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아주 사적인 다짐
코바
*사소한 일들
여기서부터 일 킬로미터 걸어가면 됩니다. 매표소 직원이 말했다. 몇 페소만 내면 다른 사람이 대신 끌어주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돈이 있다는 말은 불편한 일이 하나 줄어든다는 의미겠다. 코바(Coba)는 멕시코 동부 도시 툴룸(Tulum)에서 오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유적지다. 마야 시절 도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유적지 입구에서부터 최종 목적지인 대형 피라미드 노호치 뮬(Nohoch Mul)까지 천천히 걸으면 삼사십 분 정도 걸렸다. 노호치 뮬은 높이 사십이 미터의 거대한 재단이다. 예전에는 그 위에서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예식이 열렸다.
노호치 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멕시코에서 살이 많이 쪘다. 고기가 잔뜩 들어간 타코가 어찌나 맛있는지, 당최 멈출 수 없었다. 비대해진 몸을 이끌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정글 사이로 난 길이었기 때문에 야생 원숭이나 이구아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을 볼 수 있었다. 길 중앙은 사람을 태운 자전거가 지나다녔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정글 쪽으로 붙어야 했다. 기온이 높은 날이었지만, 숲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괜찮았다. 천천히 걸어가는 사이 수십 대의 자전거가 옆을 지났다.
얼마 전 친구가 로봇 청소기를 샀다며 자랑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 소비였다. 오호라, 돈이 좋구나.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진다면 한참 전에 대머리가 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난하다는 말은 사소한 일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이겠구나. 부자라는 건 당연한 일들을 내가 아닌 무엇에게 미룰 수 있는 존재이겠구나. 자전거를 탈 걸 그랬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조금 안 되었던 거 같다. 부자 타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환경단체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이었다.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서는 일보다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일 거라고. 그 후 직장을 다녔다. 달마다 몇십 만 원 정도는 저금할 수 있었다. 그해 나는 40만 원짜리 마셜 스피커를 샀다. 이 주에 한 번 영화관에 갔고, 주말마다 과분한 음식을 배달해 먹었다. 통장에 남는 돈이 없었다. 그사이 한 푼도 기부하지 않았다.
*포기가 빠른 사람
노호치 뮬 앞에 도착했다. 오래된 돌계단을 밟고 올라야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돌계단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높이가 불규칙하고 깨진 곳이 많았다. 안전장치라고는 계단 가운데 있는 굵은 밧줄 하나가 전부였다. 멕시코 친구가 노호치 뮬을 오를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해 충고해준 적이 있다. 올라갈 때는 당당하게, 내려올 때는 겸손하게. 앞서 올라가는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내려오는 이들은 주저앉아 엉덩이를 계단에 끌며 한 걸음씩 뗀다. 마야의 재단은 보이는 것보다 더 높고 위험했다.
계단에 발을 올렸다. 밧줄을 부여잡았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뚱뚱한 몸이 불안했다. 커다란 덩치가 굴러 떨어진다면 재앙이다. 중턱쯤 갔을까. 금기를 어기고 올라온 길을 돌아보고 말았다.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고,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뒤로 밧줄을 잡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자리를 조금 옮겨 앉았다.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옆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계단만 보며 오르다가 몇 번이고 부딪힐 뻔했다. 가장자리로 몸을 옮겨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했다. 십 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같은 층에 동료가 생겼다. 백발의 미국 할머니였다. 아래에서부터 할머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의 정상이었던 거 같다. 옆에 앉아 찬 숨을 고르고 이내 말을 걸었다. 으레 하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뭐 그런. 땀이 식으면서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할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나의 한계예요. 더는 못 가겠어요.”
“저도 여기서 그만두려고 해요.”
“내려가는 걸 선택했군요. 잘했어요.”
“살면서 무언가를 끝내 본 적이 없어요. 대학도 중간에 그만뒀고요.”
“중턱에서 내려가는 것도 무언가를 끝내는 일과 같아요.”
“저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에요. 무언가 극복하려는 의지도 약한 것 같아요.”
“포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요. 살다 보니 그래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내일도 살아 있을 거잖아요? 그거면 된 거죠.”
할머니는 조금 더 쉬다 내려오겠다고 했다. 나는 엉덩이를 계단에 끌며 한 칸씩 내려갔다. 다시 땅에 발을 디뎠다. 힘이 풀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유적지 밖으로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걸어야 했다.
*행운을 빌어요
유적지 밖으로 나가는 길에 한국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머니였다.
<이곳은 전염병이 기승이야. 조심히 다니렴.>
멕시코에 와 있는 동안 한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한창이었다. 하루 몇 통씩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언젠가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한 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드는 친구였다. 몇 시간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면 코에 손을 대보고는 했다. 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숨소리가 미약해 느껴지지 않을 때면 흔들어 깨웠다. 고양이가 졸린 눈을 끔뻑이며 짜증 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살아 있구나.
한국에서 날아오는 몇 통의 문자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끔 전화해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언젠가 친구에게 전화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투덜거림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어떤 일에 관해 투덜대기 시작했다. 대체 일 처리를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나 이제 어떻게 살지? 나 망한 거 같아. 대체로 부정적인 말들이었다. 잘 살아 있구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구나. 너에게는 아직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구나.
그 무렵 베란다에 바질 트리를 키웠다. 장마가 유난히 긴 해였다. 오랫동안 해가 들지 않아 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남은 잎들이 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바질 트리 잎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사라졌다. 가지는 구부정하게 휘어져 있었다. 나는 장마가 끝난 뒤에도 나무에 물을 주지 않았다. 언제 내다 버려야 하나. 식물은 어떻게 버려야 하나, 흙은 아파트 정원에 뿌리면 되나 하는 생각만 했다.
해가 유난히 세게 드는 날이었다. 앙상한 가지에서 빛이 반짝였다. 하얀빛이었다. 빨래 말릴 일 없이 베란다에 나간 건 오랜만이었다. 바질 트리에 하얀 꽃이 피었다. 살아 있었구나. 다 핀 꽃 옆에는 노랗게 봉오리가 올라왔다. 가만히 보다가 베란다 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게 했다. 바람이 불자 꽃잎이 흔들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흔드는 모양새가 제법 귀엽다. 작고 약한 꽃잎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살아 있었다.
꽃잎이 머리를 들고 올라오는 이유는 뭘까. 꽃이 온 힘을 다해 피었다. 꽃의 의지는 숭고한 것이리라. 살아 있음이 그 자체로 소명인 바질 트리는 기어코 꽃을 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꽃이 크게 휘청거렸다. 맨 꼭대기에 핀 꽃은 결국 가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연약하지만 나약한 건 아니다. 포기가 아니라 끝이었다.
자전거 한 대가 옆에 섰다. 그 할머니가 타고 있었다. 눈으로 인사를 나눴다. 행운을 빌어요. 할머니를 태운 자전거가 서서히 앞으로 굴러갔다. 점점 빨리 멀어졌다. 나뭇잎이 떨어졌다. 원숭이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유적지 밖 주차장에 다다랐다. 그거면 됐다. 잘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