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성폭력 범죄 기사와 미디어,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
* 주의 : 영화 후기로 시작했다 미디어에 대한 분노로 끝나는 글입니다..
원래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였을까. 반전이 있다는 말에 내 맘대로 영화 '괴물'을 생각하며 설레발을 친 탓이었을까. 영화 자체는 인생 영화, 역대급 영화는 아니었다.
명료하게 쉽고 좋은 영화였다. 연출과 스토리가 주는 즐거움을 마구 느끼다가 나도 모르게 "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아하. 이 말을 하고 싶구나" 끄덕끄덕하는 식으로 부담 없이 소화되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감독이 던진 문제의식의 여파가 길고 깊게 이어진다는 점에서 분명 훌륭한 영화다. 연기를 끝내주게 잘하는 배우들 덕분에 눈물 콧물 흘리며 몰입했다.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 인싸? 관종? 허언증? 거짓말쟁이? “이주인, 뭐가 진짜 너야?”
* 아래서부터는 스포가 포함돼 있지만 스토리보다 메시지가 중요한 영화이므로 일독을 권합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키스신으로 시작한다. 연애가 가장 어렵지만 애인을 곧잘 사귀고, 친구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고, 엄마와 동생을 다정히 챙기는, 활발한 인싸 주인공 '주인'. 어느 날 그의 동네에 아동 성폭행 가해자가 출소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이 돈다. 이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이 이는데, 전교에 딱 한 명이 그 서명에 반대한다. 바로 주인공 주인이다. 친구들은 '성폭력에 동의하는 것이냐', '그냥 사인 한번만 해줘라'며 주인공을 회유하지만 주인은 완고하다. 주인은 서명 운동에 적힌 몇 개 문장을 빼거나 수정하면 동의하겠다고 한다. "성폭행은 한 인간의 삶을 망가뜨린다",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파괴하는" 등의 문장이었다. 주인은 당연히 사인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이, 자신과 함께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이들의 삶이 통째로 부정 당하는데 어떻게 그에 동의할 수 있을까.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였다.
영화는 주인이 결국 주인다운 발걸음으로, 제 삶이 말 그대로 '주인'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피해자답게' 살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그 '피해자답지' 않음은 불리하게 여겨진다. "니가 무슨 피해자야"라는 쪽지를 받기도 한다. 꼭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불리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답지 않음은 법정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함께 연대하는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미도다. 미도는 멋지고 쿨한 성격에, 어린 시절 태권도 유망주로 큰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그 수상은 불리하게 다뤄진다. 대화가 열린 그날이 성폭력 가해가 이루어졌던 날이기 때문이다. 가해자 측 변호사는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는지" 몰아간다. 미도가 아버지의 돈을 훔쳤던 사실, 용돈을 달라고 요구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사건의 논지를 흩트린다. 미도는 무너진다.
그러나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예컨대 누군가 100억 사기를 당했는데, 저녁밥은 잘 먹었다. 그런데 재판에서, 100억을 사기당하셨는데 어떻게 웃으면서 식사하신 거죠? 라고 묻지 않는다. 그러게 왜 웃어주셨죠? 하지 않는다. 설사 저녁을 먹고 웃었다고 해서 100억 사기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그날 성폭력을 당하셨죠. 근데 왜 웃으면서 화장도 하고 회식에 가신 거예요?
물론 두 사건은 큰 차이가 있다. 재산상의 피해와 달리, 성폭력은 개인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침해가 재판에서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했는지가 인정 요건에 포함된다. 내가 얼마나 원치 않았는지, 얼마나 굴욕감과 수치감을 느꼈는지를 주장해야 하는 것에 판결의 핵심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건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고, 판단의 핵심은 여전히 "그 관계가 동의에 기반했는가, 강제력이 있었는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가"라는 지점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진술하면서도, '영혼이 완전히 망가진' 서사에 갇히지 않도록 바로 서는 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우리의 이중잣대는 어디에도 낄 자리가 없다. 피해자는 피해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왜 피해자에게 무얼 바라기까지 하나.
영화의 막바지에 달하며, 주인에게 전달됐던 익명의 쪽지 발신인이 '사실은 나도 너 같은 피해자다'라고 고백한다. 쪽지를 읽는 목소리와 얼굴은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어린아이였다가, 성인이었다가 하며 빠르게 바뀌며 연출된다. 주인뿐 아니라, 영화 화면을 통해 본 누군가도 주인과 같은 피해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누구였을까? 이 친구였을까? 저 친구였을까? 답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 주변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누구나 피해자일 수 있으며, '피해자다움' 따위는 없다. 그것에 대한 족쇄 같은 불필요한 편견이나 단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관객에게 명료하게 전달된다.
성폭력 가해는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이 '성'폭력이어서가 아니라, 여느 사기, 사고, 협박, 폭행 등과 같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무력 혹은 권력으로 짓밟고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언론이나 미디어는 성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유난히 감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수백억 대 사기 사건 가해자가 "몹쓸 짓"을 했다고, 피해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표현하는 기사가 상상이 되는가? 상상할 필요도 없다. 가해에 대한 적절한 처벌, 피해에 대한 적절한 구제가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성폭력 피해를 두고는 "씻을 수 없다"거나 "영혼이 더럽혀졌다"고 표현한다. XX녀, XX남과 같은 별명이 붙으며 유행어로 변질되기도 한다. 언론노조는 이미 2023년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통해 '몹쓸 짓'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몹쓸 짓'이라고 지적하며 미디어 생태계에서의 언어 표현에 대한 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는 불필요하게 높은 해상도로 범죄 사실을 나열한다. 불필요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무섭게도 우리 자신은 그것들에 익숙해지고 있다.
* 주의. 편견을 강화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신정동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다는 뉴스를 보며 기함했다. 여성의 불안해하는 눈과 손을 확대해서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는데, 좌측 상단에는 'AI 생성 영상'이라고 떠 있었다. AI 영상? 왜 이런 영상을 만들고 반복해서 재생할까? 프롬프트는 어떻게 입력했을까? AI는 어떤 '학습'을 했기에 공포에 떨고 있는 여성을 이토록 잘 묘사했을까? 피해 상황에 대해 불필요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은 범죄의 예방 및 처벌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공익적인 도움이 될까?
이런 언론의 이미지는 공포에 떠는, 움츠러든, 무기력한 여성의 이미지를 재생산하여 '피해자다움'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러니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사랑과 연애가 가장 궁금한, 태권도 대회에서 우승을 한 피해자에 대해 눈을 뜨고 "너 피해 당한 것 맞아?"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어 보인다.
성폭력 2차 가해는 피해자에게 같은 진술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는 것에도 있겠지만, 피해자를 바라보는 이질적인 시선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악질적인 범죄의 가해 행위에 우리 스스로가 가담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억울한가? 그러니 그러지 않도록 주의하자. 주의하는 방법은 공부뿐이다. 그러니 배웁시다... 모르면 외웁시다... 우리는 문명인이니까요!
피해자의 피해가 분명하고, 가해자는 나쁜 사람이므로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주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가 매우 크다는 생각은 성차별적 생각입니다. 피해의 트라우마는 당연히 피해자의 일생에 남을 것이지만 그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은 성적 순결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관념에 따른 인식이기도 합니다.
피해가 생긴 것은 가해자의 잘못된 행위 때문입니다.
2023년 언론노조에서 발행한 젠더보도 가이드라인. 한 줄 한 줄 버릴 문장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