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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Dec 06. 2017

거울로 마주하다

23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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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삶이 더할 나위 없다면 그만이다. 단지 뭔가 버겁고 짜증 나며 성가시다면 그건 아닌 것이다. 그럴 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흔히 동굴 속에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이정푠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만 있다. 오롯이 자신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둠 속 희미한 빛을 쫓아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디선가 교묘히 자극하는 요동과 울림이 느껴진다. 호기심은 의구심이 된다. 왜 하는 순간 감정은 흔들린다. 어떤 힌트라도 알고 싶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가야 한다. 



독은 감정의 불균형 속 부정의 기표 감지하는 것이다. 행복이 아니라 불행일지 모른다는 미혹과 당혹, 삶과 욕망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균열을 놓치지 않는다. 만약 알 수 없어 방황한다면 고립된 우울 속에 갇힐 것이다. 괜히 신경 쇠약과 공황 장애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회피하지 말고 마주하는 것이다. 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듯 맞서거나 즐기겠다고 마음먹는 거다. 고독이 추구하는 궁극의 길은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정이다. 흔들린 실체를 쫓아가는 것, 내적 갈등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찾으려는 행위다. 내면의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과 울림을 발견했다면 이미 시작됐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밝히고 싶어 진다. ‘안티고네’의 도전적 응시던, ‘코난 도일’의 환상의 횡단이던. 결국 인정과 극복은 표현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듯. 표현으로써 새로운 뭔가로 나가고 이루는 행위는 작가에 이르는 길이며 크리에이티브의 탄생이다. 



은 문학 작품이 각자의 고독 속에서 탄생됐다는 건 지당하다. 작가는 내적 울림으로 현실을 꼬집거나 재해석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풍자, '존 치버'의 가면,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나르시시즘이 그랬다. 또, 현실 너머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거나 뛰어넘어야 할 지점을 배회하기도 한다.'패트릭 모디아노'의 망각 속 희미한 빛, '레이먼드 카버'의 변곡점 혹은 '윌리엄 포크너'의 직감과 '황정은'의 관망하는 투명막처럼. 그들이 더듬은 것은 단순히 께름칙한 현실이 아니라 한 발자국 물러선 낯선 시선이다. 매일 보는 거울 속 내 얼굴이 갑자기 예전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코가 이렇게 길었나, 눈은 짝짝이구나, 이마는 공놀이를 할 정도로 넓네. 타인은 그렇게 나를 본다. 내가 내세우는 장점이 아니라, 관상학적으로 이기적이고 교활한 면면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짓는 냉소적인 표정과 공격적인 말투로. 타자처럼 낯설게 바라보면, 영화 <라쇼몽>처럼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조작과 감정은 제각각이다. 이때, 왜 일치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인가 혹은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구하는 대신, 틈새 사이로 얼마나 교묘하고 모호하게 얽혀 있는가를 궁금해해야 한다. 정답을 파헤친다고 해도 진실이 선명해지는 건 아니다. 



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듯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만 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시누이라고 치자. 새로 들어온 올케(며느리)가 시어머니인 우리 엄마한테 마른반찬부터 김치까지 다 가져가 집 안의 냉장고가 텅텅 빌 지경이다. 아니, 언니는 작작 좀 가져가지 싶다. 그러나, 그땐 그녀의 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진짜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시어머니가 억지로 내 아들이 잘 먹는다고 들이밀어 그런 건지. 그건 결혼해서 며느리가 돼 봐야 알 수 있다. 같은 처지가 되고서야 속사정이 이해되듯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 말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돼 봐야 한다. 역지사지에서 입장을 바꿔보는 건 한편으로 마치 거울 뒤 편에서 바라보듯 반대의 시선이다. ‘비트겐슈타인’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을 일일이 명제화하여 논리적으로 가늠하는 건 그 부분만 명쾌하다. 왜 말할 수 없는지 인정해야 하는 언저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추리와 불확신 사이에서 파생되는 감정의 고리를 상상하지 못한다. 논리와 감정으로 얽히고설킨 회색 빛의 스펙트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무엇이 애매모호한 것인지, 어디서부터 뒤틀린 것인지 알 듯 말 듯하다. 오히려 혼란스럽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낯설게 바라봐야 한다. 거울을 보는 익숙한 시선 말고, 거울 뒤에서 낯선 내 모습을 봤듯이. 생소하고 과감하며 비약적인 호기심이 번뜩일수록 현실 너머로 도약한다. 



울 밖에서 낯설게 바라본다는 건 한편 비현실적이다. SF나 판타지처럼 실제를 뚫고 상상의 나래에 국한된 게 아니다. 낯설고도 낯설지만 개연성 있는 내러티브다. 고독 속에서 탄생해 표현된 크리에이티브는 현실과 그것을 부정하려는 모순이 엉켜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현실의 연결 고리로 유영하는 도약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레고리(Allegory)에 관한 것이다. 알레고리는 흔히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이야기다. 거울만큼 직관적으로 연관되는 것도 없다. 낯설고 굴절된 사각지대까지 파고들 수 있으며 지식과 사고의 체계까지 뒤엎는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하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그러하다. 그의 심오한 이야기는 현실과 종교처럼 의심 없이 수용되는 통념에서 시작된다. 거울이 그것의 당위성에 들이댈수록 감춰진 이면을 비춘다. 거울 속에서는 모든 게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그것을 분명히 일러준다. ‘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거울과 부권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p13)’ 여기서 ‘보르헤스’가 거울로 삼은 것이 가상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46권의 해적판이다. 이것은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지어낸 허구다. 그걸 기점으로 허상이라는 내러티브를 생성한다. 지구의 대척점으로 우크바르란 가상의 행성과 틀뢴이란 가상의 지역을 허용한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현실의 허상을 반영한다. 그로써, 관념과 복제 속에서 순수의 선을 창조하는 그들과 달리 물질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치중하는 우리의 한계를 반증한다. 또,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에서 거울은 기존의 기독교를 다르게 비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유다의 관계를 재해석한다. 대부분이, 전자의 상위 질서가 가진 고귀함이 후자인 하위 질서의 자유와 본능을 구속함을, 간과한다. 거울 속 다른 시선에서 유다는 악한이 아니라 무한한 금욕주의로 지옥으로 짊어지고 갔거나, 다종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비열한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선과 악은 백 퍼센트의 순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어떤 것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에 대한 편견과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 오히려 문제는 유다처럼 하나에 집착하면 다른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르헤스’의 알레고리는 거울이 현실을 굴절된 지점으로 양분하기에 보이지 않는 반대편을 오롯이 투영한다. 그것의 지향점은 거울 밖에서 바라볼 때 얼마나 모순적이냐를 비추는 것이다. ‘원형의 폐허들’에서 꿈꾸는 사람은 스스로 타인의 환영 임을 깨닫는 순간 안도감과 치욕감을 느낀다. 남들에 맞춰 살면 실패할 확률이 낮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지만, 내 의지대로 살지 않으면 도무지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 결국 나는 자아로부터 소외된 타인의 환영일 뿐이다. 실존적 측면에서 허상이고 모사된 시뮬라시옹에 불과하다. 거울을 통해 타인 지향적이고 꿈꾸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이질감과 한탄 속에서 헛헛하다. 대부분이 남다른 개성을 무장하면서도 누군가를 복제하고 있지 않은가? 거울은 그 지점을 보여주고 자극한다. 문제라고 꼭 집어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비틀기에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삐끗함 속에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깨닫는 건 ‘현실은 대칭과 약간의 시대착오를 좋아한다(p220)’이다. 모든 인과 관계는 오차 없이 꼭 들어맞지 않으며, 우리의 삶은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오히려 ‘보르헤스’는 지름길 대신 환영과 신기루 같은 상상력을 덧붙인다. ‘남부’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남자가 낯선 곳에서 결투하다가 죽어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다. 어차피 죽을 건데 병실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것이나 짜릿한 환상 같은 경험이나 차이가 없다. 왜 삶은 도약하지 못하고 필연과 우연 속에서 방황하는가? 차라리 그 속에서 무기력과 신경증에 시달리기보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 꿈이라도 꿔보자고. 



르헤스’의 거울은 어차피 이룰 수 없으므로 현실을 초월한다. 비현실적이고 상상력이란 층위에서 맴돈다. 시공간과 범우주적 통찰을 펼침으로써 고난도의 환상특급으로 인도한다. 실존과 가상의 인물이 뒤엉킨 내러티브나 형식을 파괴한다. 그에 반해, ‘박성원’의 <우리는 달려간다>는 거울이란 알레고리를 어디선가 발생할 것 같은 현실로 끌어내린다. 그의 무대는 보통의 삶에서 한걸음 더 들어간 황폐하고 이질적인 민낯의 공간이다. 여기서 거울은 어떤 현상에 대해 거울 밖과 거울 속이 마치 이상한 나라처럼 바뀌는 지점으로 분기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 전후를 교차적으로 담아낸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한 쌍을 이루는 내러티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는 황폐한 도시에 잠시 동안 정착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주변에는 양육 강식을 답습한 관리인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여인이 있다. 그 속에서 무기력해진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 반란을 감행한다. 결국 도망치듯 빠져나왔으나, 몇 년 후에도 그곳은 그대로다. 순리대로 살았다고 자부했던 그였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남자는 진실성이 하나도 없다. 친구의 장례식을 핑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는데, 실제로 거꾸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싶지만, 한편으로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전자의 사실과 후자의 거짓말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점이 발견될 뿐이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고 도피할 뿐 벗어날 수 없다. 전자의 현실 속에서도 도망치고 싶은 환상이 출현하고, 후자의 거짓 속에서도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있다. 거울은 그 무력감에 갖다 대놓고 서로를 비춘다. 그들은 현실과 허구가 혼재된 상태라고 말한다. 거기선 신이나 악의도, 기준이나 자의도 구분하기 어렵다. 



실과 거짓말이 혼재된 상태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판단에 대한 집착은 강박증 일지 모른다. 아마 그것을 말하기 위해 ‘박성원’은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속에서 거울을 조명하는지 모른다. 손톱을 먹은 들쥐가 도령 행세를 했던 전래동화처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하늘의 무게'에서 새로 이사 온 남자는 옆집 여자와 얽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그전에 살던 남자와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둘 다 비현실적인 하늘로 비상하려는 꿈을 가졌으나 그것의 반대편에 맞닿은 현실의 무게가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하늘의 무게만 되뇔 뿐 흉금 속 꿈을 펼치지 못한다. 그게 우리의 민낯 일지 모른다. ‘실종’의 나는 실종된 친구를 찾기 위해 그의 아내와 만난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가 된다. 여기에는 나의 우유부단함이 세상 속 억지스러움으로 휩쓸리는 지점이 있다. 그럴수록 벗어나긴커녕 내가 그라고 최면을 건다. 마치 같은 것을 추구하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거부할 마음도 갖지 못하고 휩쓸리는 현상은 ‘데자뷔’에도 등장한다. 해 질 녘 골목마다 같은 모습을 한 소년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도리어 아저씨는 누구냐고 되묻는다. 머뭇거릴수록 점점 소년과 나의 모습은 중첩되고 뒤바뀐다. 누가 진실을 알아챌 수 있을까? 무기력하게 닮은 듯하게 존재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울 속에서 마주칠지 모른다. 직감적으로 날 닮은 너를 눈치채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의 거울은 한편으로 예측 가능한 기시감(데자뷔)인 셈이다.  



러나, ‘박성원’의 거울은 기시감에 안주하지 않는다. 직감의 학습 효과는 전혀 낯선 풍경으로 도약할 발판을 만든다. 마치 처음 보듯 예측할 수 없는 미시감이다. ‘긴급피난’과 ‘인타라망’도 한 사람의 이야기가 거울 밖과 속으로 분기되어 이상한 나라 속으로 흘러간다. 전자에서 나는 눈 속에서 교통사고로 낯선 집에 갇혔다. 의도치 않게 자신을 구한 제삼의 남자가 남긴 업보를 이어받는다. 그야말로 급박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면책된다는 긴급피난의 상태에서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다. 그러다가, 후자에선 병원에 갇혔다. 나를 구해준 인물은 전자의 상황에서 살기 위해 해코지한 여인의 아들이다. 그는 진위를 듣기 위해 간호하면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나는 진실의 이름으로 신을 부르짖었다. 과연 비정상의 상황에서 정당방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긴급피난 속 행동은 정당방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나의 존속 여부는 살려준 이의 몫이기에, 누구도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도덕적 판단도 무의미함을 경험한다. 도덕이나 가치관도 세상 속 통념이다. 그것은 익숙한 것에서 습관적인 잣대이기에, 낯선 것에선 어떤 정당방위도 무의미하다. 오히려 세상살이가 어망처럼 촘촘하게 엮여 벗어날 수 없는 인타라망을 깨닫는다. 여기에도 무기력이 있다. 통념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에 기댈 수 없어서 무기력하다. 예측 가능하던 그렇지 않던, 기시감이던 미시감이던, 분명해 보였던 실제가 거울 밖에서 한발 물러나 바라봐도 모두 낯설고 안개처럼 모호하다. 어떻게 해야 허심탄회하고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르헤스’는 현실과 이상이란 간극에서 초연하기 위해 꿈꾸듯 피어나는 비현실적 상상력을 꽃피웠다. 그 신기류 같은 환상은 대단히 탄력적이어서 모순을 냉소적이지 않고 매혹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그와 같은 맥락이 ‘박성원’의 글에도 나타난다. 악몽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자각몽으로 의식을 발휘하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의사가 있다(‘꿈 조정사’). 그러나, 잠자는 시간이 늘어나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고발한다. 잠이든 사람들은 어느 순간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의 단꿈을 깨어야 할까? 누구도 그 행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다시 말해 판단은 거울 밖이나 속에서 내릴 수 없다. 거울의 시선은 단지 객관적일 수 있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서의 방점은 삶의 간극에 대해 스스로 조율해야 하는 것이다. 자각몽이란 은유는 타자가 아니라 자아가 내리는 의지다. 그건 직감으로 터득된다. 그래서, ‘박성원’의 거울은 그 상황에 놓이기 전에 먼저 한 걸음 물러날 기회를 제공한다. 즉, 있을 법한 현실에서 무기력한 기시감과 놀란 나머지 오히려 초연할 수밖에 없는 미시감으로 인도한다. 그걸 배회하는 것으로 세상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스펙트럼 사이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내성이 쌓일지 모른다. 경험할 순 없어도 적어도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감의 학습은 기시감과 미시감의 반복이다. 



리에게 요구되는 건 한 가지다. 진부한 잣대나, 황홀한 상상력의 어딘가에 종속되지 말 것. 어떤 상황이던 한 걸음 뒤에서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연해져야 한다. 속도를 늦추고 가끔씩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모든 열광 뒤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그 함정을 조심하라. 어쩌면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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