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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17. 2024

함께라도 괜찮아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엔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내내 묵었던 허름한 호텔은 맘먹고 꼽아보라고 하면 열 가지도 넘는 불편함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새벽마다 들려오던 바로 앞 산타 마조레 대성당의 엄숙한 종소리는 그 모든 걸 잊을 만큼 좋았다. 그 대성당의 종소리만으로도 나의 로마는 완벽했다.

하지만 로마에서의 그 마지막 밤을 복통으로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보냈다. 그 복통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는데, 새벽 종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조금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귀국하는 비행기는 밤늦은 시간이었으므로 마지막 일정은 바티칸이었다. 거대한 석상과 밀려드는 인파, 그리고 비현실적인 감동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도 복통은 남아있어 어정쩡한 자세로 걸어 다녔다. 나는 그처럼 윗배가 꼬이는 듯 아픈 것은 분명 위경련일 거라고 짐작했다. 위경련은 겪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말이다. 

밤의 비행기를 타고 로마에서 터키로 오는 동안에는 복통의 후유증이 남았는지 엄청난 멀미로 고생했다. 터키에서 환승을 기다리는 동안에야 겨우 몸과 맘이 추슬러졌다. 그 덕에 터키에서 인천공항까지 오는 비행은 다행히도 순조로웠다.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도 비상약을 제대로 챙겨가지 않는 허술한 여행자였다. 로마의 그 밤 이전까지는 여행지에서 탈이 나서 고생해본 경험도 없었고, 내 체력을 불신하지도 않았던 날들의 이야기다.

그날 이후 나는 여행 가방 안에 비상약을 꼼꼼히 챙긴다. 소화제, 해열진통제, 멀미약, 지사제뿐 아니라 평소엔 잘 챙겨 먹지도 않는 영양제며 유산균까지 넣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비행기 안에서, 혹은 시차 적응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멜라토닌까지 목록에 들어있다.      


여전히 여행을 사랑하고, 늘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하는 사람이지만 젊은 날과 달리 겁이 생긴 여행자가 되어간다. 여행자보험, 그걸 뭐 꼭 가입해야 하나. 이랬던 사람이 이제는 여행자보험의 항목을 꼼꼼히 본다. 멀쩡하다가도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 감기 기운이며, 장염 증세가 생기는 일도 잦아졌다. 여행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하게 여행의 걱정과 긴장도 함께 찾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니 점점 비상약의 목록은 늘어만 간다.

피곤하고 무리하면 눈이 먼저 탈이 나는 사람이니 병원에서 안약을 처방해온다. 로마에서의 복통이 알고 보니 위경련이 아닌 담석증이었고, 결국 담낭절제수술을 한 이후로는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장이 예민해지는 체질이 되었다. 그러니 장염약도 처방받아 챙겨가야 한다.      


뉴욕으로 떠나는 여행을 앞두고 캐리어를 챙기고 있다. 대충 방바닥에 늘어놓았던 옷이며, 용품들은 하나씩 하나씩 캐리어 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정리되어 가는 중이다. 막상 갈아입을 옷은 두세 벌 챙기는 것이 고작인데, 이런저런 비상약은 일주일 치를 쟁여서 소중히 캐리어에 넣는다.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돈만 챙기면 되는 것이 여행이지, 라고 호기롭게 말해왔지만 언젠가부터 그 목록엔 ‘약’이 추가되어야 안심이다.

젊을 때는 여행지에서 돌아와 바로 오후 출근을 할 정도로 에너지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떠나는 것이 여행이었다. 이제 전에 비하면 무척 여유 있는 여행을 한다. 출근하지 않는 삶을 사니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나서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로 출근해야 하는 부담 따위는 없다. 

어렵게 시간을 쪼개어 떠나온 여행인데 하나라도 더 보자, 이렇게 조바심을 내던 젊은 마음도 사뭇 느슨해졌다. 여행의 시간이 쌓였기에 그 얼마를 머물더라도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나이와 세월이 알게 해준 교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나이와 세월 덕분에 챙겨 떠나는 비상약 뭉치도 늘고, 전에 없던 겁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가슴이 뛰는 일이다.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고 하지만, 다리와 함께 가슴이 떨리는 여행자가 왜 없겠는가. 더 나이를 먹어 팔다리가 떨려도 나는 늘 여행의 두근거림을 느끼는 여행자이고 싶다. 

지금처럼 열 시간 넘게 밤하늘을 날아갈 수는 없다면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여행이고, 하루에 이만 보씩 걸을 수 없는 세월이 온다면 창가에 앉아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처방 약보따리가 많아진다면 심호흡하며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역시 가슴 떨리는 여행의 순간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살아있는 한 여행은 계속될 것을 믿는다. 다만 아직은 좀더 멀리, 좀더 낯선 공기를 호흡하고 싶다. 아직은 약과 함께 떠나도 괜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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