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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안 Oct 09. 2022

적당한 거리의 인간

제2장 아주 사적인 여행

적당한 거리의 인간

비엔티안&루앙프라방



*그럼 옷은 왜 입니?

비엔티안(Vientiane)의 식당에는 에어컨이 없다. 커다란 선풍기 한 대가 더위를 식혀주는 유일한 기계였다. 자리에 앉은 지 몇 분이 지났지만 주인이 다가오지 않았다. 느긋한 주인이 메뉴판을 들고 와 식탁에 툭 놓고 갔다. 손님이라고는 나와 함께 간 동생뿐이었지만 주인은 우리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게으른 사람이 소가 된다는 우화를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라오스에 사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기겁을 할 거다. 첫 번째 이유는, 더운 라오스에서 낮잠은 필수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 이유는, 소가 라오스 사람에게 신성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라오스 사람들은 물소의 콧구멍에서 나온 박넝쿨에서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비엔티안의 하루는 이러했다. 오전 열 시에 일어나 숙소 앞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고는 다시 돌아와 게스트하우스 공용공간에서 투숙객에게 공짜로 주는 커피를 마셨다. 오후 열두 시.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고 오후 네 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 정신을 차렸다. 오후 다섯 시 무렵이 되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데, 그제야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잠시 게스트하우스 밖에 발을 디뎌보고는 또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뜨겁게 달궈진 거리는 해가 져도 당최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짜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두어 시간쯤 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후 여덟 시가 넘어서야 거리를 걸을 수 있었고, 곧장 메콩강으로 향했다.

해가 다 지고 나면 메콩강을 따라 기다란 시장이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공예품부터 티셔츠, 숟가락, 라이터까지 웬만한 물건은 다 판다. 조금 한산한 강둑에서는 거리 음악가가 연주를 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리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래전 이력서를 넣으며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러시아워 시간에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엔티안에서는 방 안에 갇혀 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그마저도 흥미로웠다. 어깨를 비비며 걷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메콩강의 밤 시장을 걸으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건 결핍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일상을 오만한 시선으로 누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출근 지하철에서 어깨를 비비며 눈을 흘기던 사람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심지어 미움으로 변했다. 게다가 키가 작아 붐비는 지하철에서 항상 누군가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숨 쉬어야 했다. 출근 시간은 견딜 만했으나, 퇴근 시간은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퇴근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인중에 향수를 묻히는 버릇도 생겼다. 방 안에 갇혀 있었던 시간은 눅진한 더위에 축축해진 어깨를 비비는 일마저 기꺼이 즐기게 만들어 주었다. 무언가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삶을 지탱하는 무수한 서사를 발견할 수 없지 않을까.

시장을 돌아보고 나서 노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대나무 통에 담아주는 찰밥인 카오니아오(Khao Niaw)와 구운 치킨을 시켰다. 쫀쫀한 찰밥에서 은은하게 대나무 향이 났다. 테이블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있었지만, 손으로 밥을 집어 먹었다. 라오스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고 싶었다고 잘 포장하고 싶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다. 종종 한국에서도 손을 사용해 반찬을 집어 먹곤 한다. 젓가락을 정석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손으로 반찬을 집으면 어머니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씩 듣곤 했다. 다만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어머니 탓을 했다. 어머니의 젓가락질이 정석이 아니었고, 나는 그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인간은 정말 야만적인가. 단지 문화라는 거대한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라오스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 순간마다 희열을 느꼈다. 공공연한 비밀 하나를 터놓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손으로 밥을 집어 먹고 싶어서 라오스에 온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규칙에 균열을 내보고 싶었던 거다. 틈을 벌리고 그 속에 들어가 구경한다. 내가 너의 곁에 있고 싶어서 지키고 있는 무언의 약속은 무엇이었나. 혹은 감추고 있는 본성은 어떤 것이었나. 때로 스스로 낸 균열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버려야 했던 행동이나 말, 감정이 쌓여 무겁게 삶을 짓누를 때 배낭을 싸는 이유다. 손에 묻은 찰밥 잔해를 쪽쪽 빨아먹거나, 기름 묻은 손을 바지에 쓱 문질러 닦을 때 살아 있다고 느꼈다. 물론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면 어머니는 항상 명쾌하게 반박했다. 그럼 옷은 왜 입니?


*루앙프라방행 야간 버스

비엔티안에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보낸 열 시간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낄 요량으로 값싼 버스를 예약한 일이 화근이었다. 라오스에서는 버스를 타기 위해 구태여 터미널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 버스를 예약하면 출발 시간에 맞춰 숙소 앞에 툭툭이가 왔다. 친절하게도 숙소 문을 두드리며 얼른 준비하라고 안내해 주었다. 값싼 버스를 이용하면서 이런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니, 호사라고 생각했다. 그게 야간 버스에서 누린 유일한 서비스라는 걸 출발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버스는 제법 컸다. 현지 여행사 포스터에는 와이파이가 되는 버스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다. 야간 버스였으므로 아무도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다. 안대를 쓴 사람들이 보였고, 나 역시 밤새 잠을 잘 생각이었다. 에어컨 송풍구에는 열림과 닫힘 버튼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애초에 에어컨 송풍구를 막는 커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더운 나라에서 담요를 챙겨 들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추위는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가방에서 긴 청바지를 꺼내 팔에 끼웠다.

몇 분이나 갔을까. 텅텅 비어 있던 버스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길가에서 손을 흔들면 마치 택시처럼 손님을 태우곤 했는데, 자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는 사람을 욱여넣었다. 버스 안에 현지인이 많아졌고 나는 배낭을 가랑이 사이에 감추었다. 잠시 휴게소에 들렀을 때,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차별과 편견은 없어야 한다고 떠들던 지난날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든 제 일이 되면 그제야 감춰둔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가는 길 내내 제대로 포장된 도로는 없었다. 울퉁불퉁한 산길이 이어졌고 창가에 앉은 것이 그날의 가장 큰 실수였다. 산길을 지날 때면 아찔한 절벽이 눈 아래 펼쳐졌다. 가드레일은 없었다. 좁은 길목에서 마주 오는 차량과 비껴갈 때면 낭떠러지 끝에 버스 바퀴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쪼여오는 듯했다. 때마침 앞자리에 앉은 관광객이 멀미를 시작했다. 역겨운 토사물 냄새가 진동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싶었으나 절벽이 무서워 코만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열었다.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코끝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굉장히 세게 틀어 놓았기 때문에 몸은 추웠고 코와 얼굴 주위에만 땀이 났다. 숨을 쉬려면 뜨거운 바람을 맞아야 하고 더위를 식히려면 역겨운 토사물 냄새를 맡아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후에 이 장면을 어느 잡지에 원고로 실었는데, 다시 읽으니 엄청나게 포장되어 있다. 기다림 끝에 도착한 고대 도시 루앙프라방이라느니, 시처럼 오랜 시간 끝에 찾아와야 진짜 여행이라느니, 하여간 이십 대 중반의 나란 사람은 멋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그 버스에서 얻은 거라고는 단 하나뿐이다. 돈이 있으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교훈이다. 루앙프라방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사를 찾아갔고 다음 목적지인 팍세(Pakse)까지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얼굴을 들키지 않는 밤

루앙프라방에 간 건 승려들의 탁발 행렬 때문이었다. 라오스 남성들은 청소년기에 절에 들어가 교육받는다. 한국에 군대가 있다면, 라오스에는 절이 있는 것이다. 아침마다 머리를 밀고 승려복을 입은 어린 승려가 늙은 승려의 뒤를 따라 줄지어 걸어갔다. 주민과 관광객은 그들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 음식을 넣었다. 탁발 행렬이 시작하는 장소에서부터 노점이 들어서는데, 승려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판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이 장면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먹을 것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주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이 주는 사탕이 전부였다. 청소년기에 대가 없는 음식을 받아먹는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라 생각했고, 나도 그들에게 대가 없는 음식을 나눠주고 싶었다.

공짜 음식을 나눠주는 일은 나름의 반항이었다. 종종 사회가 거대한 시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무언가 주어야만 받을 수 있는 시장 같았다. 단지 물건만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준 사람에게 마음을 받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조금 더 큰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내어 준 마음을 돌려받지 않고서도 섭섭하지 않은 대인배라고. 탁발 행렬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 커다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노점에서 음식을 샀다. 탁발승에게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을 마음이 여기 있다고 알려주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서.

여섯 번째 승려의 바구니에 음식을 넣었다. 깡마른 체형에 유난히 키가 작은 승려였다. 턱 중간쯤에 점이 있었고, 볼에는 붉게 여드름이 나 있었다. 음식을 바구니에 넣으며 승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휙 지나가 버렸다. 다음날 낮에 거리에서 그를 마주쳤다.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다른 승려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두 승려 앞을 얼쩡거리며 걸었다. 그 후로 탁발 행렬에 가지 않았다.

탁발 행렬에 가는 대신 늦잠을 자고 저녁마다 작은 강가에서 노을을 구경했다. 낮과 밤의 틈새에서 자라는 노랗고 붉은빛 아래 앉았다. 강물은 소리로만 남고 사람이 점점 그림자가 되었다. 얼른 더 어두운 밤에 되었으면 했다. 가끔은 실체보다 그림자가 훨씬 편하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는 승려들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마음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어쩌면 삶에는 실체보다 허구의 사람이 더 많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마음을 준 사람보다 마음을 주지 않은 사람이 더 수두룩하다.

우습게도 나는 그림자를 보며 안도했다. 버스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학생이나, 출근 지하철에서 같은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던 노동자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수한 삶의 그림자가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마음을 주거나 받지 않아도 괜찮다. 알아서 살아갈 것이다.

다리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손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렸다. 얼굴을 들키지 않는 밤, 누구도 아프지 않을 안녕. 승려들과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나서야 아프지 않을 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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