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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06. 2017

어둠 속, 생존의 빛

02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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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기생하여 쉴 새 없이 내뿜던 한기가 엷어진 것은 봄 내음 덕분이다. 그 따사로움에 뾰족했던 기운이 제 풀에 꺾이고 만다. 그럼에도 시린 냉기가 어깨, 팔꿈치와 무릎 끝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서늘한 봄은 인상주의 한 장면 같다. 빛이 그림자를 품은 것처럼. 이 서늘한 따사로움 속에서 명암의 경계는 존재한다. 동시에, 광채를 투과한 스펙트럼 사이로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된다. 명도의 차이로 빚어내는 파장이다. 그것을 감지해야 이질적인 광을 주시할 수 있다.



선 빛은 어디에 있는가? 엉뚱하게도 ‘M. 나이트 샤말란(이하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명명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케빈’은 다중인격(해리성 정체감 장애)을 앓고 있다. 한 사람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정체성이나 인격이 존재하는 정신분열증이다. 대개 충격이나 상처에서 비롯된다. 그 역시 어린 시절 학대를 겪었다. 그로 인해 불안과 외로움이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자아를 만들고 섞임으로써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들 중에 가장 나약하고 소극적인 존재다. 자아 분열의 모체가 힘이 없다는 것은 구심점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치료를 맡았던 ‘플레처’ 박사는 누가 불빛을 가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 분열된 자아 중 누구인지 묻는 것이다. 


                                     

23 아이덴티티 (M. 나이트 샤말란, 2016)

                              


빛은 원래 주체성의 획득과 관련된다. 그렇지만, ‘케빈’의 상황이라면 자아 분열 상태를 통제하기보다 공존하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형평성에 맞게 차례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플레처’ 박사는 그것이 어긋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자신을 찾아온 것은 ‘베리’가 아니라 다른 인격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사탕 바구니를 바로 잡고, 시종일관 의뭉스러운 대답을 일관하다가, 아무 문제없다는 듯 자리를 뜬다. 그런 행위는 ‘데니스’의 것이다. 규칙상 등장해선 안 되는 인물이다. 억압이 도리어 역효과를 낸 모양이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납치사건이 이미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불빛은 가장 변태적이고 잔인한 인물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의도가 변한다. 쉽게 말해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로 바뀐다. 그의 통제 하에 다른 인격을 제압하면서 기존의 체계가 무너진다. 



기서 불빛은 안정화가 아니라 변이의 매개체이다. 악한인 ‘데니스’와 ‘페트리샤’는 힘으로 통제하면서 새로운 개체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23개의 극단적인 정체성이 모여 가장 강력해진 ‘비스트’다. 그 돌연변이는 불가항력이기에 앞으로의 서사를 미궁 속에 빠트릴 수 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놀랍게도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첫째, ‘비스트’의 탄생은 새로운 후속작을 가능케 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브루스 윌리스’다. 그가 ‘미스터 글래스(‘사무엘 잭슨’ 역)’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십여 년 전의 작품인 <언브레이커블>과 연계된다. ‘미스터 글래스’와 ‘비스트’가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점은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악당 캐릭터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두 번째로, 그런 시도는‘샤말란’의 정체성이었던 반전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기회가 된다. 이 영화는 기존의 것들과 내용이나 스타일 면에서 다르다. 초자연적인 충격보다 더한 공포로 억압된 무의식을 내세운다. 그것을 ‘비스트’란 캐릭터에 투영한다. 그로써, 햇살이 어둠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암흑을 비추는 빛의 파장 임을 입증한다. 빛은 딱 비추는 곳만큼 투영할 뿐이니, 그것이 닿지 않는 곳은 여전히 어둠 속이다. 그 속에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공포가 도사린다. 끝까지 가보기 전에 누구도 그 서사를 예측할 수 없다. 그 미지의 가능성은 스릴러, 미스터리, SF라는 장르적 숙명인 반전이란 피로도를 훌쩍 넘어버린다. 



<23 아이덴티티>는 컴컴한 무의식의 동굴 속에 욕망을 따라 돌진한다. 감독의 야심이란 단 하나의 횃불에 의지한 상태다. 그중 어떤 것은 평생 먼지 속에 방치될 것이고, 희미하게 퇴색될 것이며, 의도적으로 쫓겨날 수 있다. 세상의 풍파 속에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이름 속에서. 그런 보폭으로 힘겹게 내딛는 또 다른 남자를 살펴보자. 훨씬 더 이전의 그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속에 기거한다. 수 십 년 전에 기억을 잃었으므로 낯선 이름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자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더듬게 된다. 친구들의 사진 속에 자신처럼 보이는 인물을 찾았다. 그의 종착지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그녀였다. ‘드니즈’라고 부르자, 그녀는 그에게로 와서 어떤 향기와 익숙한 소리, 망각 속 사라진 파편들을 조금씩 꺼냈다.  



녀에 관한 기억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뜬구름처럼 가볍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아지랑이다.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감춘 뒷모습으로, 혹은 카페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든 채로, 아니면 영화가 끝난 후 거닐던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녀가 들려준 것은 그들이 함께한 흔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인 그는 스스로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없다. 왜 함께 있지 않고 홀로 떠도는지 모른다. 진실은 망명에 실패함으로써 뿔뿔이 흩어졌다는 데 있다. 그의 이름은 ‘페드로’.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프랑스에서 불법체류자로서 불안했었다. 거기에 그녀와 헤어져 상실감이 더해지자, 행복했던 순간들 어둠 속에 밀어버렸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잃었다. 차라리 백지상태에서 빛과 어둠, 명암의 온도 차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가 과거를 쫓으면서 떠오른 잔상은 희미한 상점이 즐비한 인적이 드문 어두운 거리였다. 이때, 골목을 밝히는 작은 불빛은 갈 곳 없이 떠도는 자신을 품어줄 희망의 불씨 같았다.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언젠가 존재했던 러시아 식당이나 호텔 안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그녀의 실루엣처럼. 그러자, 그는 방치한 무의식 속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쫓기 시작한다. 그것은 잠자코 스스로 드러날 때를 기다린 채 먼지 속에 쌓여 있었다. 행복한 순간에 찬란했던 과거였고, 그래서 여전히 서성이게 만드는 과거였으며, 그렇다고 통곡조차 허하지 않는 무덤덤한 과거였다. 억지로 털어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각인된 파편이었다. 그렇게 놔둔다고 해서 희생과 상실의 굴레를 벗어날 수없었다. 기억 속에서 환기되는 이상 용기 내어 바라보고 덤덤히 더듬어 볼 수밖에.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에서 비롯된 인상의 빛이다. 어두운 골목에 오랫동안 방치된 상점(추억)의 불빛이 하나둘씩 켜진다. 빛의 둘레가 늘어난다. 절망에서 희망의 싹이 움튼다. 빛은 밝히려는 자에게 낙관을 선물한다.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마주함으로써 무의식 속의 암흑을 몰아내고 밝음으로 나아간다. 



스트’와 ‘페드로’의 빛은 구심력이 아니라 원심력이다. 지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항상성이 아니라 호기롭게 뻗어가기 위해 현재로부터 벗어난다. 그 빛의 파장은 누군가에게는 야심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인상이다. 물론 전혀 다른 결과로 나간다. 전자는 우연적이고 예측불허하며, 후자는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 뿐이므로 허무하다. 그럼에도 돌파구를 찾아 정면돌파한다. 생존이란 이름으로 삶의 일부가 된다. 상처 속에 혼란스럽고 상실감으로 모든 것을 버렸지만, 참혹한 밑바닥에서 마주한 것은 다시 올라가야 할 지상이다. 저 멀리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빛을 쫓는다. 결국 빛은 목표가 아니라 동기다. 선택했기에 어디론가 나간다. 그런 생의 반복과 극복이 생명력이다. 지극히 생물학적인 접근이지 도덕적인 판단이 아니다. 미지의 빛을 감지하고 쫓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살아남으려는, 혹은 살아남은 자의 용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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