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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안 Oct 14. 2022

밀라노의 백 년 객잔

제2장 아주 사적인 여행

밀라노의 백 년 객잔

밀라노



*저글링

유산은 좋은 걸까. 밀라노의 숙소에서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생각했다. 이십 인실에 화장실은 하나였다. 변기에는 커버가 없었고,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숙소의 겉모양은 번지르르했다. 카운터 직원이 말하기를 지어진 지 백 년이 다 된 건물이라고 했다. 정원이 있는 아파트였는데, 대문이 으리으리했다. 어림잡아 높이가 사 미터는 되어 보였다. 내 방은 그 건물의 다락방이었다. 하룻밤에 2만 원 남짓했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예약해 놓은 터였다. 요금은 선불이었다.

밀라노에서 지낸 칠일 중에 육일은 비가 왔다. 구석에 있는 이 층 침대 옆으로 물이 조금씩 새어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커플이 쓰는 침대였다. 내 침대 이 층은 폴란드인이 사용했다. 금발색 단발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는 박식했다. 말도 그만큼 많았다. 말하는 속도도 빨랐는데, 가끔은 생각을 입이 따라가지 못해 더듬거리기도 했다. 로마에서 온 이탈리아인과 논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주제는 이탈리아의 진정한 수도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었다(이탈리아의 수도가 밀라노냐, 로마냐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격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주제다). 논쟁은 폴란드인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탈리아의 수도는 어디라고 생각해?”

“당연히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지.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경제적으로 이탈리아를 먹여 살린 건 밀라노야.”

“돈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아.”

“하지만 밀라노의 산업이 없었으면 이탈리아는 사라졌을 거야. 역사적인 수도가 로마인 것에 동의하지만 경제적 수도는 밀라노가 분명해.”

“수도는 둘로 나눌 수 없어. 이탈리아의 수도는 누가 뭐래도 로마야. 밀라노는 산업도시일 뿐이지.”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폴란드인이 뜬금없이 이름을 물었다.

“율리우스.”

“어쩐지, 로마인다운 이름이군.”   

“나는 이탈리아 사람이야. 폴란드 사람이 뭘 알겠어!”

이탈리아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고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폴란드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쪽 어깨를 들썩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이름은 B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집이 너무 세서 탈이야.”

“이탈리아 역사를 잘 아는 것 같던데, 어디서 그걸 배운 거야?”

“대학교에서 라틴어를 전공했어. 언어를 배우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지.”

“흥미로운 전공이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라틴어라니. 그럼 지금은 어떤 일을 해?”

“거리에서 저글링 공연하며 살고 있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말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B는 저글링을 보여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글링 공이 위층 가방에 있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이 영 어정쩡했다. 운동화 밑창이 달랑거렸다. 신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소리가 두 번씩 났다. 타닥타닥. 말하는 속도와 달리 걸음걸이는 아주 느긋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틱, 쓱,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저글링 공을 들고 온 B는 한 손으로 세 개의 공을 굴리기 시작했다. 공중에 공을 띄워놓고 오래 떨어뜨리지 않았다. 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저글링에 관해 설명하기도 했다. 말하며 저글링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듯했다. 마지막 공이 손에 들어오자 짧은 공연이 끝났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공연이 끝나자 구석에 있던 인도네시아 커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하여 한 테이블에 나와 B, 인도네시아 커플까지 네 사람이 앉게 되었다.


*신이 준 선물

인도네시아 커플은 먹고 있던 피자 두 판을 들고 왔다. 둘이 먹기에는 많아 보였다. 이들이 커다란 피자를 두 판이나 얻게 된 데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슬림이기 때문에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았다. 피자 가게 직원이 실수로 베이컨이 들어간 피자를 준 것이다. 직원은 미안하다며 잘못 나온 피자도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단다. 고민하던 차에 같은 방에 묵는 여행자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들고 오게 된 사연이다.

베이컨이 들어간 피자는 B와 내 몫이었다. 피자를 한 조각씩 나눠 들었다. 비가 많이 온 날이었다. 피자 상자 가장자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다행이야. 피자는 비에 젖지 않았어. 먼저 한 입 베어 먹은 B가 말했다. 피자 귀퉁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치즈가 뚝뚝 끊겼다. 도우는 약간 눅눅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B는 공짜 피자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값싼 여행이야말로 진짜 여행이라며 입을 열었다.

B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도 두어 번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항공사의 프로모션이나 실수를 활용했다. 밀라노에 오게 된 것도 어느 항공사의 실수 덕분이라고 했다. 도쿄에 머무르며 다른 나라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20만 원도 안 되는 밀라노행 편도 항공권이 나왔단다. 도쿄에서 밀라노까지 오는 비행기가 단돈 20만 원이라니. 일의 발단은 방에 누워 여러 항공사 웹사이트를 뒤적거리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쿄의 친구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던 B는 본래 한국에 가고 싶었다. 도쿄에서 일주일 동안 한국행 항공권 프로모션을 기다린 것이다. 매일 웹사이트를 뒤졌는데, 좋은 항공권이 여간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인터넷에 이탈리아행 항공권 프로모션 광고가 뜬 거다. 무심결에 클릭했고 거기서 밀라노행 항공권이 단 돈 이십만 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B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이 그를 다시 유럽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비행기 티켓을 사고 짐을 쌌다.

20만 원짜리 신의 부름은 사실 항공사 직원의 실수였다. 항공사 직원이 금액을 잘못 올렸고 삼십 분 만에 철회했는데, 그사이 B가 티켓을 사버린 것이다. 이미 결제가 끝나 무를 수 없었단다. 그리하여 B는 내가 이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오기 전날 밀라노에 오게 됐다. 그는 여행하며 돈을 얼마나 쓰지 않았는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언젠가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값싼 티켓은 삼 일짜리 왕복 티켓이었고 하늘 위에서 보낸 시간을 빼면 하루 반나절 정도 서울에 머문 적도 있다. 그것도 여행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커플은 B와 생각이 비슷했다. 두 사람 역시 돈을 쓰지 않는 여행에 관하여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꺼내 놓았다. 가장 싼 방에 묵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달리 내세울 만한 에피소드는 없어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인도네시아 커플은 공짜 피자를 놓고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B는 그 말에 격하게 동조했다. 이들에게 신이란, 가난인 건가. 아니면, 가난이 주는 우연인 건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밤의 일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나는 아주 프라이빗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가. 낡은 천장에 빗방울이 부딪힐 때마다 방 전체가 울렸다. 문득 물이 새던 인도네시아 커플 침대가 생각났다. 역시나 벽 모서리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 옆에 붙은 침대가 격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윗옷을 벗은 책 뒤엉켜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서로 입을 막고 있었다. 다행히 빗소리가 크게 들려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빗소리가 울리는 밤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소리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시끄러운 밤이었다.

언젠가 공원에서 작은 새를 본 적이 있는데, 새를 본 이후부터 공원 가득 새소리가 난다는 걸 알게 됐다. 인도네시아 커플의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 알게 되었고, 몇 개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이건 빗소리고, 저건 숨소리, 다른 건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소리를 구별하게 된 순간부터 신경이 쓰여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새벽에는 악몽을 꾸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티브이에서 재난 뉴스가 한창이었다. 간밤에 지진이 났다. 밀라노에서 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난, 지난 백 년 사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수많은 문화유산이 무너졌다. 뉴스를 전하는 기자 옆에서 많은 사람이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지진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 오래된 건물이 지진에 약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밀라노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젯밤 밀라노도 제법 크게 흔들렸다고 했다. 지난밤에 나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무언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를 들은 뒤 백 년이나 된 이 늙은 아파트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침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더러운 화장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스무 명이 쓰는 방에 화장실이 달랑 하나 있으니,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고약한 일이겠구나.

낮부터 비가 그쳤다. 더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도시로 가는 날이었다. 밀라노의 맑은 하늘은 다음에 보기로 했다. 짐을 싸서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B와 인도네시아 커플이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가볍게 포옹을 나눴다. 돌아서서 거대한 대문을 힘껏 밀었다.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 북부 작은 도시 크레모나였다.

문을 열고 나와 길을 나섰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크레모나로 가야지. 크레모나(Cremona)에 왜 가야 하지? 배낭 안에 질문이 잔뜩 들어찬 모양이었다. 밀라노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무언가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 어젯밤 지진에서 살아남은 이유, 가난하게 떠돌아다니는 이유, 멋있어야 하는 이유, 사랑받아야 할 이유, 사랑할 이유. 아무 답도 얻지 못했다. 단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크레모나로 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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