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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Nov 12. 2024

시간의 도시

                       

여행자는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매일 해야 하는 일과 나의 자리는 그대로 두고 혼자 열 시간을 날아왔다. 물론 여행을 떠나왔어도 노트북을 들고 왔으니 완벽한 자유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여기는 호주의 시드니다. 집이 멀다는 걸 떠올리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아득하고, 또 어느 순간엔 꽤 자유롭다.  

   

시드니는 역사적 배경 탓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부분 런던을 떠올리게 된다. 일단 지명에서 그렇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의 느낌이 그렇다. 단지 비교하자면 밝은 런던쯤 되려나. 그것은 아마도 내가 런던에 갔던 것이 1월이어서, 단 하루도 해가 반짝하지 않았던 을씨년스러웠던 그곳 날씨를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아침에 달링하버를 향해서 천천히 걸었다. 우리와는 반대의 계절인 나라. 그러니까 이곳은 여름으로 가는 날씨다. 개를 데리고, 혹은 헤드셋을 쓰고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 시드니의 아침은 참 일찍 시작한다. 


달링하버에 정박하여 있는 요트들을 바라봤다. 차갑지 않은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한동안 멍때리고 앉았다가 다시 구글을 켜고 길을 잡았다. 가보고 싶은 곳은 시드니의 아주 오래된 서점 DYMOCKS.     

가는 길의 도로엔 트램이 지나가는 선로가 놓여있었다. 간혹 종소리가 울리면서 트램이 지나갔다. 트램이야말로 우리나라엔 없는 교통수단이다. 지하철도 경전철도 아닌 트램이 주는 색다른 맛이 있다. 이런 색다름 외에도 시드니에서 느끼는 건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주변 환경이었다. 여행자의 눈에 여행지는 대부분 너그럽지만, 이곳 시드니는 유독 그랬다. 공원도 아닌 길거리에 벤치가 아주 많았다. 그것도 도시 중심가였는데. 사람들은 그 벤치에 앉아서 책도 읽고, 노트북으로 일도 하고, 트램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며 도착한 서점 DYMOCKS,     


사실 나 같은 생존영어자가 원서를 읽겠다는 맘으로 서점에 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서점의 분위기는 참 다르다. 특히 나는 서점에서 파는 카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다양한 카드가 온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을 리 없다. 받는 이도 아주 다양해서 남편, 아내, 딸, 아들뿐 아니라 손자, 손녀, 하다못해 주치의나 선생님에게 보내는 카드도 있었다. 나이도 3살, 5살부터 10살 12살, 15살.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20살, 30살. 이처럼 십 년 단위로 80살, 90살에게 보내는 카드도 있다. 어린아이들은 거의 매년의 숫자가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십년단위라는데 웃음이 났다.     


내가 서점에서 좋아하는 건 이처럼 카드 구경이지만, 그 외에 빼먹지 않는 재미라면 여행가이드북을 보는 일이다. 이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내용을 담은 가이드북을 찾을까 싶어서다. 두툼한 한국 여행가이드북이 두 종류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엔 심지어 내가 사는 수원이 나온 부분도 있어서 반가웠다. 이들은 이 가이드북을 보면서 가보지 않은 한국에 대한 어떤 상상을 하는 걸까.     


DYMOCKS 근처에는 유명한 건물인 퀸 빅토리아빌딩이 있다. 다들 QVB라 부르는 곳. 멋지고 고풍스러운 쇼핑몰이다. 우리의 스타필드 같은 배치이지만 오랜 세월을 보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 오래전엔 없었을 에스컬레이터가 요즘 사람들을 위해 중앙에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계단. 예전 서울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계단에서 느꼈던 시간의 느낌과 비슷하다. 문득, 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계단은 어찌 되었을까 뜬금없는 호기심을 가졌다.      

천천히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홀린 듯 따라가니 홀 가운데 놓인 그랜드피아노를 누군가 연주하고 있었다. 메고 온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청바지에 후드집업을 입은 그는 굉장히 진지했다. 가끔 박자를 놓치고, 곡을 까먹기도 했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나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그의 연주를 들었다. 짧지 않은 곡이 끝나고 나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쳤는데 둘러보니 몇 사람이 서서 나처럼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였는데, 그다음 곡까지 내가 다 듣고 먼저 일어서도록 할아버지는 난간에 기대어 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얼굴엔 미소를 가득 띄운 채.     

시드니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 하이드파크에 앉아 샌드위치와 플랫 화이트를 주문해 먹었다. 날씨가 좋은 시드니는 어디에서든 야외에 앉기 딱 좋다. 우연히 옆 테이블을 보니 노부부가 앉아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그저 지나치지 않고 아마추어의 연주를 듣는 여유. 공원의 야외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을 보낼 줄 아는 마음. 시드니라고 해서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는 없다. 언제 어디에서든,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나 역시 그 강물 위에 있다. 나는 잘 늙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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