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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Mar 08. 2024

방생할 물고기 팝니다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은 어쩐지 싫었다 / 불교 방생 행사의 딜레마

이 글의 원문은 채널예스 CHANNEL YES 칼럼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시셰퍼드 코리아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은 어쩐지 싫었다. 필드를 뛰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공기 찾은 인간 같다’고 감탄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이코패스 같은 표현이 또 어디 있을까. 물고기는 물을 만날 게 아니라, 원래 물에 있어야 했다. 자신이 살던 곳에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으로 박수받는 것만큼 모진 생도 없을 것이다.


3월 3일, 수십 명이 바다를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바닷가에 멈춰 섰다. 슬며시 다가가 무슨 절을 하는 것이냐 물으니, 물고기를 놓아주는 행사라며 설명이 이어졌다. “방생하는 거예요. 생명 살리고 복 돌아오라고.” “물고기는 어디서 나서 방생하는 거예요?” “죽을 뻔한 생명을 구해오는 거예요.” 어디 물고기들이 도로 한 가운데라도 걸어 다닌단 말인가. 죽을 뻔한 물고기 생명을 어디서 구해온다는 거지.


의아함은 마른 양손을 모아 싹싹 비벼가며 간절히도 염원하는 사람들을 지나 도로를 건넜을 때 해소됐다. 한 횟집의 팻말이 바닷바람에 대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방생용 고기 팝니다. 


너털웃음을 선보이는 사장님은 가게를 기웃거리는 손님에게 유쾌하게 이야기를 건네며 수조의 물고기를 건져냈다 담갔다를 반복했다. 붙잡힌 물고기는 아가미 깊숙이 칼을 찔리는 횟감이 될까, 몸이 겨우 잠길 정도의 물과 함께 비닐봉지에 담겨 바닷가로 향하는 방생용 고기가 될까. 그 운명(과 각각의 가격)이 궁금했다.


누군가는 바닷속 모래까지 긁어내 물고기를 잡고, 누군가는 그중 ‘상품성’ 떨어지는 물고기를 방생용으로 판매한다. 또 누군가는 그걸 사서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돈까지 내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물고기를 횟집 수족관에 가둬두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게 만든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방생용 물고기’를 사 가는 것은, 도로를 걸어가는 물고기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앞뒤가 맞지 않고 괴이하다.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 선행을 소비한다. 수요와 공급이 직조해 낸 생과 죽음의 경계, 그 어스름하고도 선명한 경계선을 자유롭게 오가는 유일한 수단은 돈이다.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중요해진 기부와 선행. 가둬두고 판매하는 방생용 물고기. ‘그래도 이 정도면 됐지’와 ‘분명 무언가 잘못됐는데’ 사이의 어딘가, 찝찝한 뿌듯함.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는 시대. 가치, 공덕, 선행마저 돈으로 거래되는 시대. 이 모든 ‘좋은 소비의 소비’ 아래 우리 삶은 어쩐지 조금도 더 나아지지가 않는다. 죽음을 앞둔 것들을 도무지 살릴 수가 없다. 깨끗하게 닦인 선한 길, 그 완벽한 자기 위로의 서늘함을 지워낼 수가 없다.




이 글의 원문은 채널예스 CHANNEL YES 칼럼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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