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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23. 2017

편견의 위협, 그것을 넘기까지

04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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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부정해야 하기에 생성되는 불안은 가면이나 위장 속에 숨긴다. 왜 그랬나의 의문은 <기나긴 이별>이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처럼, 사회나 시대를 탓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불안은 사회적인 것에서 기인된다. 시대가 뒤숭숭하고 누군가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속고 속이며 살아간다. 정치는 국민을 속이고, 회사는 잉여가치로 착취하며, 언론은 일부의 진실을 은폐한다. 그런 세상에서 나이를 먹는 것은 점점 의심증이란 차편을 얻어 타는 것이다. 



끔씩, 근엄함을 벗어던진 아버지가 ‘얘, 나는 아직도 세상이 참 무섭단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 말은 가장 두려운 존재가 사람이란 내 생각에 힘을 보탠 셈이다. 나는 종종 사람과 기준에 치여 고민하곤 했다. 아무 뜻 없이 내뱉는 말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반응이 무서웠다. 처음에는 내가 이기적이고 남을 헤아릴 줄 모르기에 당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문제라고 찍어버리니, 오히려 모든 것을 맞춰야 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껌도, 아끼는 공책도, 누군가 원한다면 선뜻 내주었다. 그런다고 결정적일 때 내 편이지 않았다. 생일파티 때 나만 쏙 빠지고, 어제까지 시시덕거리며 놀았던 친구가 다음 날 갑자기 쌩하며 따돌리기도 했다. 배려, 양보라는 게 필요하다지만 언제나 옳지만 않았다. 



창 시절 ‘심리학개론’을듣기도 했지만 한 분야를 겉핥기 식으로 본다고 알 수 없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식 혹은 논리에 대한 철학과, 개별적인 내면을 파헤치는 심리학과, 그 사이의 상징을 가늠하는 기호학 등을 상호 연결해서 검토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히 프롬’이나 ‘C.G. 융’, ‘알프레드 아들러’의 책은 사회적인 환경이 개인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심도 있게 파고든다. 그들이 말하는 성격은 사회적인 정체성과 개인 본성의 결합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에 치중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비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격은 한 마디로 정형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내면 깊숙이 박힌 취약점이나 환경적 위협 요소까지 간파할 수 없으니까. 



인의 성격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은 사회적이라는 변수에 민감하다. 내가 타인의 반응에 예민해진 것도 알고 보면 갖가지의 자극과 관련 깊다. 간간이 어떤 형태로든 삶에 등장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어떤 강박관념을 경험하고 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정보공유 차원에서 모여야 할 일이 생겼다. 그것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학원 다니느라 바쁜 애들을 놀리는 것도 엄마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서관 봉사 혹은 녹색 어머니처럼 학교 행사에 참여할 일이 많기 때문에 얼굴 익히는 차원에서 되도록 참석하는 편이 낫다. 나는 늦은 결혼을 한 터라 내심 걱정했지만 그렇다고 대부분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티가 날까 혹은 아이가 의기소침해질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른 모임처럼 언니, 동생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일부러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겉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친구나 남편조차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보다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무엇이 의기소침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남들과 달리 가장 연장자인 상황이다. 그것도 소수로서.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못하고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속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를 가진 엄마의 평균 나이에 관한 일반론이 있다.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되면 손해 보거나 소외될 것이라 여기게 만든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라면 둔감한 편이라도 그렇게 된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클로드 M. 스틸’는 그것을 정체성 비상사태로 부른다. 그의 책 <고정관념은 세상을 어떻게 위협하는가>에 따르면, 소수자로 처하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삶의 조건이나 기준을 부과함으로써 동일하기 위해 상호 주관성(상식)을 따지기 때문이다. 



것은 편견이 된다. 편견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에 의해서 낙인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영향을 받은 자아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런 상황을 부담스러워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성격이 변하고 자신감이나 의욕을 낮춰 잠재력 조차 억누른다. 자신에 대한 악평까지 내면화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실험한 사례가 제법 등장한다. 그는 편견이 능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기 위해, IVY리그에서 소수인종의 낮은 성과에 주목한다. 그것은 다수의 백인 학생이 장악한 캠퍼스 생활과 문화에서 생긴 구조적 문제란 가설에서 출발한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백인과 흑인에게 언어추리 시험을 보게 하고 지적 능력이 아닌 일반적인 문제 해결 평가라고 말한다. 즉, 지능에 관한 부정적인 낙인에서 풀어주니, 흑인 학생들도 백인만큼 높은 성적을 낸다. 또, ‘미시간대학교’에서는 수학 성적이 좋은 남녀 학생에게 시험을 치루되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더 잘한다는 편견에 대해 실험한다. 그중 절반의 여성에겐 성별에 따른 결과 차이를 설명했고, 나머지는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전자는 남학생들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반면, 후자는 비슷한 점수를 받는다.



인 학생이나 수학 시험을 치른 여학생은 백인이 월등하다거나, 남학생이 수학 문제를 더 잘 푼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을 풀어주자, 그들 사이에 능력 차가 없어졌다. 결국 그들은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정체성 비상사태에 처해있었을 뿐이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본성이 아닌 지극히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상식이라는 구분을 만들고 안팎으로 어디에 있느냐를 끊임없이 가늠한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성과나 역량으로 압박한다. 지나치게 따지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융통성 없고 비효율적인 전략을 고수하게 한다. 앞의 실험에서 알 수 있지만, 상식이란 주관적인 기준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접근으로 충분히 자기 페이스를 찾을 수 있는 별거 아닌 것이다. 



런 위협은 단지 특정 부류의 문제만이 아니다. 또 다른 실험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학 수업을 들은 백인 학생이나, 아시아계 학생들과 수학 시험을 풀게 된 백인 남학생이나, 청년과 암기력 테스트에 도전하는 노인에서도 나타난다. 다수의 흑인과 아시아 학생들로부터 소수의 백인이라는 처지, 젊은 피에 둘러싸인 노인이라는 불리함. 위협은 그렇게 만드는 악의 없는 신호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소수라는 약점으로 의기소침하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상사태일 수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확보하면 된다. 학교나 직장 등 어떤 환경에서 소수자의 수가 충분해져 더 이상 소수자라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지점을 임계 지량이라고 한다. 대법원의 유일한 여성 판사였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 위협을 느꼈지만, 또 다른 여성이 판사로 임명되자 압박감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도 처음에는 임계 질량에 의지하려고 비슷한 또래를 찾기도 했었다. 그랬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겠지. 오히려 젊은 엄마들 틈에서 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대충하고 나가서 ‘어디 아프냐’는 소리라도 듣는 날이면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 평상시에도 가벼운 화장과 경쾌한 복장을 고수한다. 그런다고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저했지만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의 해답은 결국 긍정이었다. 장애요인을 해소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될 매개(중재)를 찾는 것이다. 적절한 조언자에게 격려를 받거나,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을 이해할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저자 역시 소중한 자아상을 이해할 때 분명한 목표의식을 이끌어낸다고 못 박는다. 쉽게 말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인지하고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자극적인 세상과 휩쓸리는 자신 사이에서 중심 정도 잡을 비기(秘器)쯤 있어야 한다. 



'락 오바마'는 다인종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고찰함으로써 자아감, 통찰력, 공감 능력, 유대감을 이끌어내 다양성의 사회에서 난관을 헤쳐나갈 지혜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거기서 실마리를 얻자면, 처해있는 환경에서 최대한 긍정적 견해를 이끌어 소속감과 성취감 높여야 한다. 그래서, 내가 찾은 것은 젊게 살려고 노력하는 엄마란 것이다. 비록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가끔씩 팩도 하고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다. 어쩔 수 없이 정체성이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지 않다. 어제의 딸이, 현재 아이들의 엄마로 살지 않나. 사회나 여건에 따라 달라지고, 성숙의 크기만큼 변한다. 위협이나 비상사태 같은 문제는 넘어야 할 산처럼 언제나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나 인식을 통해 넘어가면 또 한 단계 성장한다. 극복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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