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태도
영화 꽤나 본사람들에게는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사람중에 친숙한 이름이 있다. 황석희. 번역가이다. 그의 에세이가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만에 다 읽었다. 언젠가부터 에세이는 잘 안 읽는다. 예전에는 자주 읽긴 했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듯한 재미도 있었고, 신선한 표현을 찾아보는게 흥미롭기도했다. 그러다 문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글을 읽는 일이 점차 재미 없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의 내밀한 생각을 들여다 보는 일이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즈음부터는, 아는 사람들의 에세이만 가끔 읽었다. 정확히는 나와는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에세이를 주로 읽었다. 예전에 일을 도와드렸던 에디터분이 쓴 에세이라던지, 군대에서 후임으로 있던 친구가 헐리우드 배우가 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 그렇다. 같은 상황이어도 그 사람의 표정이나 성향을 알고 있으니 읽어 나갈때마다 ‘그럴만하네’, ‘이건 의외네’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나는 황석희 번역가를 만나본적도 없지만, 아마 내 입장에서의 일방적 내적 친밀감이 높은 사람중 하나일 것 같아서 이 사람 책은 참 궁금했다. 특히 번역가라는 직업 특성상, 본인의 생각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번역 일을 하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관과 넷플릭스를 포함해 최근 본 해외 영화를 5개 정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면 그 중에 적어도 하나 이상은 분명 황석희가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세이를 모두 읽은 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이런 사람을 프로라고 하는거구나 생각했다. 나는 프로라는 단어가 주는 책임감과 의미에 대해서 가끔 깊게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나의 커리어적 목표는 프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내부 호칭이 프로였기 때문이다. 전회사 뿐만 아니라 프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회사가 몇몇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이 호칭을 회사의 문화로 사용하는 이유는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로 일을 대하라는 마음과,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러기에 프로라는 호칭은 쉽게 주어질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프로처럼 일하지도 못했으면서 맨날 프로님이라고 불리는게 괜히 혼자 부담스럽긴했다.
그냥 호칭하나 가지고 그런것까지 생각하냐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맞다. 보통 기업규모가 어느정도 있는 회사에서 적당한 연차가되면 ‘책임’을 다는데 영어 직함으로는 professional이다. 프로 운동 선수들 중에는 양아치들도 많다. 진짜 프로는 경험보다는 태도로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황석희 번역가의 글을 읽어보니 프로의 태도를 가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번역가는 파파고가 아니다. 직역만 하는게 번역이라면 번역가는 지금 같은 시대에 필요한 직업이 아니다. 영상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인 만큼 각 장면의 흐름과 뉘앙스 심지어 문화까지 파악하여 최대한 그럴듯한 전달을 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번역가다. 황석희는 이 역할에 대해서 높은 책임감과, 노력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보여졌다. 그의 번역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I don’t know why it is that I find it so very difficult, just being here on this earth” 그대로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그저 이땅에 존재하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그는 이 자막이 감흥도 없고 마음에 안들었고 고민했다. 이 문장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왜 저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지, 다른 표현으로 치환하는게 나을지 아닌지. 결국 이렇게 번역했다고 한다. “숨만 쉬어도 살아지는 삶인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다른 예시도 있다. 욕을 번역하는 일. Pumpkin fucker를 씨박 사이에 ‘호’를 글씨크기를 작게 넣어서 표현했다고 해서 한참 웃었다. 그의 아이덴티티를 넣었다는게 아니라 그냥 적당히 번역하고 끝낼수도 있는 일을, 대사와 관객 사이의 최상의 전달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매번 고민한다는 자체가 멋진 프로의 모습으로 보여졌다는 의미이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관심 없더라도 앞으로 한국영화만 볼 것이 아니라면 이 에세이 꼭 추천하고 싶다. 당신의 영화 감상이 조금 더 풍부해질지도 모른다.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는 책갈피도 너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