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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pr 24. 2017

계속 쓸 수밖에 없다

01_리뷰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를 읽을 때 드는 생각은 단순히 부럽다가 아니다. 어떻게 습작처럼 쓴 걸로 출간할 수 있는지 살짝 어이없다가, 거의 매년 책을 내는데 언제 이런 걸 썼는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뚝딱하고 책 한 권을 내는 마법사나 로봇이란 말인가? 언뜻 시샘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파헤쳐봐도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함에 감탄하고 있다. 그들은 재능도 있지만 성실하기까지 하다. 



실은 태도에서 나온다. 그들은 마치 직장생활을 하듯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출판사와 계약 때문이거나 휴식하는 차원에서 끄적거릴 수 있지만, 아무튼 게으른 법이 없다. 습관적으로 쓰면 일기처럼 고만고만한 것에서 맴돌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뜩 느낌이 충만해져 내면 깊숙이 처박힌 감성을 끄집어내고 만다. 아마 그것을 위해 수많은 작가가 글쓰기에 매진하는 것인지 모른다. 글이란 하늘에서 내린 재능으로 쓰는 게 아니다. 특별한 게 아니라 꾸준한 것에 가깝다. 그런 거라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 그런 것이 하나 둘 모여 제법 그럴싸한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함부로 포기하면 안 되겠지.



는 좋은 책 하나 출간하지 못했고 공들인 포스트조차 외면당하지만, 여전히 끄적거린다(그럴 수밖에 없다). 나의 글은 그들의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미치지 못한다. 딜레마는 과연 내가 글을 쓸만한 자격이 되고, 내 글이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한 동안 많은 좌절을 겪었다. 누군가 쓰레기 같다고 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무엇을 위한 거냐고 비아냥댔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어디까지나 타인의 시선과 그에 대한 변명이었다. 그렇다고, 글 쓰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쓰는 동안 적어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식대로 생각과 단어를 마구잡이로 끄집어낼 수 있어 좋다. 그 행위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그러니, 갖은 비난과 손가락질이 있더라도, 남들이 뭐라 하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 앞의 숙명이다. 내 방식대로. 멈춘 것보다 나으므로. 



 년간 끄적거리며 느낀 것은 작가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상태-작가로 머물러 있는-란 것이다. <작가의 시작>에도 언급되는 말이니 신빙성이 있다. 처음엔 작가라면 무조건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소설은 세상과 나의 교집합을 찾는 일이다. 관찰자인 작가가 세상이란 스펙트럼으로 자신의 내부에 통과한 것을 쭉쭉 밀어야 한다. 원심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엔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 말없이 표류하는 무의식이 비현실적인 꿈과 이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 자신과 소통하고 포용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래서, 외부의 평가보다 내면의 집중과 몰입에 치중하는 편이다. 고로 나의 힘은 구심력이다. 나를 자극하는 것은 책, 영화, 전시회 같은 대중문화다. 마음속에 파장이 일면, 그 접점을 풀어내고 싶다. 사유나 통찰로 뻗어갈 때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리뷰로 남긴다. 가끔씩 생활 속에 겪는 단상도 끄적거린다. 그동안은 내적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복되고 타성에 젖자 습관이 돼버린다. 읽고 쓰고 포스트에 올리고 하는 행위로는 뭔가 헛헛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나가려면 한 단계 올라설 필요를 느낀다. 



뷰나 일상 에세이를 쓰다 보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목적론이나, 소위 스타일이라고 하는 방법론에 봉착한다. 결국 평가밖에 남질 않는다. 그런 글은 스스로의 한계에 갇힌 셈이다. 원래 글 쓰는 목적은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함이다. 당위적 가치보다 숨은 의미를 찾고 싶다. 의미란 사람마다 다를 것이 고정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많이 생각하고 이해할수록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깊어진다. 그 행위가 즐거운 일이다. 그런 하나가 여럿이 모일 때 진가가 발휘된다. 어떤 것의 날실이 되어 또 다른 씨실과의 교차점을 허용한다. 그러니, 단순히 리뷰를 쓰지 말고 머리 속에 남은 단상으로 풀어보자. 유사한 키워드에 맞춰 몇 가지를 묶어 본다면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자유로운 생각의 나열과 그 연결성이 꼬리물기를 하듯 수십 개의 글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썼던 것에서 한 단계만 올라가 보자. 그렇게 도달한 것이 리뷰 에세이다. 말 그대로 리뷰와 에세이의 합성어다. 넓은 의미로 전자가 후자 안에 속하겠지만, 나는 과감히 두 개를 붙여 버렸다. 왜냐하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앞으로 여기에 쓰는 글은 무언가를 보고 느낀 사유(리뷰)와 그 속의 의미를 자유로운 발상으로 연결(에세이)하는 것이다. 



를 들어, 이런 식이다. 나는 얼마 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를 봤다. 그것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다. 둘 사이에 시간적, 역사적인 공통점이나 메시지는 없다. 굳이 찾자면 분열된 자아에 관한 소재가 쓰였을 뿐이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전자의 날실은 후자의 씨실과 만나 새롭게 가지치기한다. 그러자, 생존이라는 처절한 빛이 다가왔다. 밝은 것이 아니라 희미한 자취를 찾아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행위, 그 치열함이 실존하기 위함이라면 도덕적 판단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그런 감수성을 찾아내는 것, 또한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단기적인 성과를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깊게 파헤쳐야 할 여정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나일 때 시답지 않을 수 있다. 그런 하나가 둘이 되고 모일수록 커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그것 은현 실적일 수도 있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언저리의 추상과 사유, 실제로 무의미할 수 있으나 곱씹으면 다른 의미로 파생된다. 그렇다면,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브런치>에 실으려는 리뷰 에세이는 그런 결을 따라가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의 모체는 그동안의 리뷰들이고, Vivian's Popular Culture lab.(http://blog.naver.com/toy83)와 밀접하다. 그것을 묶거나 새롭게 접하는 문물과 엮어 에세이처럼 쓸 계획이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 일지 알 수 없다. 단지 시도를 믿을 뿐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보면 뭐라도 만나거나 찾아내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꾸준히-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릴 것이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책으로 묶고 싶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그런 추진력이 작가 정신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아마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이도 저도 확신할 수 없다면 정답은 없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럼, 한번 믿어보시죠!



다음 글 ▶ 어둠 속, 생존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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