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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13. 2017

위장과 거짓말, 불안의 흔적

03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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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년 전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있었다. 예전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 덕분에 잃었던 기억과 마주한다. 낯선 이름, 직업, 삶의 전부였던 여인도 있었다. 그 모두를 잃었다는 것, 과거를 지운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그는 진짜가 아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가짜인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허전해서 무언가를 캐고 다닌다. 지난날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로, 본질은 하나다. 어떻게 해도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방점은 생존이란 이름의 위장이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그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의 삶을 살아간다.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육칠 십 년 전만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전·중반에 세계대전이 있었다. 그것이 끼친 영향력은 굳이 역사책을 펼치지 않더라도 문학에서 입증된다. 그 중 종종 등장하는 것이 위장이다. 어떤 목적이나 필요성에 따라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됐던 시대가 있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했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잡아야 그곳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체성을 잃어버린 인물들은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기나긴 이별>에서, 그들은 대체로 의뢰인이거나 피해자다. 그들이 감춰둔 진실은 지금과 전혀 다른, 예상치 못한 과거다. 전쟁 통에 살아남은 ‘아이린’은 본명과 국적을 숨긴 채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는다. 전쟁과 신뢰의 상처 속에서 방황했던 ‘테리’는 영국 군인, 재벌 사위, 멕시코 인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들은 마치 연극 무대 위의 배우처럼 살아간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가면 속에서 살기에 범죄에 대한 죄의식은 미약하다. 빈부와 약육강식은 일종의 불로소득이다. 불안정과 혼란의 틈을 악용할 매개체는 널렸다. 돈만 있다면 신분을 바꾸고 음주, 도박, 마약 등이 허용되는 상류층의 사교 행사에 접촉할 수 있다. 불미스러운 폭행, 살인 등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된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경찰, 언론, 공무원이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양상 속에서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도덕적 판단은 유명무실하다. 



의식에 대한 무감각은 비열하고 야비한 인성을 허용한다. 그러나, 동기는 본성이 아니라 생존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에 살아남는 것보다 최우선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장은 수단이 된다. 문제는 정체성을 숨긴 대가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아이린’은 정신병으로 약에 의지했고, ‘테리’는 가식적인 삶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돈 앞에서 양심을 팔고 전쟁 앞에서 본성을 잃는다. 위장에 대한 죄의식을 부정할지라도 해소할 수 없는 공허함 속에 갇힌다. 결국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자 피해자이자 위장 잠입자로 남을 뿐이다.



장은 자아와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생존과 정체성은 필연적 관계가 아니다. 즉,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는 모순이다. 오히려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들처럼, 자신의 존재성을 확신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가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등장하는 쌍둥이다. 그들은 2차 대전의 여파로 엉망인 마을과, 빈곤하고 부도덕한 사람들과, 군인과 어른들에게 농락당하거나 방치된 아이들과 함께 있다. 전쟁은 인성과 관습과 체제를 무너트렸다. 따뜻한 화덕에 앉아 빵을 먹고 있는 순간, 길 옆에서 피난민 아이는 무자비하게 끌려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 대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국경을 넘었던 쌍둥이들 중 한 명이 성공했고, 나머지는 남는다. 후자는 마치 한 몸으로 태어나 억지로 분리시킨 샴쌍둥이처럼 불안정하다. 처음부터 혼자인 외로움과, 이 기막히고 잔혹한 세상 속에 남겨졌다는 허무로 이어진다. 사실 그 넋두리는 모두 거짓말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이란 제목처럼, 세 가지 거짓말이 등장한다. 



째, 쌍둥이는 전쟁의 폐허가 된 마을에 함께 살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어떤 사건으로 홀로 재활원에 맡겨졌고, K시의 할머니 집에 옮겨진다. 낯선 사람과 국경을 넘어 타국에 도착해 형제의 이름인 ‘루카스(Lucas)’로 살게 된다. 심장병으로 죽음이 임박해지자, 폭격 속에서 살아난 거짓말 같은 생존과 한 순간도 잊을 수없었던 쌍둥이 형제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떠올린다. 그러나, 둘째, 홀로 남겨진 이야기는 망상 혹은 허구다. 그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허상의 형제를 부활시키지만, 전자와 후자 모두 자신이다. 후자를 그리워하는 꿈은 거짓과 허무의 굴레 속에 쳇바퀴 돈다. 자신이 만든 신기루 속에서 공허한 불안으로 정체된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이유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실체로 귀결된다. 꿈처럼 떠오르는 초록색 문이 달린 집에 어떤 진실이 숨겨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번째 거짓말은 나머지 쌍둥이 형제인 ‘클라우스(Claus)’의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 힘겹다. 그것을 함구함으로써 모든 원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의 삶은 남은 가족에 대한 의무이자 체념이다. 그것의 원흉인 반쪽 형제 ‘루카스’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는 후자를 부정함으로써 그의 삶을 역설과 무로 공중분해시킨다. 이로써, 쌍둥이는 대척점에 놓인다. 전자는 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후자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공허하다. 전자는 거부하기에 냉소적이고, 후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거짓말을 한다. 고독하거나 외롭다. 그들을 통해, 작가는 정체성을 가격하는 소용돌이를 주목한다. 믿을 수 없고 알지 못하는 진실 앞에 그들은 거짓을 선택한다. 그것이 되풀이될수록 참과 멀어진다. 과연 쌍둥이는 있었을까? 존재에 대한 부정은 불안이다. 불안은 개인과 세상 속의 깊숙이 머물렀다가 어느 계기를 통해 뚫고 현실이 된다. 실존과 구조, 도덕과 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딜레마에 빠트리면서 삶을 위협한다.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자는 살아남기 위해 허망한 꿈을 꾸고, 반대인 자는 지키기 위해 배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지 않는다. 



들은 살아남으려고 위장과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기나긴 이별>의 인물은 괴물이 되었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쌍둥이는 외롭거나 고독했다. 살기 위해 진실을 숨겼거나 알지 못하는 것은 결국 위안이 되지 못한다. 정체성과 가면이란 이중적인 틈새에 불안의 싹이 움튼다. 위장이나 거짓말은 진짜가 아니므로 한시적인 속성을 내재한 상태다. 그러므로, 불안의 일종이다. 그 속에서 자아 부정, 자기 소외, 자기합리화, 윤리적 무관심으로 공허해진다. 채울 수 없고 극복될 수 없는 절망으로 스스로를 포기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안도해도 그런 류의 공허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죄의식과 헛헛한 불안은 그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인지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불안 혹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깨닫는다. IS테러나 북한의 핵실험 같은 위협이 터질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폴 틸리히’의 말처럼, 불안의 본질은 자신을 부정하는-혹은 그렇게 될지 모를- 실존적 의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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