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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Nov 29. 2017

고독의 용기

22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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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잘 굴러가는 것 같아도 문뜩 모든 게 엉망이라고 깨닫기도 한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닦달하고 다그치면 원상복구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냥 귀찮을 때도 있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내버려둔다. 한발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처음엔 뒤죽박죽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무엇인가 채워지고 혹은 방치된 채로 흘러가고 익숙해진다. 빈 수레도 잘만 굴러가는 법이다. 그렇다고 내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어떻게든 대체하기 마련이다. 근데 나는 그렇게 쿨하지 못하다. 그저 내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나 없어도 괜찮다는 거지. 이래서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병철’은 자아를 부정하는 피해의식과 소비 집착적 신경증에 시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인위를 가하지 않는 무위와 남다름도 포용하는 관대와 화해가 반복되는 놀이를 제시했다. 그러려면 모든 것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다. 바싹 다가서거나 왈가왈부해도 해결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관망하게 되면 집착하지 하고 조금 초연해질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건 왠지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하나 빠진 자리가 티 나지 않을 만큼 잘 돌아갈뿐더러, 이탈된 헛헛함에서 초연하기 힘들다. 끼리끼리 모인 대중으로 살아갈 때 가장 참기 힘든 건 나만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닐까 한다. 그 불안이 한걸음 물러나 낯설게 바라볼 필요성까지 부정한다.



망할 때의 불안은 이질적인 타자도, 자각하는 행위로써 고독도 부정하게 만든다. 오히려 학자들은 불안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자기긍정과 절대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용기 내라고 했다. 분명 여기에는 자립에 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남들이 어떻다고 핑계를 대지 말고 오롯이 내 길을 가야 한다고 다독인다. 그러면서 외롭고 힘들 수 있음이 생략됐다. 네트워크 세상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약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같은 것끼리 뭉치다가 가끔씩 이질적인 타자를 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때론 혼자라는 게 낭패감이 아니라 건설적인 결단일 수 있음을 에둘러 말한다. 그들은 현대인의 두려움을 철학적 과제로 지적할 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책을 덮고 나면 왠지 막막하다. 뭐 어쩌라고? 정작 필요한 것은 부정된 자아를 모르고 남들처럼 살다가 알 수 없는 불만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럴수록 혼자 곰곰이 생각하고 되짚어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건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지 소외된 외로움이나 허망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 반성하고 재정비할 시간, 즉 고독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그문트 바우만’은 이 시대에 인간이 느끼는 진정한 공포(phobophobia)는 강제 퇴장이나 정리 해고로 버려졌을 때라고 말했다. 우리는 외롭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났고 사귀었으며 소통하기 위해 비슷해졌다. 즉, 외로움이란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같은 것끼리 뭉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개인화된 네트워크 시대인 ‘유동하는 근대’에서 한 개인의 존재는 소비지상주의와 동형의 유대관계에서 증명된다. 그 밖의 요소들은 해체되고 와해됐다. 닮아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욕망을 자극하는 타자와 자기 욕망을 읽어내는 능력마저 잃었다. 외로움이 모욕인 현대인은 고독 역시 비슷한 것으로 치부한다. 소통하고 공유할 게 많은 세상에서 한발 물러서 쓸쓸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생적으로 기술과 광대역의 네트워크에 혈안이 된 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관계는 의식주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한 마디로 가족 중심에서 지역과 국가, 제도로 자본 축적과 기술 발달로 이어졌다. 그것에 대해 ‘데이비드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봉건주의 이전에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른 수치심이 개인의 행동을 통제했고, 계몽주의 이후엔 부모가 심어준 심리적 기대치에 조정을 받아 겉치레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으나, 테크놀로지 사회 이후에 온갖 문화와 접촉으로 인한 감수성 때문에 타인의 레이더 속에 갇혀 있다. 즉, 집단 환경의 차이가 감성의 통제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인과 타인의 경계가 명확했던 것이 점점 경계가 모호해지고 점차 복잡한 수신 장치와 기술 변화에 민감해졌다. 이건 ‘한병철’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성과 사회와 같은 맥락이다. 반복하지만, 같은 것끼리 뭉침으로써 타자를 추방하고 혼자만의 시간까지 빼앗는다. 



층과 가족의 종속에 벗어난 개인은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공동 문화의 창조자로 변모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따라 하기의 열풍일 뿐, 다른 변화나 진화의 물꼬는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조직하고 영위하는 것은 유대감이라는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이다. 문화적 개성도 더불어 성장하려면 그 속에 자기다운 색깔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작정 추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고독을 저버렸고, 생각과 반성, 그 속에서 얻는 창조의 고통을 놓친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렇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바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 말한다.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소수에게 허락되고 있다면 위기다. 다양한 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유일한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를 떠올려보자. 그가 대단한 것은 억압당하며 차별받는 범주에 속한 사람으로서 종속되고 따라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편견과 이질감을 개선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에게는 뛰어난 머리와 리더십, 책임감, 냉정함이 있었다.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어 성공할 기회도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과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을 위한 일에 마음이 갔다. 처음에 대다수가 그의 도전이 관료적인 위계질서를 와해시키는 것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보란 듯이 더 큰 관용과 너그러움을 실천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또한, 소수 민족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집단 열등감을 한 꺼풀 거둬냈다. 그의 성공은 도전과 능력에도 있지만, 한편으론 함부로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편견과 그 껄끄러움을 묵인하거나 반항하는 대신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것을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해야 했을까? 얼마나 버겁고 힘겨운 고독한 시간에 머물렀을까? 영웅 신화는 누구나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법이다.



독은 뭔가 자신을 걸고 넘어뜨리는 돌부리를 지나치지 않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 앞의 껄끄럽고 이물스러운 이질감을 감지하고 끝까지 더듬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은 진실을 추궁하는 대신, 보이는 모습에 왜곡되고 조작된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억측에 혹 해왔다. 불행히도 우리를 중심 있게 잡아줄 스승이나 중심축은 미미하다. 교육의 의미가 규칙이나 지식보다는 처세로 바뀌었기에, 정보의 과잉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을 선택하게 된다. 선택과 집중을 잘하는 게 능력이 돼버린 세상은 단단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적이다. 그럴수록 중심은 타인보다 자기 소신과 신념, 의지에서 나온다. 그건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한 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께름칙함이 계속해서 발길에 차인다면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 <고독의 매뉴얼>의 저자 ‘백상현’도 말했지만, 고독은 지향점 없이 감정의 불균형 속에서 우울로 좌초하는 부정적인 기표가 있다. 만약 삶이 모나지 않고 평온하면 불안이나 불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지 않다는 건 분명 어딘가에 문제의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 때 인간은 곰곰이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어디서부터 생성된 것일까? 외부로부터 생성되는 쓸쓸함과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공허한 교차점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규정하고자 한다. 



독을 수용하려면 그것의 필연적인 계기를 이해해야 한다. ‘백상현’은 ‘코난 도일’과 그의 인물인 ‘홈즈’의 관계를 예로 든다.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전자와 탐정인 후자는 모두 과학과 이성에 기인한 합리주의자로 대변되지만, 각각 심령술과 코카인에 심취한 모순을 갖고 있다. 그건 자신의 논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 이면에 미스터리한 공간 또한 가지려는 욕망으로 풀이된다. 전자는 후자 같은 배우(타자)를 내세우고 조정함으로써 실현한다. 작가가 배우를 통해 욕망을 배설하고 실현하는 것은 ‘자크 라캉’이 말한 환상의 횡단이다. 이것이 중요한 건 삶의 논리가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을 주목하고 그 공백 속에서 근본 환상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 환상이란 타인 혹은 사회나 문화 속에서 영향을 받아 생성된 억압된 기표를 무의식 넘어 숨겨놓은 것이다. 자신의 강박 관념을 깨닫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의존하지 않는 영역 어딘가로 도약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타인이 만들어놓은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새로운 무대를 설계할 수 있는 작가의 지위로 올라서야 한다. 그러므로, 환상의 횡단은 같은 무리의 도움 없이 우뚝 서려는 자각의 시작이다. 홀로 독립할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부정된 기표를 바꾸려 한다. 



독의 공간에 들어서면, 자아는 욕망이 떠다니는 기표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기웃댄다. 내면 속에 숨겨진 공백 속으로 응시한다. 응시는 텅 빈자리를 채우고 비우는 주체로서의 욕망을 표출하는 기술이다. 저자는 ‘안티고네’의 욕망을 짚는다. 그녀가 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토로하고 그 죗값으로 무덤 속에 매장되는 수모를 감수하는 것은 근친상간의 충동과 남성적 권위에 대항하는, 넘을 수 없는 규정에 대한 반항적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 연속선 상으로, ‘신디 셔먼’의 사진 속 역시 남성 지배적 사회에 도전하는 눈빛과 스스로 셔터를 누르는-남성이란 대타자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지식의 지배에 무심하고 자신의 욕망에 확신한 여성적 시선이다. 여기서의 방점은 남성 혹은 지배 체계에 아랑곳없이 그 너머 바라본다는 것이다. 지금껏 도달한 바 없는 여성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도발하고 위협한다. 남성적 환영의 질서와 권력에서 횡단하는 여성-혹은 소수-의 욕망을 주장함으로써 억압된 시니피앙(기표)을 해방시켜 공백에 도달하는 주체성이다. 남자-혹은 타자-가 만들어놓은 성공을 내려놓음으로써, 한 번도 다가서지 못한 내면의 무의식적 공백으로 응시함으로써,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한 번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질서가 붕괴된 환상-혹은 환영, 환각- 속으로 일탈하고자 한다. 



탈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탈선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무시하고 뛰어넘음으로써 주체로 다가서려는 해방과 해탈에 가깝다. 자신이 창조할 법한 빈 곳을 찾고 바라보면서 유영하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응시가 공백을 중심으로 주체되기 과정에 흡수되면서, 자신은 타자로부터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인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백상현’은 결여된 주체가 대상을 통해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욕망을 실현하는 신경증 너머의 유령이라고 말한다. 유령으로서 실체 없이 욕망에 의해 자석에 끌리듯 매료되는 곳으로 향한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한 엑스니힐로(ex-nihilo)라는 창조의 순간과 새로운 욕망이 출현되는 지점이다. 희망을 이룬 것처럼 실체가 되나 동시에 다른 목표가 생긴다. 마치 ‘코난 도일’이 <주홍빛 연구>로 ‘홈즈’를 탄생시킨 이래로 수십 편의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중독에 걸린 듯 스스로 다그치고 지치지 않은 채 전진한다. 이렇게 고독의 마지막은 매혹의 상태다. 
우리의 의식 상태 중에서 가장 주체에 가까운 것은, 어떤 주체성의 환영에도 자신을 개방하지 않는 완고한 고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의미의 공백으로 유지하려는 투쟁. 그것이 주체의 개념에 가깝다.
(<고독의 매뉴얼>, p226) 



독은 필연적 계기를 놓치지 않고 내면의 텅 빈 공간을 순수한 욕망으로 채우는 과정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목적이 있는 어떤 여정과 반복으로 비유됨으로써, 고정관념과 외부의 영향으로 홀로 된 외로움과 차이를 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는 그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 세상 혹은 우주를 유한한 지식이 포함된 무한한 도서관으로 은유한다. 그것은 인간이 섭렵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계라는 유한성의 함정과 또 다른 미로 속에서 실패할 필연성이다. 차라리 그 속에서 각자 필요한 무언가를 하나씩 깨우치는 게 낫다. 그것을 고르고 읽어가며 깨달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주체의 투쟁이다(물론 버리는 것도 자의지다).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도 바쁘기에, 유동하는 근대 혹은 성과 사회에 휩쓸릴 여력이 없다. 자각은 그 미로의 항상성과 존재성을 눈치채고 탈출하려는 희망을 버림으로써, 도리어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리는 이유 있는 반항이 된다. 고로, 고독은 그 자체로 이미 창조적이다.



독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대부분 소비자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뭐든지 사들이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소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실천하는 사람은 더 적다. 커뮤니케이터는 크리에이터가 되는 법을 모른다. 그러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다. ‘데이비드 리스먼’은 같은 것을 추종하는 현대인을 포괄하는 타인 지향형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재 자신이 불필요한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이 얼마나 흥미로운가를 알아차린다면 더 이상 군중 속의 고독을 동료 집단에 의지하여 애써 누그러뜨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고독은 자신의 운명을 놓치지 않는다. 헛헛한 허무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재발견과 재탄생이란 창조의 필연으로 나간다. 생각해보자. 누군가 만나는 대신 가끔 고독의 시간을 허한다면 어떨까? 사색에 잠기거나 하다 못해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거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서평이나 스케치라도 남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욕망을 알고 행동하는 작가와 배우라는 의미인 아욱토르(auctor)를 실천한 인물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삶의 무대에 주체로서 존재하는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부조리를 주시하고 지적할수록, 삶의 주도권은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현명한 소비자는 물론이거니와, 생산할 수 있는 저자로서 존재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창조의 흔적을 남겨라, 삶이든 작품이든 간에. 크리에이터가 되려면 고독을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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