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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n 14. 2017

욕망의 해방구

07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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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친구가 중간고사 후 채점된 시험지를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각자 무엇이 틀렸는지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폭탄 맞은 점수 하나가 눈에 밟혔다. 망설임 끝에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그녀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도대체 무엇이 궁금했을까? 설마 잘 틀리는 문제를 따져보려고? 아니면, 점수나 평균? 일단 무시하기로 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영 찜찜했다. 일그러진 미간과 대조적으로 오묘한 미소, 어떤 꿍꿍이를 숨기려는 듯 앙다문 입매. 나는 애매모호한 뉘앙스를 알아챌 정도로 눈치가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석연치 않고 껄끄러웠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잡는 것 같았다. 의문과 호기심보다는, 낯설었던 것이다.



 혼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포커페이스로 속였던 거란 확신조차 없다. 다만 어떤 껄끄러움을 감지했을 뿐이다. 인간은 신체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이질적인 감각이 있다. 육감이 뛰어난 사람을 흔히 예민하다고 말한다. 까다로운 게 아니라 뇌나 신경계의 처리하는 능력이 섬세해서 그렇단다. 그것은 가끔씩 꺼림칙한 뭔가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예전에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분명 파란 불이라 내디뎠지만 순간적으로 차가 내 발을 짓밟을 거라 생각했다. 신기(神旗)였을까? 아마 나는 옆의 차가 정지선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것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 육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은밀하고 예민한 변이를 놓치지 않는다. 바닷속에 가려진 빙산 같은 무의식과 잠재적 욕망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흔들리고 깨지며 드러나게돼 있다. 평상시엔 얌전하고 말 잘 듣고 성실하다가도 갑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뛰쳐나와 뒤흔들 수 있다. 속내를 감추고 친구를 헷갈리게 할 수 있다. 혹은, 값비싼 명품을 멋지다고 말하면서 뒤론 비웃을지 모른다. 겉과 속이 다른 모양새, 표리 부동한 양면성은 누구나 어떤 형태든 보유하고 있다.



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서>의 저자)’는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가 느껴지는 세상에 의문했다. 자신의 부조리를 숨기지 않고 퇴폐적이고 우울하며 허무주의적인 글로 풀어냈다. 그런 편이 예민함을 억누르거나 험담으로 낭비하기보단 생산적일 거란 생각으로. 자신의 육감을 욕망의 해방구로 활용한 셈이다. 여과 없이 드러낸 욕망의 흔적을 문학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보들레르’ 산문 시집인 <파리의 우울>도 그중 하나다.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관통한 계층과 속물성, 극명하게 갈리는 삶과 죽음의 교차점을 우화와 사유로 냉철히 파고든다. 비렁뱅이에게 가짜 지폐를 건네는 남자,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도 더러운 아이가 가지고 노는 쥐까지 뺏으려는 부잣집 도령, 아들을 죽음에 몰고 간 가구까지 탐내는 모성 같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나보다 못한 이를 혹은 가난이란 이름의 면죄부를 죄책감 없이 이용한다. 만족할 줄 모르고 나와 상관없어 모른 척하거나 피한다. 그 속에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무기력함이 숨어 있다. 그의 육감은 그것을 간파했다. 그러니, 그의 욕망은 이중적 층위의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몽상가의 기질에서 솟아나는 비정상적인 도발로 맞대응한다. 신경 발작증을 유발하는 세상을 캐내고 맞서며 현실 비판을 위한 제물로 양산한다. 거침없이 그곳으로 화살과 총탄을 날리는 격이다. 훈계조는 아니지만 직설적이면서 고상함을 잃지 않는 고차원적인 반어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을 향한 비난을 알지 못한다.  



면,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은 번뇌와 혼돈 속에 놓여있다. 세상의 풍파를 겪어내고 오롯이 살아가는 과부, 보잘것없이 늙어 버렸으나 일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곡예사, 마음의 문을 닫고 모든 이를 수용하는 늙은 창부. 비록 모질고 비천하더라도 성실을 밑천 삼아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세상은 찌든 치부와 혼탁한 이율배반성이 관통하는 양지의 모순과, 인내와 노동의 소임을 다하는 음지의 최선이 얽혀있다. 마치 주인을 충실히 따르는 개처럼, 불쌍하고 처량한 대중이 체재와 패권에게 적선을 베푸는 꼴이다. 허우대 멀쩡한 사회는 곧 빈자가 짊어진 짐이란 우화다. ‘보들레르’는 희망과 악덕을 동시에 품은 도시를 거리의 창녀가 치유하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삶은 거대한 병원이란 은유다. 그렇다고, 세상을 계몽하려는 의지는 아니다. 오히려 고독과 해탈의 모습인 몽상가로서 좀 더 나은 삶과 인간다운 자유로 향한다. 평등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한 자이며,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욕망으로 읊조리는 시는 삶의 해방과 열망에 대한 심취이자 도취다.



망의 해방은 ‘롤랑 바르트(이하‘바르트’)’의 글에도 발견된다. <소소한 사건들>은 프랑스 남부와 ‘탕헤르’를 여행하면서 쓴 에세이다. 거침없는 ‘보들레르’와 달리, 그의 글은 현실과 다른 이면 혹은 반전, 우스꽝스러운 의외성, 안쓰러움과 애잔함이 서려있다. 순진한 것 같은 흑인 소년이 내뿜는 거친 담배 연기, 새하얀 옷 위에 떨어지는 비둘기 똥, 노점상 어린 소녀와 비열한 형사의 긴장감 넘치는 대조,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남자의 표리부동. 북아프리카 삶의 고단함, 빈부차, 인종에 대한 이중적 잣대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는 문화우월주의와 식민적 고단함의 대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의기양양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워서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들은 낙후되고 빈곤한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던 동성애나 매춘이 만연한 현실에 주눅 들지 않는다. 뻔뻔하고 도도하며 성실하다. 그런 삶을 특권의식이나 서구 문명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연민이나 동정 대신, 최대한 감정과 편견을 배제한 채로 물끄러미 관조할 수밖에 없다. 



치와 잣대에서 멀어져야 이질감에서 피어난 낭만적인 사색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나이트클럽에서 느껴지는 정취와 본능적으로 춤추는 혼연일체의 열기는 말 그대로 도취이자 감흥이다. 원색적이니 저질이니 평가하는 자체가 스타일이란 이름 속에 갇힌 예술의 허울이 아닐는지. 고급 혹은 대중의 경계를 의식하게 되지 않고 문화적 제약을 털어낼 때 해방감을 느낀다. 그는 내재된 욕망을 봉인 해제한다. 늙은 자신과 젊은 청년들과의 비교에서 터져 나오는 한탄과 아쉬움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시인한다. 동성애적 취향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불결하고 실망스럽나? 그의 솔직함은 뭔가 더 있어 보인다. 자신의 서사와 지위를 걷어내고 육감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바라보고 있다. 이질감을 거부하는 대신 포착함으로써 내밀한 욕망으로 드러낸다. 취향이나 근심에 대한 남다름을 썩이지 않고 욕망의 대상으로 끌어안는 이상적인 시도다. 자신의 취향과 어떤 가능성을 위한 도전이고 특유의 감수성으로 이어진다.



론 그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독자로서 그 텍스트에 대한 신뢰는 오직 ‘바르트’라는 이름뿐 이다. 그 때문에 그의 욕망을 색안경 대신 호기심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질적인 정서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야 따라갈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어도 낯섦을 관조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한편으론 그의 욕망처럼 우리의 그것을 해소하고 싶어 질 것이다. 어쩌면 유혹당한 건지 모른다. 끌림은 전이된다. 낯선 텍스트와, 욕망을 내보인 저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공감대를 넘어 또 다른 내러티브가 된다. 육감이 내면 속 숨겨진 무언가를 끄집어내려고 할 것이다. 즉, 어떤 자극과 의미가 자기장처럼 끌어당기는 주위로 감각과 무의식을 맡기고 싶어 질 것이다. 소소하게 빛나는 일상의 이면을 새롭게 마주함으로써 무심한 찰나가 빚어내는 섬광을 포착한다. 감수성으로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문학적 도전이다. 



들레르’와 ‘바르트’는 사회가 삶에 미치는 이중적인 잣대나 시선과, 그것으로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이었던 욕망을 거침없이 발설한다. 낙서처럼 감정의 배설로 끝나지 않고 깊숙이 곪은 외면의 폐부와 내면의 생채기를 터트린다. 두려움으로 낭비하지 않고 감성적 오솔길로 나갔다. 허무와 허망 속에서 촌철살인을 날리고 기존과의 연결고리를 늘리거나 새로운 트랙으로 튕겨나가는 환유와 은유의 상징계로 나간다. 또, 일상을 스냅사진처럼 찍어가며 지난날과 조금씩 달라지는 현재의 틈새를 밝혀낸다. 어둡고 가려진 생이 프리즘을 통과해 새로운 색채로 채워진다. 욕망은 그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려는 몸짓으로 예술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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