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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31. 2017

내면의 빙산, 무의식의 정체

05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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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념은 세상을 어떻게 위협하는가>에서 말하는 정체성 비상사태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그로써 수식어를 얻는다. 누구의 자식 혹은 부모, 어떤 조직의 무엇, 어느 출신 등. 그렇다고 내 전부를 대변하지 않는다. 정체성은 오랜 숙원 같은 꿈과 이상, 머리 속에 넘쳐나는 기묘한 이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가끔씩 출몰하는 무의식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기도 한다. 세상의 끝과 같은 오지의 황무지를 정처 없이 헤매고 쫓기다가 벼랑 끝에 도달하고 어쩌다 솟아난 무모한 용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험난 세상을 이성의 힘으로 꾹꾹 눌러왔지만 결국 그것에 도약하려는-영화 <어쌔신 크리드>에서 기존 체제에 반하는 암살자의 신념 같은- 반항이 내재돼 있는지 모른다. 



는 가끔씩 내 안에 꽉 들어찬 빙산의 일각을 발견한다.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거칠다. 일이 안 풀리고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충돌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이 나이 먹도록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미지의 욕망과 어떤 의미 부여를 위해 꽤 오랫동안 고심했었다. 이처럼, 자신을 알기 위한 의지와 조종하는 힘을 ‘자크 라캉(이하 ‘라캉’)’은 주체라고 말한다(<에크리> 참고). 또, 주체의 연쇄성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욕구를 시니피앙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A를 만난다.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진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낸다. 관계, 조건, 취향, 외모, 환경 등. 절반 이상이 나와 유사했기에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맞는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다. 운명인가? 그렇다. 사랑도 운명이다. 비로소 영혼의 단짝을 만났다고 말한다.



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 없이 되풀이된 사랑일지라도,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사전적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유함으로 존재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주체로 시니피앙 하려는 의지이다. 그렇지 않으면 타자의 욕망에 휩쓸린다. 앞에서 언급한 정체성 비상사태에 휘말리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마치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따르다가 울컥 반발하게 된다. 그렇다고 수많은 규칙 앞에서 내 전부를 맞출 순 없다. 그것에 반하는 의지나 타협할 수 없는 접점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면의 빙산을 자각하는 과정이고, 구체화하려고 자신만의 언어나 이미지를 찾는 것이다. 다만, 그 의지가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은유를 찾으려는 의식적 요구인지, 아니면 무의식에 귀의하려는 욕구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면의 빙산을 만난다는 것은 현실 속의 나와 내면과 부딪친 나 사이에는 분리 불안이 있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사랑도 기존에 존재하는 언어(시니피앙)로 자기만의 정의를 찾은 격이지, 개인적 욕망(무의식)을 사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어떤 언어와도 적합지 않은 내면이 어긋나고 만다. 생각대로 정리되지 않기에 공허함에 시달린다.



면의 빙산은 현실에서의 정체성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욕망을 응시하는 것이다. 속세와 타협하지 않은 자신만의 욕망을 사유하는 자아는 가능한가? 애석하게도, ‘라캉’은 그것을 부정한다.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아이가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과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표현되는 그것은 주체로서의 강력한 상징인 아버지의 남근-현실적인 성인으로 완성된 상태, 부성 은유-에 도달함으로써 주체로 완성된다. 주체는 현실적인 개념으로 타인과 맞서 꿀리지 않는 대등한 상태를 말한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당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현실에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인지하려고 애쓴다. 내면의 상상 속에 비춘 거울을 통해 이상적인 자아를 꿈꾼다. 그 역시 저절로 생성된 것이 아니다. 주체 분열의 또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를 의식한 성공한 모습으로 자아를 비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나르시시즘 속에서의 도취 상태다. 단지 현실 속에서 주체로서 성립되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에 머물 뿐이다. 즉, 자아는 타자화된 주체의 이름이다.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렇다면, 내면의 빙산은 자아가 비추는 욕망의 거울이란 말인가? 뭔가 동의할 수 없다. 이상적인 자아의 이미지를 대입해도, 수많은 현실의 언어로 설명해봐도, 아닌 것 같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그렇게 무의미한 존재였던가? 어쩌면, 무엇으로 대체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상태인지 모른다.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한 번도 언급된 적 없기에 그 흔한 무언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을 위해 부성 은유에 골몰한 나머지 충만한 감정을 해소할만한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결과다. 그럼에도, 다사다난한 삶을 표현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근원적인 자기애와 희로애락을 도달하려는 의지는 여전히 꿈틀댄다. 그것이 나를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미지의 무의식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감수성의 근원인 모성의 부표-부성 은유에 도달하느라 결여된 본능-를 만날지 모른다. 현실 속 남근과 달리, 어머니는 자신을 잉태한 근원이자 모체이다. 서로 분리됨으로써 귀의하는 법을 잃는다. 동전의 앞과 뒤처럼 모두 갖기란 어려운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얼마나 양면적이고 극단적인가? 결여된 모체에 충족하려는 욕망은 현실 안에서 찾기 어렵다. 현실이란 상징계는 끊임없이 주체의 완성형인 남근에 집착한다. 그렇다고 터져 나온 삐딱한 가시 같은 상상계의 이상적인 자아도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그 밖에 있다. 상징화에서 벗어난 영역, 반복의 근원이자 현실을 뚫고 낯선 대상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영원히 잃어버린 상실된 대상에 대한 갈망이 답답한 가슴을 두드린다.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꿈으로, 전혀 실현 불가능한 공상으로, 허망하고 애처로운 기대감으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쾌락으로, 감정의 기복이 극단적인 병리학적 증상으로. 



때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로 의심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헛헛한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를 비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민감하고 섬세한 자라면 여러 번 겪었을 성장통이다. 나는 그것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내 꿈은 내면의 모체를 이끌어내 부성 은유로 가득한 현실에서 새로운 시니피앙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라캉’은 잃어버린 모체를 되찾으려는 갈망이나 그런 나머지 지금껏 보지 못한 존엄성을 부여하는 충동을 승화라고 말한다. 승화는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재생산하는 창조적 파괴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공백(無化)의 욕망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의미가 사라진 일순간의 영롱한 기포 상태였다가 사라지는 환각적인 아름다움일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하려는 의지는 주체가 되려는 것과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다. 한 번도 발현되지 못한 새로운 은유로 꽃 피우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또 다른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수많은 예술가가 밤을 지새우며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무엇이 되려는 목표 대신, 차라리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모습 자체를 인정했었더라면.  



동안 자책하고 있었다. 운과 자질과 환경을 탓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면의 빙산은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음표는 점점 느낌표로 바뀌어간다. 느껴라. 생각해라. 그리고, 써라(혹은 표현해라). 이 모든 과정은 그것에 닿기 위한 디딤돌이었는가?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자기 긍정을 끌어냄으로써 존재 속에 결여된 절망을 인식하고 극복한다고 말한다. 자기 긍정은 패배의식에 휘둘리는 대신 끊임없이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실패나 어려움도 삶에서 겪는 사건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다 보면 별거 아니게 된다. 잃어버린 감정과 원초적 욕망을 인정하고 끌어안는다는 공간적인 은유로, 끝없이 돌을 밀어 올렸던 했던 ‘시시포스’처럼 부조리에 대응해 한계를 극복하려는 힘이 된다. 누군가의 무엇이란 일시적인 정체성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면의 빙산은 미려한 유혹으로 영겁의 시행착오를 부추겼는지 모른다. 




피레네의 성(르네 마그리트,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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