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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Nov 20. 2017

감정이입보다 거리감

21_리뷰에세이

                                                                                       표지 : 모던 올랭피아(폴 세잔,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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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까지의 글은 저편 어딘가 어둠 속 희미한 불빛을 따라 시작되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빛 때문에 썩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막상 마주한 것은 미지의 욕망, 무의식의 파편,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나는 고유한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군중 속의 자아였다. 의문이 든 순간 한구석에 처박혔던 무의식이 봉기했다. 그동안 정체성이 위협당했다고 지적했다. 각종 사회적 편견과 강요, 낙인과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뼛속까지 박혀 있나 하는 것은 누군가의 재기 발랄한 풍자 속에서 드러났다. 시니시즘과 순수함, 궁극의 무감동과 열정적 몰입, 변칙과 원리 원칙, 가벼움과 진지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처럼 말이다. 그런 내러티브는 사회나 환경 속에서의 자아가 어쩔 수 없이 분열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라는 양면성이 어떤 것에 치중하는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대부분 전자에 신경 쓴다. 그러다가 도태되고 억눌린 후자가 출몰할 때마다 양극 사이에 완급 조절을 위해 감추거나 탈바꿈한다. 그렇게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 바로 레이어다.



층이 얇은 막처럼 다양한 색깔과 무늬로 미세하게 덧칠한 레이어는 외면과 내면의 간극만큼 셀 수 없을 만큼 쌓여 있다. 그것을 인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한 듯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다중인격자들이다. 한 가지 모습을 고수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역할과 여건이 주어졌으니까. 영화 <클로저>에서 양파처럼 까도 까도 진짜 ‘앨리스’를 알 수 없듯이, 현대인의 숙명인지 모른다. 문학 속에서 레이어는 카멜레온이나 위장, 가면으로 나타난다.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의 인물들이 그랬다. 그들은 대부분 파멸하거나 몰락한다. 왜냐하면,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자들은 기회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에 등장하는 ‘프로데릭’을 보라. 타인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불건전하고 건강하지 못한 욕망을 조작한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기만할 뿐만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자기합리화는 나르시시즘으로 향한다. 사회엔 그런 이들이 넘쳐난다.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더 갖기 위해 탐욕스러워지고 한편으로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삶의 기준을 무분별하게 줄 세운다. 어느 지역이 학군이 좋고, 어디 다니면 연봉이 억 단위며, 배우자와 그 집안의 조건까지 따지는 등. 속물주의와 과시욕을 넘어 남녀의 사랑이나 모성애조차 통속적이 돼버린다. 최소한 같은 모양새를 유지하려는 욕망은 점점 각자의 마음까지 파고든다. 현실뿐만 아니라 디지털 속 SNS에서도 자신의 일상과 취미를 공유하고 누군가에게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 진다. 가치는 누군가의 ‘좋아요’ 속에 발현된다. 즉, 지속적으로 같게 만들기 문화 속에서 모두가 비슷하다. 연예인도 했다는 성형외과에서 인형 같은 얼굴로 유행하는 옷차림과 화장품을 바르고 최신 스마트기기를 장착한 채 핫 플레이스와 네트워크 속을 활보한다. 동형성은 같아져도 된다고 허용하면서 그렇지 못한 타자를 솎아내고 몰아내려고 한다. 



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말했듯이, 같은 것의 추구는 타자를 배척하는 것 같지만 결국 고유성이 사라진 자아로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끼리끼리 모이면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지 못한 이가 발도 못 붙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은 남아있다. 지금의 나는 왠지 진짜 나라고 확신할 수 없다. 뭔가가 내면 깊숙이 치고 올라온다. 어쩌면, 맨 처음 언급했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속 희미한 불빛은 부정된 자아가 무의식의 힘을 빌려 보내는 메시지였는지 모른다. 정체성 위협과 강요라는 외형의 문제는 레이어, 나르시시즘, 동형성이라는 내면적 결함을 낳는다. 그건 나를 위협했던 환경이나 사회라는 타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학습된 나머지 스스로 억압하고 넘겨짚거나 섣불리 상상했던 자아도 함께 한 일이다. 자아는 피해의식 속에서 타자를 부정하고 그것에 골몰한 사이 진짜 자기가 사라진 줄도 모른다. 자신에게 확신할 수 없는 건 눈치가 없고 직감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소리와 분노>에서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 형제들이 끝까지 진실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오직 직감한 ‘캐디’만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었다. 



해의식 속의 자아 혹은 부정된 자아는 스스로 만든 두려움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을 알기란 쉽지 않다.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불안이란 실체를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비존재를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령이나 악마처럼 입증하기 힘들지만 어디선가 있을 것 같아 지레 겁먹는 것은 막연한 것이다. 좀 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원인과 요소를 요목조목 따져야 긍정할 것과 부정할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설사 이질감이나 껄끄러운 것일지라도, 회피하고 싶고 납득하기 힘들어도 도전해야 한다. 피해의식이나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이기도 하다. 그건 자기부정을 자기긍정으로 바꾼다. 자기긍정은 자신의 정체성과 힘과 자율을 깨닫고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동참하면서도 과오를 지적하거나 바로 잡으려는 용기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실수와 정의로 이뤄졌든 간에 그것을 인정하고 관조하며 희망한다. ‘폴 틸리히’는 자기긍정을 위한 방법으로 신적 실체 속에서 신앙으로 피해의 식과 타자까지 끌어안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쩐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좀 더 범용적으로 자신과 남다름까지 품으려면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와 닿지 않는 그 자체를 왜 그런지 궁금해하는 것, 나와 다르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담담히 해석하는 것은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 부정으로 잃어버린 감각 세포 하나를 끄집어내야 한다. 마음 한 구석에서 ‘제발 그만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며 조금씩 밝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이끄는 힘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 내면의 울림을 따라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세상을 오롯이 바라보는 감각을 터득한다.



런 감각은 다시 말해 직감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나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을 통해 직감을 잃은 자의 말로를 지켜볼 수 있었다. 착각 속에서 자기를 맹신하다가 모두에게 외면되고 홀로 남았다. 진실을 모르기도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모르기에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밀려난다. 직감은 드러나지 않아도 어딘가 도사린 의미와 관계성을 읽으라는 말이다. 설사 정보와 사실을 꿰뚫지 않고서도 이해하려면 다양한 생각과 감수성, 이해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의 이야기도 내 일처럼 느낄 수 있는 건 공감력이다. 공감의 크기는 감정을 다채롭게 만든다. 그런 노력과 학습이 결국 직감을 만든다. 직감은 체득하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타자의 것이라도 간접 경험을 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문학이다. 그런 차원에서 레이어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은 많은 작가들이 애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과 주인공 사이에 얇은 막을 씌워놓고 색깔과 투명도, 두께감으로 조절하곤 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은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허울이 어떤 계기로 표면 위에 나타날 때의 우여곡절을 바라본다. 그런 균열은 삶을 낯설게 하거나 습관화하지만 도약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상대를 탓하고 부정한 채 홀로 남겨졌으나, 또 다른 이는 변화의 순간을 감지하니까. 그는 그 변곡점 속에서 그대로이거나 달라지는 인물들을 다양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역시 그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뭔가 간질간질하게 내면을 자극한다면, ‘존 치버’의 이중과 다중 인격을 넘나드는 가면과, ‘황정은’의 녹록지 않은 부대낌과 삶이 버거워지는 주름을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을 되새길수록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어쩌면 나의 모습일지 모른다. 직감은 무작정 바라봄, 약간의 이해와 여지, 어떤 공감, 자아 회귀, 또 다른 사태로의 예측이나 체득으로 나아간다. 그런 프로세스를 이해할 때쯤 ‘황정은’처럼 자신의 인물조차 감정이입 없이 투명막을 덧댄 듯 관망할 수 있을 것이다.



감이 필요한 이유는 관망 때문이다. 관망해야 하는 이유는 나와 다름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너라는 이원성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타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타자는 나를 구속하면서도 나와 대등하게 존재함으로써 나를 일깨운다.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 사회>에서 근대 사회는 규율을 중시하나 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 사회라고 말한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지나친 긍정성은 주의력 과잉이나 결핍, 거부와 수용 사이의 폭력적인 신경증을 유발한다. 탈진할수록 내재된 반발심이 싹트는데 이질감과 타자를 무작정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런 신경증적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색적인 삶, 막간의 시간 동안의 머뭇거림, 돌이켜 생각해보기, 집착할 필요 없다는 무위에 도달하는 연습 같은 것이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폴 세잔’의 그림처럼 사물을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상처럼 최대한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사색적인 관찰 속에서 기존의 해석과 다른 나만의 화풍이 발생한다. 보고 생각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야 한다. 멀찍이 떨어져 볼수록 객관적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주체와 객체 사이에 공간을 허용한다. 그것은 서로를 헤치거나 변형시키지 않는다. 그 여유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한 채 중립적인 상태다. 그것을 이해하는 감각은 직감적으로 자아에게 쌓인다. 그런 멋진 세상 속의 자아가 그 긴장과 여백을 제공하는 타자를 어떻게 구속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까?



런 감각은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씩 천천히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무위와 치유, 개방과 화해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피로다. 일하는 틈틈이 막간을 활용해 타자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탐닉하는 유희이자 놀이다. 지치지 않고 모래성을 쌓고 허무는 아이들의 놀이인 아이온-영겁의 시간-처럼 되풀이된다. 실패도 위협도 없기에 피해의식 속의 자아를 탈출시켜 타자와 어울릴 수 있도록 이원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한병철’이 기대하는 사회상은 피로 사회다. 피곤함이 아니라 무언가 정답이 없고 즐기면 그만이니 참여 자체가 유익한 피로다. 그건 수많은 예술이 입증하고 있다. 예술은 다양한 형태와 내용으로 타인에 대한 인상과 여운의 흔적을 수없이 채워간다. 영화 <타인의 삶> 역시 한걸음 뒤에서 관조할수록 자신의 욕망만큼 타자의 그것까지 포용함을 보여준다. 그걸 깨달은 ‘위즐러’가‘드라이만’에게 베푼 경청과 배려는 멈추지 않는다. 그 뜻을 이어받은 ‘드라이만’은 ‘선한 이들의 소나타’라는 문학을 탄생시킨다. 타자를 인정하고 그 이질감조차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때 타자의 시간을 허락한다. 타자의 낯섦과 피로를 이해할수록 풍족한 결실이 전이되고 전파되어 삶의 크기를 넓혀간다. 



자는 욕망을 환기하는 대상이지 욕망 자체가 아니다. ‘자크 라캉(이하 ’ 라캉’)’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한 것은 타자가 주체적 욕망을 대리하고 투영할 뿐 그것을 뛰어넘어 추구해야 할 목적 자체가 된다는 게 아니다. 자아는 자신의 욕망을 일깨우는 객체로써 혹은 자극받아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써 타자를 인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가늠하고 재고 분석해야 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타성이 아닌 피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감정이입보다 거리감이 필요하다. 인상파 그림처럼 한가지 방식이 아닌 빛에 따라 다채로운 원근과 개성을 잡아내야 한다. 다양하게 접근하기 위해선 여러 번 끊어 읽기와 쉼표로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수많은 답 속에서 내 것을 찾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변혁과 변곡점을 만날 수 있다. 삶에 정답은 없다. 포용하는 만큼 다른 색깔과 선명도, 부정성이 보인다. 그게 직감으로 쌓일수록 내가 보는 모든 것은 선명하거나 분명하지 않아도 뭔지 예감된다. 감지할 수 있으므로 충분히 풍요로워진다. 그렇다면 굳이 피해의식 속에서 잉태한 두려움에 갇힐 필요가 없다. 피로하게 타인을 열정적으로 바라보고 사색할수록, 무언가 껄끄럽고 이질적인 것을 직감할수록, 지나친 감정이입이나 공감을 버리고 적정선을 유지할수록, 그렇게 근육처럼 몸속에 쌓여갈수록, 비존재의 불안은 희미해진다. 성과 사회에서 부정된 자아를 모른 채 불만에 사로잡힌 멜랑콜리한 죽지 않는 자(undead)는 그것을 모른다. 그래야 할 이유를 누누이 설명해도 모른다. 분노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발만 물러나면 그만인데. 관망해야 할 용기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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