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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안 Oct 15. 2022

발아래서 빛나는 별

제2장 아주 사적인 여행

발아래서 빛나는 별

르아브르



*담배 피우는 남자

르아브르(Le Havre)의 하늘은 자주 흐렸다. 하루에 두세 번씩 비가 내렸다. 먹구름이 몰려왔다가 금세 개는 일이 잦았다. 이곳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우산을 펴지 않았다. 대신 빗방울이 굵어지면 가까운 건물 아래로 들어갔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건물 아래로 뛰어 들어갔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옷은 이미 다 젖어 있었다. 남자는 안경을 벗어 젖은 셔츠에 문질렀다. 겉옷에 맺힌 빗방울을 툭툭 털고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말끔한 검정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신사였다. 젖은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도중에 비를 맞은 듯했다. 주머니에서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올라갔다. 이윽고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비가 제법 길게 오네요.”

“이 도시는 비가 정말 자주 오네요.”

“르아브르에는 여행 온 건가요?”

“저는 여행 잡지 기자예요. 출장을 온 셈이죠.”

“오호, 여행이 일이라니, 멋지네요.”

“여행이 일이 되면, 비를 원망하게 돼요.”

“왜죠? 비에 관해 기사를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맑은 날씨의 여행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조금 더 많죠.”

“재밌는 일이죠. 비는 좋은 거예요. 나무와 풀을 자라게 하죠. 하지만 우리는 비를 피해요. 일상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거든요.”

남자는 담배 연기를 뻐끔 내뿜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사실 나도 한창 짜증을 부리고 있었어요. 얼른 좋은 기삿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비가 오니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곳은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드물어요. 비가 와서 유채꽃이 잘 자라죠. 노르망디 카놀라유가 유명하다는 거 알고 있나요?”

“오, 몰랐습니다. 그저 노르망디 상륙작전만 머릿속에 채워 넣고 왔죠.”

“많이들 그렇죠. 워낙 유명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진짜 노르망디는 비가 자주 오고 유채꽃이 피는 곳이에요. 이건 수십 년 전 일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죠.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 의미 부여해요. 마치 더 대단한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안심하세요. 지금 이곳에 나치는 없어요.”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폭탄이 아니라 빗방울이어서 다행이네요.”

“폭탄은 생명을 죽이지만 비는 생명을 자라게 해요. 폭탄은 돈을 주고 만들지만 비는 그냥 얻는 것이죠. 우리는 값없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살아요. 거저 얻은 것은 하찮게 보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죠.”  

“지금 한 말을 내 글에 사용해도 될까요?”

“저야 영광이죠. 이름을 적을 필요는 없어요. 담배 피우는 남자로 소개해주겠어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그대로 소개해주면 좋겠어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 빗방울이 얇아졌다.

“꼭 그렇게 할게요. 덕분에 쓸 만한 것들이 떠올랐어요. 고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비는 금세 지나갈 거예요. 아쉬워하지도 마세요. 얼마 뒤에 비가 또 올 거니까요.”

남자는 잠시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비가 거의 그쳐 가고 있었다.

얼마 후 거짓말처럼 날이 맑아졌다. 비가 그쳤다는 표현보다 맑아졌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멀리서부터 하늘이 천천히 개었다.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서 빗방울이 점점 얇아졌다. 남자는 조금씩 맑아지는 먼 하늘을 보고 있었던 거다. 비가 다 그치기도 전에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내 어깨를 툭 쳤다. 이 도시 잘 소개해줘요. 짧은 인사를 남긴 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급한 발걸음이었지만 귀신같이 물웅덩이는 피했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마다 빗방울이 튀어 올랐다. 비를 머금은 돌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멈추었다 다시 시작하는 일이 익숙해 보였다.


*어둠 속에 머무는 연습

르아브르 시내로 들어가니 콘크리트 아파트가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파트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주거 공간이라 생각했다. 수백 가구가 같은 모양의 집에서 산다니. 개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건축물이다. 파리나, 로마가 아름다운 건 각기 다른 모양의 건축물이 나란하게 서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점심을 먹은 뒤 프랑스 관광청에서 나온 가이드와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가이드가 먼저 나와 있었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밝은 색 스웨터를 입고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와 멋스럽게 구부러진 안경테가 눈에 들어왔다.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말은 통역사를 거쳤다. 가끔 공식적인 지역 안내가 아닌, 개인적인 생각을 전달할 때면 서툰 영어로 짧은 문장 한두 개를 만들었다. 그의 영어는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성 요셉 교회로 데려갔다. 르아브르 어디를 가도 보이는 높은 탑이 있는 교회였다. 문 위에 작은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웅장한 건물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십자가였다. 외벽에는 형형색색 장식물이 붙어 있었다. 이슬람 사원에서 문양과 비슷했다. 가이드는 이 교회가 프랑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의 대표작이라고 했다. 그는 문을 열고 교회 안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공간에 조각 빛이 스미는 공간. 장식이라고 생각했던 조각은 실은 창문이다. 아주 작게 난 창문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강단 쪽으로 갈수록 빛이 드는 자리가 많아졌다. 강단 앞쪽 천장은 밖에서 보았던 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높이 솟은 탑을 작은 창이 둘러싸고 있다. 빛이 드나드는 길이 보였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성화나 십자가는 많지 않았고, 빛과 어둠만 교회 안에 가득했다.

오귀스트 페레는 일부러 십자가를 크게 만들어 놓지 않았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서 기도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교회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기도하는 공간이었다. 가장 어두운 구석에 몇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성호를 긋기도 하고, 두 손을 모으기도 했다.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성 요셉 교회 창으로 여러 갈래 빛이 드나들었고, 해가 떠 있는 방향에 따라 어두운 부분이 밝아지거나, 밝은 부분이 어두워졌다. 누군가의 기도가 깊고 높은 탑 안에서 공명했다.

성 요셉 교회를 나오며 가이드가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조합하여 말했다.  

“Pray … Practice … Stay… In The Dark(기도는 어둠 속에 머무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늘 아래에서

르아브르에 아파트가 많은 건 전쟁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곳은 독일군 최후의 점령지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르아브르의 독일군을 말살하기 위해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도시 전체를 폭파하는 것. 1944년 9월 5일 이 끔찍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연합군의 폭격이 이어졌고, 폭탄이 비처럼 내렸다. 르아브르에 남아 있던 민간인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도시의 80%가 폭파됐다. 만 이천 가구가 불구덩이에 아래 묻혔다.

전쟁 이후 프랑스 정부는 살아남은 르아브르의 민간인 8만여 명이 살아갈 도시를 재건해야 했다. 그때 정부에서 도움을 요청한 건축가가 오귀스트 페레였다. 콘크리트를 사용한 근대적인 건축 양식을 지향하는 건축가였다. 당장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속도였고, 콘크리트 건축이 제격이었다. 오귀스트 페레와 백 명의 건축가가 모여 르아브르에 아파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아파트 모델하우스로 길을 안내했다. 모델하우스가 있는 아파트 앞에 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아파트의 특징은 집 문이 모두 같은 모양이라는 겁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문의 모양으로 계층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건축가는 눈에 보이는 계층 구분을 없애려고 했단다. 개성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무로 만든 소박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귀스트 페레는 가구 대량 생산을 위해 집 구조에 맞는 사이즈의 가구를 직접 제안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가이드가 설명을 마치며 말했다.

“Equality… Most Beautiful… In The World(평등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투어를 마치자 비가 내렸다. 곧 지나가겠지. 비가 올 때는 먼 하늘을 보면 된다. 오전에 만난 남자에게 배웠다. 르아브르에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에도 그저 먼 하늘을 보며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 하염없이 기다렸을 테다. 아주 긴 어둠 속에 머무르며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금세 비가 그쳤다. 돌로 만든 광장에 햇빛이 드리웠다. 빛이 닿은 돌바닥이 밤하늘 별처럼 반짝였다. 가끔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다. 어두운 밤 별을 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힐 때마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밟고 있는 지구도 은하계의 무수한 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 사람이란 쉽게 얻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다.

맑은 하늘이 찾아오면 비를 피해 서 있던 건물 아래만 비 갠 르아브르에서 유일하게 어두운 공간이었다. 몇 시간 뒤에 또 비가 왔다. 다시 사람들이 그늘 아래로 하나둘 뛰어 들어왔다. 모두 어둠 속에 머물렀다. 먼 곳에서부터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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