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벌써'가 있다 Summertime reflection
비행기에서 일기를 쓰려다 말고 '벌써 9월이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영어 수업 교재가 It’s Never Too Late: Summertime reflection이었는데, 내용은 '보통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을 겨울에만 한정하여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여름도 회고하기 꽤나 좋은 시간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수업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지난 일기들을 좀 보려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해 혼자 큰 발견이라도 한 연구자마냥 종이를 한 장씩 빠르게 넘기며 펄럭였다.
다음은 비행기에서 웃음을 참으며 찍은 내 일기장 사진들.
사진은 첫 문장에 쓰인 것만 찍은 거고, 중간중간 혹은 마지막에 '벌써'를 이야기하는 게 정말 많았다. 일기를 쓰는 매 순간 '벌써' 시간이 지났네 라고 체감할 만큼 2024년은 하루 하루, 한 주, 한 달, 한 계절, 반년이 빠르게 지나갔나 보다.
그럴 만했다. 매달 굵직한 사건이 있었고, 익숙해질법한 회사 일은 업무 범위가 늘어나며 늘 새로웠으며, 그 와중에 여행, 운동, 공부, 그리고 방울이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하루를 마무리하며, 주를 마무리하며, 달을 마무리하며 '벌써'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 장씩 넘겨가며 '벌써'의 경탄을 살펴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 시간들은 나의 것이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그 세계에 몰입하고 집중한다. 그러다 부모님이 "들어와서 밥 먹어라!"하면 그제서야 깨어나 현실 세계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순식간에 블랙홀에라도 빨려드는 듯한 그들의 시간은, 매일 같은 길을 출퇴근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직장인의 시간과 분명히 다르다. 시간의 상대성이론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 아니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나 보다.
하지만 나의 '벌써'는 어린아이들의 '벌써'와 어딘가 달랐다. 바쁘게 움직이는 탓에 '벌써'를 내뱉지만, 나는 내 것에 몰두한 것이 아니라 썩 내 것이 아닌 것들을 해 내면서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도둑맞은 집중력이 아니라, 도둑맞은 시간이었다. 내게 '벌써'는 속절없이 흘러지나간 시간 뒤에 서서 덩그러니 남아 외치는 언어에 가까웠다.
그러나 올해의 벌써무새에게도 반전은 있었다. 여름을 지나면서 쓴 일기에는 신기하게도 '벌써'가 쏙 자취를 감췄다. 7월에는 불렛저널 + 목표별 소요 시간을 체크하며 일기를 꼼꼼하게 쓰기 시작했다. 숙원 사업이었던 블로그를 분리해내고, 돈 공부도 본격 시작했던 달이었다. 매일 하루를 열고 닫는 계획&회고 일기를 쓰며 고단하면서도 감사했던 오늘을 보내주고, 다가올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시간의 주도권을 그 누구, 그 어디에도 두지 않고 나에게로 가져왔다. 사실 처음부터 시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었을 '일일 계획&회고'가 내게는 새로운 일이었다. 시간이 느려졌다. 어린아이의 시간처럼! 아침에 일어나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다 '어? 벌써 아침 10시야?'하고 부랴부랴 출근을 찍기도 했다. 새로운 동네를 구석구석 탐방하다 '어? 벌써 2만 보를 걸었네?'하고 (쩔뚝이며) 귀가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2-3줄짜리 일기를 쓰며 외치던 '벌써'와는 다른 '벌써'였다. 여전히 바쁜 일정에 시간을 쪼개 쓰는 나날이었지만, 하루하루를 분명하게 내 손으로 꾹꾹 눌러 빚어낸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9월 13일, 오늘 내가 비행기에서 쓰려던 첫 문장은 '벌써 13일이라니!'였다. 또다시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들어 보내주지 못하고, 휩쓸려 정신 없이 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연말까지 아마 이런저런 '벌써'들을 외치게 되겠지만, 약 반 년 동안 남겨온 많은 '벌써'들을 한 번은 돌아보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다.
Summertime reflection, 아주 좋다!
늦여름, 회고하기 참 좋은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