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간, 그리고 다르지 않은 마음
'가야 고분군'은 1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는 고대 왕국 가야 연맹국들이 조성한 7개의 고분군이다. 그중 6개의 고분군을 돌아본 날이 있었다. 지난 여름이었는데, 잠깐 고분군을 돌아보고 나서 차에 오르면 핸들이 뜨거워 바로 출발하기 힘들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여름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또다시 먼 창녕까지 오게 될 날 역시 멀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그날은 빨리 왔다. 이처럼 어떤 것은 오래 계획해도 오지 않고, 또 어떤 것은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훅 코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여름, 고분군의 아름다움을 좀 더 느긋하게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풀겠구나 싶어 남편의 출장길에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지난여름 한군데 남겨두었던 경남 창녕의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가볼 생각이었다.
사실 ‘능’이라면 내가 사는 곳에도 멀리 있지 않다. 정조와 사도세자의 능으로 유명한 융건릉이 근처에 있다. 하지만 역시 능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경주다. 경주의 대릉원 주변에서라면 고개를 돌리는 어느 곳에서나 능이 시선에 담긴다. ‘능 뷰’가 멋지다는 유명한 카페나 음식점도 많다. 그래서일까. 경주를 여러 번 갔고, 매번 대릉원 근처를 지나며 신라의 고분들을 봤지만, 그것은 그저 관광지일 뿐이었다. 누군가 돌아가 누운 곳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야의 ‘고분군’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무덤들이 모여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 규모나 크기가 생각한 것 이상이어서 처음엔 굉장히 놀랐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찾아가며 생각했다. 이미 몇 곳의 가야 고분군을 보았으니 더는 놀랍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또 한 번 놀란 것은 이곳의 크기는 앞서 보았던 여섯 곳의 고분군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송현동과 교동에는 각각 수십 개의 봉분이 있었는데, 도굴과 경작으로 인한 훼손으로 현재는 많이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그래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구릉에 부드러운 선을 가진 가야의 봉분들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10월 중순의 햇살이 좋은 평일이었다. 적당한 바람이 불고, 뜨겁지 않은 햇볕이 테두리가 진한 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선명한 그림자와 함께 구릉을 따라 이어지는 고분들 사이를 걸었다. 하나의 고분을 만나면 그 뒤로 또 다른 고분이 이어져 나타나고, 어느 순간 두 개의 고분 사이로 하나의 고분이 사라지기도 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건너편 산을 바라봤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의 구릉에도 고분들이 이어져 있었다. 관광지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덤들의 언덕’이었다.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했다. 경주의 대릉원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이 낯선 감정의 정체는 뭘까. 언덕을 내려오며 깨달았다.
‘기이하다. ’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7개의 고분군 중 하나인 창녕의 송현동 고분군 바로 앞에는 창녕박물관이 있다. 사실 이곳이 좀 더 특별했던 건 ‘송현이’ 때문이다.
고대 왕국 시기인 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옛사람들의 무덤에서 토기나 장식품 등이 발견되는 것은 흔하다. 하지만 그런 부장품들과 달리 순장이란 왕이나 귀족 등이 사망하고 나면 죽은 이와 함께 살아있는 처자나 노비 등을 함께 매장하던 장례 방식이다.
송현이가 발굴된 고분은 운 좋게도 도굴 흔적이 하나도 없어 4명의 순장자가 모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의 인골을 현대과학으로 복원한 것이 바로 16세가량의 여자아이, 그러니까 발굴지의 이름을 붙여준 ‘송현이’인 것이다.
창녕박물관에 들어서면 로비에서 제일 먼저 송현이가 관람객을 맞는다. 실제 열여섯 소녀의 몸집과 얼굴을 한 동영상 속 송현이는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도 건넨다. 송현동 고분군을 찾기 전에 검색을 통해 알아보고 궁금해했던 송현이를 마주하는 기분은 어쩐지 이상했다. 자료검색에서 본 발굴 당시의 유골 사진과 설명을 다시 떠올려봤다.
5~6세기 고대 왕국에 살았던 열여섯 살 소녀. 산 채로 죽은 이와 함께 묻혀 그 오랜 세월을 이 구릉에 누워있던 가야사람. 가늠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건너온 이곳에서 다시 얼굴을, 몸을, 목소리를 갖게 된 ‘송현이’.
연구로 알아낸 그들의 사인은 중독, 질식에 의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최하계층의 백성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렇다면 왕이나 권력자를 모시던 계급이었을까. 어떤 계급이나 직책과 관계없이 죽은 이와 함께 살아 있는 사람을 넷이나 함께 묻었다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대 왕국의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순장은 당연한 문화였을 것이다.
그 순장의 풍습은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 이후 통일 신라와 고구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장례에서도 드러나는 권력,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었을 내세에 대한 마음 같은 것들.
가을 햇살이 고스란히 내려앉는 고분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그 시절의 죽음, 아니 장례를 생각했다. 누군가와 죽음으로 이별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일에 있어서라면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고인을 산에 묻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간이 우리에게 멀지 않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매장방식이 거의 화장으로 통일되다시피 한 시대가 되었다. 그 언젠가 먼 미래엔 또다시 화장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새로운 장례가 당연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장처럼, 먼 미래의 후손 중 누구 하나는 나처럼 볕 좋은 가을볕 아래를 걷다가 옛시절의 ‘화장’ 이야기에 놀라워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은 이 옆에 산채로 누워 칠흑의 어둠과 사라져가는 공기를 느꼈을 송현이의 공포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왜 살아있는 이를 넷이나 함께 묻었을까. 모두 짐작일뿐 누군들 명확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테니 나 역시도 상상해볼 뿐이다.
‘어쩌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홀로 떠난 이가 행여나 두려울까 싶어 산 이를 함께 묻는 마음을 생각했다. 지금의 봉안당 투명유리문 너머에 소중히 남겨둔 사진이며, 담배며, 고인을 기억하는 작은 소품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억겁의 시간을 사이에 둔 고대 가야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는, 비록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방식이 다를지언정 이별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덤이 모여있는 구릉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아직 삭지 않은 풀이 부드럽게 발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