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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Dec 16. 2023

사장님은 멀쩡해, 미친 건 나야!

할인율이 클수록 사고 싶어지는 이유, 준거가격 시장침투가격 베블런효과

길을 걷다 또 눈이 돌아간다. 10000원짜리 니트 가디건이라니? 어머. 이건 사야 해!

옷 끝을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으니 가게 점원이 한마디 건넨다. "어휴. 뭘 그렇게 고민해요. 만 원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그렇게 또 내 지갑에서 만 원이 빠져나가고 정신 차리면 검은 봉지가 손에 들려 있다. 


맞다. 옷이 싸면 우리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옷을 샀다. 그러면서도 이를 '합리적인 소비'라고 착각했다. 고민도 하지 않고 집어든 소비, 정말 합리적인가? 


그런데 개그맨 박영진이 라디오스타에 나와 한 말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60% 세일. 80% 세일. 이건 가격의 할인율이 아니다. 내가 살 확률이다.


그러니 어떤 옷에 40% 할인 스티커가 붙어 있어 '이건 거저다!'하고 구매했다면 당신은 옷을 구매할 확률 40%에 포함된 것이다. 할인 스티커에는 우리가 살 확률이 그곳에 적혀있는 것일 뿐이다. 


‘합리적 소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 밥 먹듯 쇼핑하던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합리적인 소비는커녕 쇼핑에 중독된 좀비 같기도 했다. 옷 안에 숨어 있는 가격표를 뒤집으며 그저 황홀하도록 싼 가격과 빨간색 글자로 ‘SALE’이 라 적힌 스티커가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쿠폰 사용, 포인트 적립, 리뷰 작성 등의 수단을 빠짐없이 동원해 구매가를 집요하게 떨어뜨리는 과정은 분명 중독에 가까웠다. 가격에 숨겨진 비밀과 전략을 알지 못한 채 ‘가격이 싸다’는 사실만 중요했을 뿐 어떻게 그 가격이 나올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도, 그 물건이 정말 내게 필요한지 고민해 본 적도 없는 나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세일 단골 멘트의 진실. 미친 건 나야! 


그런데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정말 미친 것도 아니라면, 왜 할인율이 클수록 사고 싶어지는 걸까?

또 기업들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왜 할인율을 높여 우리에게 물건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걸까? 



할인율이 클수록 사고 싶어지는 이유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돈을 아껴야 하는데, 마침 세일을 한다고 해서 옷을 사러 갔다. 모자가 달린 하얀색 패딩을 발견했다. 


A가게에서 하얀색 패딩을 발견했다. 모자도 달려있다. 5만 원짜리 옷을 4만 원에 판매 중이다. 20% 할인을 받는 셈.
B가게를 둘러보다 비슷한 패딩을 하나 더 발견했다. 하얀색인데 모자는 없다. 하지만 할인율이 눈에 띈다. 원래 20만 원에 판매되던 게 75% 할인 판매 중이라, 5만 원에 살 수 있다. 


A는 20% 할인해서 4만 원. B는 75% 할인해서 5만 원. 


돈을 아끼겠다며 세일 기간에 맞춰 매장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사고자 했던 하얀색 패딩에 모자가 달린 A 가게의 옷을 살 바에야, 또 모자는 없더라도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B가게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너울거릴 것이다. 


여기서 마케팅 용어 '준거가격'이 등장한다. 준거가격은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소비자 마음에 형성되는 기준 가격으로, 보통 할인 가격과 함께 쓰인 원래 가격(정가)이 준거가격이 된다. 사람들은 가격 할인을 평가하고 구매를 결정함에 있어 준거가격에 따라 상품의 매력도를 평가한다. 기업은 이러한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여, 할인 가격만 적어두지 않고 정가, 즉 원래 가격을 반드시 함께 적어둔다. 몇몇 제품을 싼 값에 판매하여 브랜드의 인지도를 올려두면 추후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된다. 또 처음에는 가격을 저렴하게 측정하고 어느 정도 시장점유율을 얻으면 가격을 올리는 '시장침투 가격' 정책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의 판매 마케팅 전략과 무관하게, 소비자 입장에서 비싼 물건을 더 싸게 사는 것은 이득이 아닐까? 원래 가격이 5만 원인 물건 vs. 원래 가격이 20만 원인 물건을 비교했을 때 비슷한 가격이라면 후자의 물건을 사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정말 5만 원과 20만 원짜리 옷을 엄밀히 비교하였는가? 어떤 재질로, 어떤 유통 과정을 거쳐,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진 옷인지 비교하였는가? 아니면 '가격'이라는 간편하고 쉬운 기준만으로 비교하고 판단하였는가? 


가격만으로 옷의 질을 비교하기에는 가격 전략 과정에 큰 함정이 있다. 사람들은 때로 높은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더 비싼 물건을 구매한다. 이를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라고 부른다. 기업들은 이런 과시적 욕구를 인지하고 있기에, 가격을 측정하는 전략에 활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더 비싸다고 더 품질이 좋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합리적'이지 못하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보자. 애초에 '모자가 달린 하얀 패딩'은 왜 반드시 사야 했는가? 겨울을 날 만한 패딩이 없었나? 있었다면, 또 왜 사려고 했는가? 최신 유행하는 뜨개 모자, 한 패셔니스타의 키링, 줄을 서도 못 산다는 패딩까지... 우리는 정말로 이런 것들이 삶에 필요한가? 30% 할인, 50% 할인된 가격 앞에서 어떠한 의심도 생각도 하지 않고 해 왔던 소비를 과연 '합리적인 소비'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날 내게 쇼핑은 무의식적 집착에 가까웠다. 망치를 든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했던가. 신발을 사려고 며칠을 심사숙고하던 날들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에는 누굴 만나도, 무얼 해도 내 눈에는 신발만 들어왔다. 며칠 동안 내가 신발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내 일상 곳곳에는 분명 찬란한 웃음과 생기가 가득했을 테지만, 내 시선은 온종일 바닥을 기었다. 


그때의 경험은 내게 유명한 심리학 실험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피험자는 영상에서 하얀 옷을 입은 선수들이 농구공을 몇 번 주고받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영상에 고릴라가 지나가고 배경 커튼 색깔이 바뀌어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의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셔브리가 진행한 이른바 ‘보이지 않은 고릴라’ 실험으로, 피험자들이 겪은 현상에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 우리의 일상을 더 밝게 빛내준다는 명목 하에 이어지는 소비와 할인 퍼레이드를 보며 우리는 '무주의 맹시'를 겪고 있진 않은가? 올 겨울은 쇼핑백에 담긴 공허한 물건으로 마음을 채우는 대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것들로 둘러싸이는 기쁨을 만끽해 보면 어떨까? 






브런치에서 시작되어 책으로 나온 저의 5년 간의 옷 사지 않기 여정이 담긴 책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77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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