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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Sep 07. 2023

엄마에게 쓰는 편지

대물림되는 상처

엄마, 입추가 지고 나니 아침, 저녁으로는 날씨가 조금 선선해졌어요. 그곳도 그런가요?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지 보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무슨 또 편지냐고, 엄마는 물으시겠죠? 그러게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끓어오르고 있었나 봐요. 말로는 차마 건네지 못한 그 이야기를, 편지로 써 보려고 해요.     


엄마, 나 결혼하고 난 이후로, 여름휴가는 꼭 부산으로 갔던 거 기억하시죠? 사실, 처음에는 어린애들 데리고 우리끼리 어딜 간들,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없을 게 뻔해서, 애들 봐주시는 동안 우리도 좀 쉬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거였어요. 평소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주변에서 도움받을 곳이 없었던 서러움을, 여름마다 부산 친정에 가서 푹 쉬고, 바닷가에서 실컷 놀고 돌아오는 것으로 보상받는 기분이었지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슬슬 우리끼리 놀고 싶은 마음도 들고, 색다른 장소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했어요. 결국에는 올해도 부산 근교 펜션을 예약했지만요.     


연로하신 부모님과, 한참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함께할 만한 휴가지를, 그것도 엄마, 아빠가 이동하시기 멀지 않은 부산 근교로 알아보는 일이 늘 쉽지는 않았어요. 더구나 매번 휴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한 번에 오케이 하시는 법이 없으시잖아요. 뭣 하러 큰돈 써가며 다 같이 가려고 하냐고,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너네끼리 다녀오라고, 항상 만류하시잖아요. 결국에는 바리바리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오실 거면서, 너희들 덕분에 우리가 이런 데도 와본다며 감탄하며 좋아하실 거면서 말이에요. 처음부터 함께 하자는 제안을 환영해 주시고 또 원하는 게 있으면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주절주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엄마, 난 요즘 주말 아침마다 훈이를 학원 앞에 데려다주고 와요. 이번 휴가에서 돌아온 다음 날에도 역시나 차에 태워 가는데, 여행의 여독이 덜 풀렸던 탓인지, 녀석이 차에서 곤히 잠이 들었더라고요. 요즘 고등학생들이 다 힘들긴 해요. 학교로, 학원으로 오가며 늘 바쁘니까요. 녀석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휴가지에서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라, 심란해졌어요.     


“아이들이 한참, 기운 넘쳐야 할 나인데, 어째 이렇게 기운이 없냐.”

엄마가 그랬잖아요. 큰 숨을 내쉬며, 여러 번이요. 우리 애들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잘 먹지도 않고, 마른 편인 것은 저도 늘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에요. 엄청 활기차거나 활동적인 편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향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은 없을지가 걱정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엄마, 엄마도 걱정하는 마음에 하는 말인 것은 저도 알지만요. 안다고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엄마는 항상 생각이나 감정을 바로바로 말하는 편이잖아요. 어릴 때는 엄마가 화가 나서 ‘다다다’ 쏟아내는 말들이 한바탕 폭격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해받고 인정받기보다 질타와 공격받는 느낌일 때가 더 많았지요. 나는 오래 혼자서 생각을 공 굴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내는 편이고, 엄마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이라, 우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해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엄마는 어른이었잖아요. 어쩜 그렇게 네 아빠를 닮아 속을 알 수가 없냐며, 드러내놓고 답답해하고, 화내고, 구박하지 않을 수는 없었나요? 우린 서로 참 많이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자고 마음먹기까지, 저도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엄마가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제게도 힘에 부치네요. 물론, 엄마 앞에서 전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지만요. 어릴 때 엄마가 ‘다다다’ 쏟아낼 때면 그만 땅속으로 폭 꺼져버리고 싶었던 그때처럼, 습관처럼 그저 빙긋이 웃고 있었지만요. 마음속에서는 작은 화산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상처를 덮었던 굳은 딱지가, 다시 뜯기면서 피가 새어 나오는 느낌이었어요.      


실은 엄마가 나한테 아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때도, 마음이 아팠어요. 젊을 때는 친구가 없어도 사는 게 바빠서 티가 별로 안 났는데, 나이 들어서 만나는 친구도 없이 집에만 있으니 자꾸 엄마랑 부대끼게 된다고, 성가시고 보기 싫다고, 아빠 흉보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또 그게 내 얘기 같은 거예요. 엄마, 나도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말 없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이 성향은, 아빠에게서 내게로, 나에게서 내 아이에게로, 대물림되고 있는 것 같네요.      


엄마,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나는 평생 엄마 맘에 들기 위해, 엄마 앞에서 밝은 척, 씩씩한 척 애써왔어요. 이제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 앞에서 적당히 가면을 쓰고 밝게 구는 일이 꼭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엄마 손주들에게도 밝음을 강요하지는 말아 주세요. 우린 모두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엄마를 사랑해요. 엄마가 나를, 내 아이들을 늘 걱정하고 아끼시는 마음도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를 조금 더 배려하기로 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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