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차 통역의 기본
전문 통역사가 아닌 이상 동시통역은 할 일이 꽤 드물 것이다.
아니, 동시통역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순차통역은 다르다.
국제회의 통역사가 아니더라도, 외국어를 할 줄 알면
본의 아니게 통역을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예기치 않게 통역을 하게 되었을 때, 아래만 기억해도 자연스러운 통역에 큰 도움이 된다.
1, 수첩과 펜을 챙기자.
화자는 통역사를 배려해서 한 마디 하고 쉬고, 한 마디 하고 쉬고, 그러지 않는다.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싶은 말을 우수수 쏟아내곤 한다.
통역사가 컴퓨터처럼 모든 말을 머릿속으로 기억하면 좋으련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행여나 돌아다니며 해야 하는 수행 통역이라도 일단 수첩과 펜을 챙겨야 한다.
수행 통역을 고려한다면 되도록 표지가 두꺼운 하드보드지로 되어 있다면 더 좋겠다.
이걸 팁이라고 적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빈손으로 떨렁 떨렁 통역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고는 뒤늦게 옆 사람에게 빈 종이를 찾기도.
2, 통역은 간접 인용이 아닌 직접 인용으로.
얼마 전, 한 콘퍼런스콜 통역에서의 일이다.
내가 중한 통역을, 전문 통역사가 아닌 어떤 중국 분이 한중 통역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그분이 통역할 때마다
“지금 ㅇㅇ께서 XX는 끝났냐고 물으십니다.”
“ㅇㅇ께서 XX가 맞냐고 하시는데요?”
이런 식으로 통역했다.
통역이 길어질 뿐만 아니라, 사족이 많아져서 핵심도 흐려진다.
통역은 무조건 내가 화자인 것처럼, 화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된다.
즉, 위의 통역을 바르게 하면
“XX는 끝났나요? “
“XX가 맞나요?”
이렇게 된다.
이것만 지켜도 전문성이 훨씬 향상된다.
3, 화자가 하지 않은 말은 덧붙이지 말자.
위와 같은 날 있던 일이다.
한중 통역을 해주기로 한 분의 통역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금 전에 설명해주신 것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ㅇㅇ께서 XX는 끝났냐고 물으십니다.”
“이 부분은 고객사에서도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ㅇㅇ께서 XX가 맞냐고 하시는데요?”
이 통역은 언뜻 보기에는 위에서 짚은 직접 인용 말고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 “조금 전에 설명해주신 것은 잘 들었습니다. “나, “이 부분은 고객사에서도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 이 말은 화자가 하지 않은 말이었다.
통역하는 분은 뭔가 화자가 한 말만 전달하면 분위기가 딱딱해질 것 같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인이 어색해서 그랬는지 자꾸 화자가 하지 않은 말을 덧붙였다.
어찌 보면 저 정도 말은 화자가 하지 않았어도 통역사가 따로 덧붙인다고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런 말들이 계속되면 시간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화자는 아직 상대방의 설명이 이해가 안 된 상태일 수도 있는데 통역사가 멋대로 이해한 것 같다고 말하는 건 불필요하다.
이밖에,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화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면 오역을 하느니 화자에게 다시 물어보고 정확한 통역을 하는 게 낫다.
이건 분위기나 상황 상 불가능할 때도 있어서 기본 규칙으로 적진 않았지만, 실제로 통역사라도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는 대충 지어내서 안 한 말을 전하느니, 양해를 구하고 다시 물어보는 게 좋다.
물론, 그런 일이 되도록 발생하지 않게 늘 집중하고, 내 통역 차례가 아니더라도 흐름을 알기 위해 상대방의 통역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사전 준비가 가능한 통역이라면 당연히 준비를 많이 해야 하고. :)
갑작스러운 통역만큼 곤란한 것도 없다. 통역이 겁나는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 즉, 화자가 무슨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측의 의사소통을 돕는다는 보람이 느껴지는 일 또한 통역이다. 최소한 위의 몇 가지 규칙을 생각하며 차분하게(차분할 수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서^^;;) 통역을 이어가면, 적어도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