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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Nov 07. 2024

40C

                                     

출발 48시간 전이다. 항공사 앱에 접속해서 온라인체크인을 했다. LCC가 아니며, 국제선인 경우 온라인체크인은 보통 48시간 전부터 가능하다. 몇 가지 금지 품목을 확인하는 난에 체크하고 나니 선명한 큐알코드가 핸드폰 화면에 떴다. 항공권이다. 

목적지는 시드니. 적도 아래로 날아가는 동안 내가 앉을 좌석번호가 선명했다. 40C.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에 사는 언니에게 가는 길에 몇 번의 경험이 있다. 하지만 낯선 외국에서 혼자 여행하는 일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은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다. 물론 가끔 반나절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행의 일부. 그러니 이번 시드니 여행처럼 처음과 끝, 그 전 여정을 혼자 해보는 것은 나에게도 일종의 도전인 셈이다.     


내 나라에서라면 나는 혼자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혼자 떠나고, 혼자 식당에서 먹는다. 혼자 캠핑도 하고, 차박도 한다. 물론 펜션에서 혼자 잠도 잘 잔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 차를 몰고 제주도로 들어가 백록담도 오른다. 이처럼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면 제법 익숙한 사람이래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여행을 앞두고는 걱정 반 기대 반, 설렘 반 후회 반이었다.      


처음 마일리지 항공권을 덥석 예약했을 땐 그저 빈자리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일리지를 잔뜩 들고도 도무지 내가 갈 수 있는 때에 표를 구할 수 없었는데 빈 좌석이 있다니. 심지어 잔여 좌석이 딱 1좌석뿐이었다.

이건 인생 혼여를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늘이 도왔네! 바로 좌석을 구매했다. 결제하고 나서 잔여 좌석이 0석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자 알 수 없는 통쾌함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여러 달이 지났다. 그사이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났고, 시드니는 아직 먼 곳의 일이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자 그제야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요즘 거부가 잦다는 호주 여행 허가를 받느라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를 모은 뒤 앱에서 신청하고, 허가 메일을 받고서야 안도했다. 호텔비는 상상외로 뛰어있었다. 비수기라며? 비수기 호텔 요금이 왜 이래? 코로나 이후 무엇이든 비싸진 건 전 세계적으로 같은 현상인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그런가 봐. 코로나 때문이야. 모든 것의 원인을 코로나로 돌렸지만 생각해보면 세월이 흐르는데 그대로 멈춰있는 것이 있을 리가.      


세세한 루트를 짜지 않고 큰 목적지 몇 개만 알아두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다. 시드니에서도 마찬가지의 루트를 짰다. 블루마운틴은 편도 세 시간 걸리는 기차가 있다니 그냥 타보지 뭐. 애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물원은 가야 주무시는 코알라라도 영접하겠지. 시드니대학 캠퍼스에 자카란다가 피었다니 거기도 가야겠군. 

혼자서 이렇게 루트랄 것도 없이, 목적지 몇 개로 이루어진 계획을 세우고 나니 그제야 멀리 있는 것만 같던 여행이 훌쩍, 내 앞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다른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잘 다녀올 수 있을까. 괜히 혼자 간다고 했나. 인종차별도 가끔 있다던데.

  잘 다녀올 수 있을 거야. 혼자서 너무 여유롭겠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인종차별을 하는지 마는지 알 게 뭐야.     


당장 혼자 떠나서 맞닥뜨릴 이런저런 상황을 생각하자 온갖 불안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보조밧데리는 하나 가지고 안 돼. 구글 없이는, 파파고 없이는 여행할 수 없으니 아예 세 개쯤 챙기자.

  호텔 방에서 뭘 먹는 일은 없지만, 이번엔 누룽지를 챙겨야지. 말 안 통해서 돈 들고도 굶을지 몰라.     


그뿐 아니었다. 갑자기 핸드폰 충전기가 먹통이 된다면? 카드 마그네틱이 손상돼서 결제가 안 된다면?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목적지도 못 찾고 미아가 된다면?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지. 온라인체크인을 하고 큐알코드 밑에 찍힌 나의 좌석번호 40C를 확인하는 순간, 출발이 실감 나면서 순식간에 나는 의욕 넘치는 여행자 모드를 장착했다.      


적도 아래로 내려가 보는 건 처음이야. 두근두근해.

캥거루와 악어 꼬치를 먹고 올 테다. 그곳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들이야.

사진으로만 보던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내 눈으로 보는 거야. 코스탈워크를 걸으려면 신발은 편한 것으로 신고가자. 내친김에 돗자리도 챙겨가서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는 건 어때.     


마음속의 내가, 여행자인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여전히 혼자만의 여행은 떨린다. 그 떨림 속엔 두려움과 긴장, 그리고 기대감과 의욕도 함께 있다. 오래전, 이십 대의 나를 사로잡았던 장 그르니에의 문장을 생각한다. 

“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그렇다. 시드니의 모든 것은 ‘비밀’로 남겨질 것이다. 파파고와 구글만이 나의 비밀을 지켜주면 된다. 그러니 적당히 실수하고, 적당히 부끄러워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40C에 앉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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