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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Feb 04. 2024

다시 꽃 필 날

겨울, 제주 여행

새벽 5시,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전날 미리 준비해 둔 가방을 챙겨 메고 집을 나섰다. 몇 년 만에 공항인지, 여행인지. 긴장한 몸은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설레는 마음은 나비처럼 팔랑댔다.

- 공항에 사람 엄청 많다. 다들 비행기 탔냐?

- 지금 막 탔어. 너네는 제주도 몇 시 도착?

원정의 톡에 빠르게 답을 보내고 비행기 창 밖에 시선을 빼앗겼다. 서서히 날아오르는 동체 밖으로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점점 속도를 더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구름의 질감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사진을 찍었다.      


- 나 공항 도착! 배고프다. 밥 먹자!

- 우리도 와 있음. 일단 1번 출구로 나와.

고교 시절부터 이어진 원정과 나, 은선, 우리 셋의 인연은 대학 때 매일 붙어 다니며 꽃을 피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소중한 열매를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오랫동안 소원했었다. 이제는 힘들게 키워낸 열매들을 곁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필요한 시기. 우린 다시 뭉쳐서, 각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기로 했다.     


셋이 뭉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우린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주도의 향이 물씬 나는 밥상을 마주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구들 둘 다 아침을 먹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왔다. 평소 삼시 세끼 밥을 꼭 먹어야 하는 나는 깜짝 놀랐다. 친구들은 내가 배고프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먹으니 또 먹힌다고, 신기하다고 했다. 겨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갓 스물, 함께 캠퍼스를 휘젓던 우리였지만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선명하게 떠올리는 사건과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희미했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조차, 연결 고리가 어긋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많은 시간, 우리가 멀리 떨어져 지내왔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삶을 거쳐오면서 다들 많이 변했기 때문인지, 꼭 들어맞지 않는 조각들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공기 중에 맴도는 먼지처럼 흩날렸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아쉬운 감정이, 어쩌면 슬픔 같은 것이, 멀리 창밖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나를 에워쌌다.     


- 커피 마시고 우리 뭐 할까? 난 가보고 싶은 책방이 있긴 한데.

- 음, 나는 좀 걷고 싶은데. 어디 산책할 만한 데 없을까?

친구들의 뜻에 따라, 우린 해안 산책로를 검색해서 바닷가를 걸었다. 한 바퀴를 걷고 나니 나는 기진맥진인데, 친구들은 더 걷고 싶은데 산책로가 짧다고 했다. 걷고 나니 나는 배가 고픈데, 그 애들은 날 위해 점심을 먹으러 가주겠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는 내가 가고 싶었던 책방도 갔다. 그리고 이제 숙소에 가서 좀 쉴까 했더니, 둘은 시장을 구경하자고 했다. 맙소사! 친구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었다. 시장 안의 온갖 군것질거리에 눈이 가는 나와 달리, 그 애들은 “좀 전에 밥 먹었는데?”라며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래전 그때라고 우리가 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은선이는 늘 아르바이트로 바빴고, 원정은 일찍부터 컴퓨터 관련 취업을 목표로, 학점 관리에 열심히였다. 나는 나대로, 문학 동아리 활동에 애정을 쏟았다. 돌이켜보면, 우린 늘 각자의 처지와 개성에 맞게, 따로 또 같이했다. 고교 동창에, 같은 과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과에서, 동문에서 붙어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일 뿐, 관심 있는 활동이나 좋아하는 분야가 많이 달랐던 것을 새삼 떠올린다. 우리가 함께였기에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서로 많이 다른 우리였기에, 각자의 상처를 가감 없이 공유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 한가운데 친구들과 떠난 여행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났다. 붉게 물든 동백꽃은 순서대로 피고 지며 친구 꽃을 응원하고, 노랗게 별처럼 빛나는 유채꽃은 거센 바닷바람에도 꿋꿋이, 친구들과 무리를 이루어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어냈다. 이 꽃들처럼, 우리도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인생샷을 찍어주겠다며 서로에게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아직도 마냥 소녀 같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새로운 꽃잎을 피워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린 인생에서 가장 빛났고, 가장 서툴렀던 시간을 함께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많이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또 현재 처한 어려움을 격려하며, 또 한 번 피어날 우리의 봄날을 그려본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만은 늘 함께하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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