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a. 지난한 용어 선택의 시간
예전에 한 통번역 교수님께서 통대생... 내지는 통번역사들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한 가지 있다고 하셨다.
단어를 사전에 찾으면 일단 첫 번째로 제시된 단어는 패스한다는 것.
이 말을 듣자마자 너무 공감이 됐다. 나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일단 첫 번째로 제시된 건 대충 보고 그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단어 중 뭘로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 교수님 말씀으로는 사전에 가장 먼저 그 단어가 제시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인데, 통번역 하는 사람들은 뭔가 무의식 중에 저렇게 흔한 용어를 쓸 순 없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아마 일상 대화 정도만 할 때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통번역을 하다 보면 한 단어가 너무 의외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보고 평소 알던 뜻으로 해석이 안 되는 적도 많다 보니 자연스레 두 번째, 세 번째 제시된 것을 먼저 보게 된 것 같다.
4월 한 달 동안 표준 문서 하나를 중한 번역을 했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라 25일 동안 주말도 없이 매일 같이 번역을 했다. 화학 공학 관련 문서라 애초에 사전 찾을 일이 많긴 했는데, 그것 보다도 저런 습관 때문에 애를 먹은 용어가 하나 있다.
常压 vs 正压 vs 静压
중국어로는 셋 다 발음이 달라 헷갈릴 일이 없다. 뜻글자다 보니 발음이 아니어도 보는 즉시 뜻도 파악된다. 그런데 한국어는 아니다.
첫 번째 관문, 常压
처음 나온 건 ‘常压(常壓)’이었다. 한국어로 그대로 상압이라고 할 것 같긴 한데 혹시나 하고 사전을 찾았다. 상압과 정압(定壓) 두 가지가 나온다. 이 단어가 대입된 파생어에도 두 가지 모두 사용되더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왠지 발음 그대로 하는 것보다 두 번째 제시된 정압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왤까...). 그래서 常压라는 단어를 정압으로 하고 번역을 진행했다.
두 번째 관문, 正压
그런데 조금 뒤에 ‘正压(正壓)’이라는 게 나오는 게 아닌가. ‘하... 이건 정압이 맞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또 찾아보자!’ 하고 사전을 찾았다. 역시 정압이라고 나온다. 부압(負壓)의 반대인 정압인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常压를 정압으로 했기에 이것도 정압이라 하면 나올 때마다 괄호에 한자를 제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常压를 결국 상압으로 모두 바꾸고, 正压를 정압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관문, 静压
이젠 됐겠지... 하는데 静压(靜壓)이 나왔다. ‘하... 설마 이것도 정압...?’하는 생각으로 사전을 찾는다. 역시 정압이라 나온다. 이 정압은 동압(動壓)과 짝을 이룬다. 그런데 벌써 정압이라 번역한 단어가 있지 않은가. 서둘러 正压를 다시 조사해 본다. 공업 용어로 음압의 반대로 양압을 많이 쓰고 있었다. 급히 정압으로 번역했던 正压를 모두 양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静压을 정압으로 최종 결정했다.
얼마나 기운이 빠지던지. 비단 이 단어들뿐이 아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정말 한 번 번역한 걸 몇 번이고 바꾸고 다듬게 된다. 그러니 한 사람이 번역을 해도 용어 통일은 언제나 자기 감시를 해야 한다. 공부할 때 메타인지를 가동하듯 번역할 때도 계속 ‘지금 용어 통일 잘 되고 있나, 아까도 이 단어를 내가 이렇게 번역했나’하고 생각해야 한다.
어쨌든 그 지난하고 끝이 없어 보였던 400페이지 번역이 끝이 났다. 내 번역 실력의 어딘가 조금은 성장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