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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n 08. 2017

무의식의 소용돌이

06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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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중 자유 시간은 언제일까? 내 경우는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다. 숨소리만이 고즈넉한 공기를 가로지르면 비로소 해방이다. 핸드폰을 꺼내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세상살이를 들춰보고 내일의 일과를 점검한다. 혹은, 쓰다 만 글의 마무리나 앞으로 써나 갈 글감에 집중한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한탄스러운 감탄사를 남발하기도 한다. ‘말이 안 되잖아’ 혹은 ‘난 역시 아닌가 봐’ 등. 그렇게 해야 다음날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뜯는 일이 없다. 



타게 기다렸던 한밤의 자유는 낮에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서성이는 것이다. 영감은 하나의 완성품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간과했던 어떤 것에 접속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잠재된 무의식과 만난다. 한편에선 헛헛하고 무의미함을 발견하고 만다. 가끔씩 ‘지금 행복한가?’ 혹은 ‘무엇이 두려운가?’ 란 의문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락 속으로 끌어내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르는 심연 속으로 빠진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낯선 환상과 갈망이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공상과 낙서로, 어떤 이에게는 음악이나 그림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시와 소설이 될 것이다. 하루에 수십 편씩 올라오는 <브런치>의 글 중 상당수가 그것에 골몰하는 증거 아닐는지. ‘라캉’이 <에크리>에서 언급했던, 현실적인 성인의 모습(남근)을 위해 포기했던 본연의 욕망(모체)을 되찾으려는 승화는 무언가로 표현하고 완성하기 위한 예술적 실험으로 나타난다. 잃어버린 감정과 원초적 욕망을 인정하고 끌어안는다는 공간적인 은유로, 끝없이 돌을 밀어 올렸던 했던 ‘시시포스’처럼 부조리에 대응해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떤 이는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과 정신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이중적 삶을 산다.‘페르난두 페소아(이하 ‘페소아’)’의 <불안의 서>에 등장하는 ‘소아레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운명이 그에게 준 것은 성실함과 꿈꾸는 능력이다. 먹고 살기 위해 회계장부를 뒤적거리면서도 그런 삶에 반발심을 멈출 수 없다. 행복, 돈, 안정, 사랑처럼 세상사가 서로 얽히고 종속적이므로 혼돈과 균열이 내재된 상태다. 아무리 근면해도 누군가는 불행하고 그와 달리 태생적으로 다복한 이도 있다. 정의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림자처럼 도사린 모호함이 존재한다. 모두가 지향하는 절대적인 행복을 믿을 수 없다. 불완전하여 불안하다. 현실이란 사고 능력의 부재, 도덕심의 부재, 과잉 흥분 상태다. 그는 그것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럴수록 내면 깊이 꿈틀대는 기운을 감지한다. 왜 내면과 괴리가 느껴지는 세상을 맞춰 살아야 하는가? ‘내가 세상과 공존해야 한다고는 한 번도 분명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p205) 차라리 여행자처럼 낯설게 바라보며 스스로의 감각에 의지하는 게 어떨는지. 무의식의 환영이 출몰한 채로 잠 못 드는 밤이나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고독을 탐닉해보자.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느낌이다. 한 줄기 선선한 미풍처럼 다가온 것을 놓치지 않고 감성의 언어로 채워보자. 유일한 색채를 발견할수록 기쁨에 다가갈 것이다. 또, 어떤 날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 허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내일의 태양을 뜰 테니까. 



분법의 태도는 스스로 부조리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한마디로 반항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평범치 않은 상념과 위태로운 영혼에 대해 데카당(décadent)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느낌을 낯선 언어로 표출한 슬픈 광채가 난해하고 퇴폐적이라는 것이다. 가치나 체계의 역설에 대해 과민하게 섬세한 어조로 자근거린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불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진심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정체성을 위협하는 편견의 허실과 현대인이 찬양해 마지않는 속물성에 대한 권태로움이다. 현실 밖에서 관망하듯 바라봄으로써 불편한 관념 안의 방치된 모호함을 파헤치려 한다. 싫증이 아니라 혼돈의 공존을 이해하는 냉정한 응시다. 예를 들어, 불안이란 발생하지도 않는 미심쩍음과 같은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말한다. 체념이란 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해방이란 미학적 의미를 가진다.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으로 법석을 떠는 세상과 나만의 침울함, 기운 빠진 내 침묵 사이의 불균형이다.’ (p684) 



아였던 그는 고독과 소외를 통해 세상의 불균형을 터득했던 것이다. 삶이 위태로울수록 도리어 나는 누군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파고들수록 알지 못하는 무의식 영역으로 진입한다. 한 번도 캐낸 적 없는 내면의 원석과 마주친다. 현실의 잣대로 그것을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마치 미지의 생명체와 조우하는 것처럼 거리감으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삶을 미학적인 대상으로 관조하는 것뿐이다.’(p24) 그는 그 느낌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이성적으로 의식하고 감각의 레이더로 감성으로 차곡차곡 쌓는다. 스스로에게 이방인이란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외연과 내면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마치 여러 명의 배우가 여러 편의 연극을 동시에 공연하는 것처럼 자유롭다. 탁월한 일꾼인 회계사이고 고독의 운명을 받아들인 독신남이며, 비의 소리나 굵기의 다른 질감을 눈치채는 미학자이자 영생의 운명과 사랑을 기다리는 로맨티시스트, 평생 동안 신비주의자의 책 한 권을 탐독하는 외곬 독서광인 인격체들이 떠돌아다닌다. 저자인 ‘페소아’가 여러 작품을 여러 이명으로 썼던 것처럼 스스로 추구했던 다중적 인격성과 맞물린다. 마치 육체로부터 이탈해 유영하는 영혼처럼. 



는 스스로 예술이자 작품이길 원한다. 그의 예술은 매혹이 아니라 일탈이다. 삶으로부터 빠져나와 소유되지 않고 내면에 안착하는 것, 아스라한 감성에 다가가기 위해 지치지 않고 느끼는 것, 아무도 모르는 곳에 누구도 본 적 없는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것이다. 그것은 ‘오르떼가 이 가세트’가 <예술의 비인간화>에서 말한, 인간의 삶에서 멀어진 비인간적인 예술과 일맥상통한다. 예술이 관념을 비 인위적인 방식으로 일탈한다면, 그것을 다양하게 확장시켜 무의식의 인간과 미확인된 세상의 진실을 발현하게 된다. 삶을 복제하고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체로부터 일말의 연결고리를 가진 채 인공적인 것을 배제한 채 뻗어나간 탈인간적인 행위다. 자기 확신을 성실히 도모한 자에게 진리란 도달이 아닌 깨달음으로 증식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실타래처럼 풀어냄으로써 소유와 욕망이 가득한 인생이란 덧없다고 말한다. ‘페소아’의 꿈과 무의식은 순수한 예술을 꿈꾸는, 현실에서 이탈된 유일무이한 사실 없는 자서전이다.



자는 알지 못하는 영역 속에 숨어버린 자신의 비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에 닿기 위한 깨달음과 인고의 과정 속에서 무엇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즉, 무의식이 발현하는 시공간을 허용할수록 예술로 나간다. 당신도 스스로를 엄습하는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상태로 나타나고 어떻게 복기되는지를 따라가 보자. 잠자기 전이거나,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서 일상을 잊게 하는 멍한 상태이거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자연의 울림 속일 수 있다. 혹은 인파에 끼여 땀내 진동하는 만원 버스 안에서나, 새벽녘 첫 기차 속의 서글픔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세상과 단절되는 지점을 흘리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일상이나 타인이 정의하지 못한 정념을 자의화 해 내는 것이다. 누군가 가본 적도 닿지도 않은 흰 눈밭에 자신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새기듯. 머리 속에 스쳤던 단상과 재기 발랄한 형상을 모두 쓸어 담아 끄적거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어도 불안하지 말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無)의 존재성이 아니라, 어떤 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빈자리를 사유할 뿐이니. 자신의 영혼과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광산 속에서 보석을 캐 듯 파헤쳐보자. 그곳에 진실의 문과 창문을 내고 집을 지으며 정원을 가꿔라. 설사 예술이란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것일지라도, 내면이란 대지 위에 아기자기한 꽃과 열매로 채워질 것이다. 무의식의 자양분이 세상을 뚫고 퍼져나가 긍정의 빛을 현실 속에 뿌려줄 것이다. 예술에 이르는 과정은 영혼의 소우주를 쉼 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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