당히 벌리고 앉았다. 고기는 최대한 작게 썰었다. 그때 나이프가 접시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불편했다. 부자의 태도는 불편한 것이리라.

여느 때처럼 불편한 자세로 술을 마시던 밤이었다. 귀엽게 생긴 스포츠카에서 남자가 내렸다. 2인용 일제 스포츠카였는데 모델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후줄근한 티셔츠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는 터벅터벅 술집으로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벗겨져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린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나 있던 자리에는 거뭇거뭇 흔적이 남는데, 그 남자의 머리 중앙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인이었고, 푸근한 스타일이었다(격투기 선수 에밀리아넨코 효도르가 연상되었다). 그의 첫 잔은 보드카였다.

보드카 한 잔을 금세 비우더니 두 잔을 더 시켰다. 이윽고 내게 한 잔을 내밀었다. 대화하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 할 만한 대화가 무엇이 있겠는가. 국적은 어딘지, 왜 여기에 왔는지, 따위의 질문을 받을 거라고 짐작했다. 잔을 받으면 질문 세례가 쏟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거절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보드카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이 비면 또 보드카를 주문했다. 그때마다 내 것까지 시켰다.

“대체 왜 술을 사주는 거죠?”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좋지 않아요?”

“보드카가 정말 맛있다고 생각해요? 난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떤 술이 맛있다고 생각해요?”

“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냥 기분으로 마시는 거죠.”

“술은 지금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는 술이에요.”  


*니스의 밤과 아침

보드카를 몇 잔이나 더 마셨을까. 네 잔까지는 세었던 거 같다.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에 술집을 나왔다. 그가 숙소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바다를 왼쪽에 두고 걸었다.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길을 안내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두 명의 여자가 말을 걸었다. 나를 따라 걸으며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 땡큐. 이 말을 하자마자 돌아서 가 버렸다.

니스에서는 부자의 태도를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술을 사 줬던 사람의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걸음걸이를 바꿨다. 기억과 땅을 수차례 더듬거리며 걸었고 이내 숙소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졸음이 밀려왔다. 니스에서 나의 구역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숙소 침대 한 칸이었고, 다행히 정확한 장소에서 정신을 잃었다. 별안간 아침이 왔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조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곧장 게스트하우스 라운지로 내려갔다. 스크램블 에그 접시가 비어 있었다. 슬라이스 햄도 두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위층에서 누군가 라운지로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얼른 햄 두 장을 집어 바게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우유 한 컵을 들고 잼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내려온 사람이 과일 몇 조각을 그릇에 담고는 자연스레 앞에 앉았다. 나와 같은 방 같은 침대 2층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온 여성이었다. 그는 채식주의자다. 이틀 전에도 함께 아침을 먹었다. 혼성 도미토리룸이었는데, 그는 종종 문을 살짝 열어두고 샤워했다. 커다란 타월로 대충 몸을 감싸고 나와 속옷 차림으로 방을 돌아다닌 일도 있었다. 니스의 해변에서 수영복 상의를 벗고 가슴을 하늘로 향한 채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비슷한 것이겠구나. 뭐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척했다.


*마피아와 샌드위치

아침에 시작한 대화가 밤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지난밤에 술을 많이 마셨고, 밖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마침 일주일 뒤에 이탈리아에 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이탈리아에 관해 이것저것 물을 게 많았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인이 진짜로 자주 먹는 음식은 무엇인지, 피자에 어느 정도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를 물었다. 대화가 길어지자 여자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고,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요약하자면, 애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상대방이 친한 친구였다는 이야기다. 장르는 기어코 누와르가 되었다. 그의 사촌오빠는 마피아다. 바람피운 애인을 찾아가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급기야는 진짜 큰일이 날 것 같아 말리느라 애를 썼단다. 자기가 시칠리아를 떠나야 이 사단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길로 프랑스에 오게 된 것이다.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야 모르죠.”

더는 궁금하면 안 될 것이다. 어떤 결말이더라도 이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잘못되었거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거나, 분노만 쌓일 뿐이다.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며칠 동안 고급스러운 저녁 식사를 즐기느라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니스에서 먹는 밥은 둘 중 하나였다. 서브웨이에서 인스턴트 샌드위치를 먹거나, 샐러드 한 접시에 2만 원씩 하는 레스토랑에 가거나. 다른 도시에 갈 때까지 서브웨이 샌드위치로 연명할 생각이었다.

“니스에서는 부자처럼 살고 싶었어요. 그들의 삶이 궁금했거든요. 저녁마다 비싼 스테이크를 사 먹었죠. 이제는 돈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서브웨이 샌드위치 어때요?”  

“서브웨이 좋죠. 여행이잖아요. 무엇을 먹는 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에서 먹는 가가 더 중요한 일이죠. 바다 앞 벤치에서 샌드위치 먹는 게 가장 여행다운 식사일 거예요.”

우리는 샌드위치를 들고 해변 벤치에 앉았다. 어두운 바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낮에 바다를 가까이하던 사람들은 밤이 되면 길 건너 레스토랑 불빛 아래로 들어갔다. 빛이 비치는 곳에만 사람이 있었다. 요란한 엔진 소리 때문에 스포츠카가 지나갈 때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람보르기니가 지나갔다. 그 뒤를 포르쉐가 따랐다. 지난밤에 만난 두 명의 여자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길 건너 레스토랑에는 고기를 작게 썰어 먹는 사람들이 느긋한 식사를 즐겼다. 샌드위치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빵과 채소가 들어찼다. 그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남은 채소를 종이에 묻은 소스에 찍어 먹었다. 나도 그렇게 했다. 입가에 남은 소스는 혀로 핥아 먹었다.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 부딪치는 파도, 위에서부터 짙어지는 하늘, 소리가 나지 않는 고기 접시, 묵직한 억양으로 말하는 사람들, 가로등 아래 여자, 슈퍼카의 엔진소리, 욱여넣은 샌드위치, 그의 턱에 묻은 소스, 아무도 없는 바다, 반쯤 태운 담배. 지극히 여행다운 것들로 이루어진 밤, 저녁 식사가 끝났다.

그가 말했다.

“이탈리아는 이곳보다 밥값이 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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