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규 쿠바 참사의 탈북과 맞물려
영화 <탈주>는 ‘자유란 무엇인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던 내게 질문을 내밀었다.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 말하는 규남.
“내 앞 길 내가 정했습니다”
실패해도 또다시 일어서고 그 실패마저
도전의 과정으로 여긴다.
어떻게 해서든 손 뻗어 닿고 싶은 대한민국.
자유가 살아있는 땅.
현풍리 한복판에 ‘자유’라는 단어는 허울뿐이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고 흔히들 말한다.
새터민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꿈을 꿀 수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인간이 과연 인간답게 사는가 살지 않는가의 차이라 생각한다. 꿈꿀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이 맞는가?
죽음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자유를 향한 갈망은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상상이 아니라
지금도 사선을 헤매며, 수풀 속을, 강바닥 아래를,
어둠을 견디며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의 치열한 오늘의 전투다.
꿈을 향한 피투성이 달리기다.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은 내 뒤에 나라가 있다는 긍지로 일을 한다고 리일규참사는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고. 국적을 물을 때 ‘South Korea'라고 말하면 자신의 몸값도 올라가는데 그러지 못할 때의 씁쓸함과 비참함이 삶의 한계치에 이르러 그가 태어난 곳을 저버리고 망명했을 것이다. 자신의 몸값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자식은 나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한 한 가정의 가장의 선택이다.
자유. 자유가 무엇이길래-
나는 내 조국을 버릴 수 있을까? 당신은?
오늘날 우린 모두 ‘헬조선’에 살고 있다. 그 표현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하겠다. 과도한 경쟁과 압박, 자본주의를 넘어선 물질욕망주의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마치 지옥과 같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에 미래가 없어 이민을 고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벗어나는 것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이지 인간 존엄성 부재로부터의 탈출은 아니다. 나는 자유를 소망한 적이 있는가? 이것은 내가 탄생했을 때부터 내게 값없이 주어진 가치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목숨을 건다.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계를 우리는 하루라도 견딜 수 있을까. 자유에 대한 갈망과 한 인간의 끝없는 도전을 탈북이라는 소재에 잘 녹인 듯하다.
자유를 갈망하던 규남의 얼굴이, 숨찬 뜀박질이,
뻗은 손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보이는 게 아니라
인류의 일대기, 삶의 근본과 소망이
무엇인가까지 보인다.
피아노형이 선물한 책 첫 페이지에 쓰여있던
‘죽음이 아닌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는 문장이
뇌리에 박힌다.
피아노형은 자유가 두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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