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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Dec 23. 2017

민감은 예술을 갈망한다

24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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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헤스’와 ‘박성원’의 거울은 낯선 그림자로 인도한다. 자신으로부터 나온 건지 혹은 타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망설이는 사이 동전이 던져졌고 떨어진 면은 예상 밖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약간의 호기심이 발목을 잡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한 발씩 내딛는다. 진흙탕을 만나 허우적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인기척에 자빠질지 모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보라고 독촉한다. 무엇을 마주치든 그게 삶이라고. 선과 악처럼 뚜렷하지 않고 모호한 경계 속에 자각하거나 직감하거나 상상해보는 게 존재의 이유라고.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좌충우돌의 내러티브 속의 이질감과 불균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도달하기 전에 포기하고 싶다. 대부분 몰지각한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비정상적인 물값에 열을 올리면서도 내부로부터 곪아 터진 생채기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인식조차 못했을 것이다. 



 견디게 미더운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감정이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똑같은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다운 것에 집착하는 사람, 다들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는 일조차 꼬집고 비틀어 생각하는 사람, 한 가지 일에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니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이를 보고 흔히 시니컬하거나 생각이 많다고 일컫는다. 한 마디로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민감한 사람들의 유쾌한 생존법>을 쓴 임상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은 신경계가 민감한 것으로 뇌로 가는 길이나 뇌 속 어딘가에서 정보 처리하는 기능이 발달한 것이라고 말한다. 민감성은 흔히 숫기 없다, 예민하다, 내성적이라고 표현된다. 주변의 미세한 부분까지 감지하므로 여러 면으로 유리하다. 반면, 자극적인 환경에 오래 있거나 신경계가 소모될 때까지 시각과 청각이 공격을 당하면 금세 피로해진다. 자극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서 흥분하기 쉬운 성질이라 분열 기질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성급하고 발 빠르게 돌아가는 정보 사회의 특성상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점이 부각된 셈이다. 미세한 차이를 알아채고 직관적으로 정보를 찾아내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했다고 보기도 한다. ‘C.G. 융’은 그런 특성이 우리 문명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수가 타인 혹은 사회의 요구에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내면의 피로감 혹은 괴리감을 등한시한다. 그에 비해 민감한 사람은 그냥 넘기지 못한다. 어느 것을 선택하거나 우선시해야 할까 생각하느라 어영부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옳은 것을 고집하고 최선을 선택하는 건 상황과 감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삶의 모범답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누가 빨리 답안지를 낼까 경쟁하는 대신 자신의 감각으로 무언가 파헤쳐보고자 한다. 작가 ‘황정은’이 어느 날 문뜩 마주친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인생 앞에 드리워진 주름을 느낀 것처럼. 그런 감각은 과시욕이나 자기합리화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잔혹한 운명의 굴레를 직감으로 맞닿게 한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그것을 쫓아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 <타인의 삶>처럼 타자를 통해 자기 파괴의 변증법을 깨닫게 한다. 일상의 구속을 잠시 벗어나 홀로 사색할 고독의 시간을 수용한다. 한편으론 거울 뒤편으로 물러나 내면의 빈자리를 무기력한 기시감으로 마주한다. 만약 그것에 대한 반성으로 잃어버린 욕망을 찾고자 한다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를 하는 셈이다. 창조는 표현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미시감에 초연 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이지 누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민감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감성은 창조의 기초이자 해방의 기폭제이다. 기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결로 나가고 싶어 한다. 남들이 우유부단하다고 손가락질한 그것은 그들이 하지 못하는 유연한 여지와 도약의 가능성이다. 그중 하나가 예술이다.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무의식의 심연까지 아우르는 미적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술의 비인간화>를 쓴 ‘오르떼가 이 가세트(이하 ‘가세트’)’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비현실화라고 말했다. 만약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사람에게 이제껏 본 적 없는 뜬구름 같지만 가슴 설레게 하는 이미지를 찾아보라고 한다면 가능할까? 오히려 그는 그것을 추론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환상적인 무언가가 도출될 리 없다. 예술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 껄끄럽지만 매혹적인 무언가로 닿는다. ‘피카소’의 것도, ‘백남준’의 것도 그랬다. 민감한 감각으로 더듬은 낯설고 이질적인 피조물을 어떤 식으로든 설득시킨다. 새로운 관점이란 구태의연함 속에서 절대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가세트’의 미학론은 그걸 눈여겨본다.



는 암울한 격변의 시대에 외향적인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었던 19세기 사실주의 대신, 20세기 초 암울하고 격변의 시대에 파고드는 혼란과 허무주의를 주목한다. 그래서, 기존의 형식을 과감히 파괴하거나 무너뜨리고 탐미적이었던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을 새로운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공통점은 낯선 시선이다. <타자의 추방>의 맥락처럼, 한걸음 물러난 시선, 음성, 경청과 같은 관찰과 집중이다. 어느 날 문뜩 온몸을 찌릿하게 전율케 하는 풍경과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이가 NO(부정)라고 외칠 때 YES(가능성)를 찾는 것처럼. 예술가는 그런 감에 집착한다. 대상을 가까이 두지 않고 보다 멀리 시선의 한계점을 연장시켜 낯설게 바라본다. 그러면, 낡은 잔재는 보이지 않고 부옇고 환상적이며 비현실적인 형체를 마주 보게 된다. 예술가와 대상 사이에 거리감이 클수록, 감정 이입이 없을수록, 작가의 주관 대신 대상 자체에 몰입할수록, 낯설게 만들수록, 원근법으로 바라볼수록,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의 에세이 중 ‘낙원에 있는 아담’은 민감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 즉 예술가의 이상향처럼 보인다. 그것은 ‘폴 세잔’이 추구했던 실현한다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사실주의는 사물의 감성과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양식이었으나, 유미적인 모사에 치중함으로써 속세에 국한된 의미로 끌어내린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그는 사물의 인상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나 스타일 말고도 내재된 감각을 끌어내야 한다. 사물 속의 숨겨진 욕망과 의지처럼 말처럼 사물이 아닌 것을 사물화 하고, 하나의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총체를 복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빛으로 분해하고 미적 형태를 갖춘다. 나무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공존하는 풀과 숲과 어울리는 인간, 그들을 감싼 빛과 열기까지 촘촘히 엮어내는 것이다. 그 자체의 어울림이 영원한 생동감으로 존재하여 각인된다. 화가는 영원한 삶의 조건을 그린다. 그것이 완성될수록 실현된다. 그래서, 그림의 대상은 인간의 매개물인 삶이나 사물이 아니라, 인간 자체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다. 어딘가에 귀속되지 않으려고, 어떤 상황에서건 고유성을 잊지 않고 남기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으며 설사 그렇지 못해도 본연의 모습이나 욕망에 닿은 것으로 독보적이다. 



세트’는 ‘폴 세잔’의 힌트에 따라 인간이 투쟁하고 다시 투쟁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인간상인 낙원에 있는 아담을 예술의 지향점으로 본다. 누군가는 과연 그런 치열한 인간으로 살아야 할까 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좌절하고 비관적이다 못해 자학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또한 의문이긴 마찬가지다. 동전의 앞과 뒤 중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차라리 민감한 감각을 쫓아 미지의 영역으로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낯설게 보기를 통해 삶의 올가미를 탈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지 모른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일상을 다양한 감정과 격정으로 표현한 작품 속 해방감을 이해하고 있다. 과학이나 종교는 인간과 사물의 총체적 관계로부터 해답을 찾기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예술은 직관으로 현실을 넘어 미지의 형상을 제시함으로써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한다. 전자가 현실적인 삶을 바라본다면, 후자는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로 이끈다. 그의 말처럼, 예술이 자신에게서 인간적인 감상을 비울 때 심각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단지 그 예술 자체로 남게 된다.



감성은 예술을, 유행과 층위를 다루는 잣대에서 기존의 틀을 파괴하고 재생산하는 관점으로 바꿔놓는다. 예술가에게 유리한 감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은 표현뿐만 아니라 경험의 측면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민감성은 예술을 감상할 때도 영향을 미칠까? 오늘날의 디지털과 글로벌 문화 속에서 예술을 보고 들으며 느끼는 경험이 더욱 다변적이고 다채롭다. 해외의 유명한 작품을 인터넷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혹자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매체를 활용해 손쉽게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한다. 예술이 대중적이고 친근해질수록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타성도 출현한다. 작품에 대한 느낌과 의견을 현상 혹은 체제와 같은 총체적 관계로 판단하려는 경향이다. 예술을 파헤치는 목적으로 문화적 학습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려는 행위는 가혹하다. ‘수전 손택(이하 ‘손택’)’은 반대한다(<해석에 반대한다>).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로부터 얻어진 감각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비논리적인 방식이라고. 우리는 남의 눈치를 보느라 본연의 느낌이나 감상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 동향 성의 배에 몸을 싣고 함께 열광하거나 함께 비난한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이다. 잃어버린 내면의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예리한 감각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감수성이다. 옳지 못한 것을 지각하고,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하며, 더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택’은 예술이 인간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세상을 비틀 수 있는 무기라고 말하면서, 너무나 특이하고 형이상학적이라 누구도 공감할 수 없을 거라 비판하는 것은 도덕적 잣대로 해석하려는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식이냐, 내용 이냐를 따지는 것은 예술이 현실을 완성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것과 도덕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민감하거나 예술적 이해가 높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이해관계에 학습된 나머지 자신의 감수성을 드러내기 주저하게 된다. 자신만의 감성을 잃어버린 탓에 자신 있게 판단하지 못한다. 오히려 도덕에 국한될수록 본능을 억제하라는 기독교적 공감론에 갇혀 스스로의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감성이자 특정한 경험이지, 현실 재현의 성취도가 아니다. 예술과 도덕 사이에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만약 ‘끌로드 레비-스트로스’가 20세기 중반 남아메리카 아마존 원주민을 관찰하면서 민속학자로서의 사명감으로 <슬픈 연대>를 썼다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을까? 문명인으로서 특권의식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과 비문명적인 환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경건함을 발견함으로써 문명의 역설을 발견했다. 그가 낯선 부족에서 현대의 진보성과 염세주의를 비판했던 태도는 우리의 도덕이 전부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것에 대한 성찰과 문제제기를 통해 문명과 원시, 학자와 문명인에 대한 객관성을 지켰다. 감수성은 도덕을 의식하지 않는다. 어떤 구속과 틀에 아랑곳없이 본질만을 파고든다.  



래서, 그녀는 캠프(camp)와 같은 감수성을 주장한다. 캠프란 정형화되지 않은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다. 몇 년에 한 번씩 되풀이되는 유행과 달리, 베이스캠프를 치듯 그때 그때마다 다르다. 어느 하나로 고착화되는 것을 부정하고, 발전하거나 지루하면 멈추고 새롭게 재생산된다. 내용에 대한 스타일, 혹은 도덕 주의에 대한 탐미주의의 승리이자, 진지하지만 무절제해서 완벽하지 않은, 속물적이지만 멋스러운, 취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성적이다. 정해지지 않았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적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그녀는 1950년대 말 뉴욕에서 시작된 해프닝(Happening)-회화와 공연이 어우러진 전시회-을 언급하면서, 초현실적이면서 모든 예술 형태를 관통하는 20세기형 감수성을 가졌고, 기쁨과 공포와 같은 모든 감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의 핵심은 독자적인 감수성으로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다. 스스로 확신에 찬 감성을 일단 밀고 나가보는 것이다. 어딘가에 종속되거나 눈치 보지 않는 해방이지, 상업적인 스타일리시(스타일화)가 아니다. 예술만큼 젊은 정신도 없다. 그 감수성은 내면 밑바닥, 아니마(아니무스)와 같은 숨겨진 자아 속 민감한 감각을 긍정적으로 끌어낸 것이다. 불안이나 방어기제가 아니라 조절과 치유로써 등장한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가장 위대한 성숙은 어떤 경계도 없이 전 우주를 우리의 피신처로, 우리의 육신을 소우주로 이해하는 능력일 것이다. 



력한 현실에 초연할 수 없지만, 잠자고 있던 감수성을 해방시킬 수 있다. 민감한 당신은 그럴 잠재력을 가진 셈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따진다면 할 말없다. 대신 지금보다는 재미있지 않겠냐고 말할 순 있겠다. 그것이 비현실적일지라도 혹은 일시적인 도약일지라도 상관없다. 꿈틀거림이 우리의 몸체로부터 일말의 연결고리를 가진 채 인공적인 것을 배제한 채 뻗어나갈 것이다. 그 경험 자체가 도움닫기이자 해방구이자 카타르시스다. 예를 들어, 스노클 하나로 망망대해 속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다. 심호흡 후 과감히 뛰어든 그 한 번의 경험이 또다시 바다를 찾게 한다. 당신의 민감성을 비관적인 길로 가도록 방치하지 말라. 어떤 자극제를 경험함으로써 잠자던 감수성을 깨우자. 그것이 제멋대로 표현되도록 독려해보자. 그런 해프닝이 주저 없이 반복될수록, 때론 예술과 맞닿을지 모른다. ‘가세트’가 말했지만, 예술은 비현실적이고 탈현실적이다. 돈벌이가 아니라, 상상이자 놀이에 가깝다. 행위는 일시적이나 기억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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