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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n 21. 2017

그들의 데카당

08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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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의식의 이면이다. 현실의 껄끄러움과 불안에 걸려서 튕겨 나온다. 육감이란 세밀한 감각을 동원해 헤쳐지고 다듬어진다. 민들레 홀씨 마냥 떠돌고 꽃 피우길 고대했던 욕망이 조금씩 드러난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인 욕구다. 육감으로 감지하거나 자극을 받아야 분출된다. 그렇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될지 모른다. 그런 불안감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도 있다. 흔히 툴툴대는 사람을 욕구불만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과 욕망의 괴리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남들이 보지 못한 꺼림칙함을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것이다. 개선의 의지는 둘째 치고라도. 



들 보기에 불편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옳고 그른가의 가치 판단은 일단 접어두자. 차라리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보는 게 낫다. 욕구불만인 이는 대체로 순응하지 않는다. 뭔가 삐딱한 자세로 말 한마디 곱게 하는 법이 없다. 사춘기의 반항아 같기도 하고 극도로 냉소적이다. 예전에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던 분이 있었는데, 어찌나 까칠한지 말 끝마다 ‘세상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내뱉었다. 누구도 믿지 못할뿐더러 확신조차 못하니 불신 주의를 밀고 나간다. 세상과 삶을 견제하며 급기야 반대 방향으로 나가니 불응이고 저항이다. 반파시즘 세력인 레지스탕스처럼 개탄스러운 시대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현실의 불만을 드러내고 거역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다. 어떤 이는 절망과 좌절을 비아냥대거나 지나치게 탐미적이기도 하다. 데카당이 그렇다. 향락적인 모습만으로 단순히 퇴폐적이라 말할 수 없다. ‘페소아’처럼 양면적 부조리에 안주할 수 없는 이상을 지향하는 것도 데카당의 정신이다. ‘보들레르’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욕망으로 삶의 해방을 꿈꿨고, ‘바르트’가 예술적 제약에서 벗어나 내밀한 욕망에 솔직했던 것처럼. 



들의 끝자락쯤 ‘다자이 오사무(이하‘오사무’)’가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욕망을 발설한다는 측면에서 데카당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의 책 <인간실격>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공감과 관조 사이에서 꽤나 고심해야 한다. 끝까지 읽게 되는 건 우연적 나락과 필연적 타락을 오간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다. 저자인 관찰자가 그가 찍힌 사진 세 장을 설명한다. 괴상한 어린아이와, 이상한 미남과,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있다. 한 인물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철없는 꼬마는 믿었던 인물에게 불신을 경험하고 공포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은밀한 도피를 터득한다. 그것은 장난과 익살이다. 진지한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합법적 세계에서 책임회피로 지하 공산주의 운동에 빠진다. 잘생긴 얼굴과 괴팍한 취향으로 짓궂은 연애를 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도피의 술책으로 동반 자살시도를 했으나 자신만 살아남는다. 결국, 누구보다 찌든 얼굴로 삼류 만화가의 삶을 전전긍긍하면서 타산적이고 겉과 속이 다른 세상 속에서 좌절한다. 



린 시절부터 그릇된 환경 속에 노출되었으나 그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벌은 그들이 아니라 피해자인 자신에게 내려져 굴곡진 삶으로 걸어가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어도 서슴없이 타락과 범행의 길로 걸어간다. 죄가 드러나지 않으니 벌을 면한 채 살아남은 자가 된다. 홀로 되고 나서야 비로소 죄책감이 밀려온다. 자신이 저지른 치기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그 벌은 타인이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서로 반의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원죄적 허울 속에 갇힌 꼴이 된다. 농담처럼 시작된 도피는 세상과 삶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스스로 자격 미달인 인간 실격으로 명명하며 행복도 불행도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처를 숨기기 위해 조금은 강한 척 포장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눈치 보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이기적으로 변한다. 좌절과 나락을 감추고 타락의 욕망에 탐닉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사회의 이질감을 걷어차기 위한 불만과 불안이다. 한마디로 객기와 욕구불만에 불과하다. 자신의 무의식에 닿지 못하면서도 그 주위를 떠돈다고 착각한다. 다만, 모든 것을 겪고 난 이후의-세 번째 사진 이후의- 고백에서부터, 그것이 부질없는 환각 상태였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탓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찰이 시작되자, 이 이야기 속에 감춰진 진면목이 드러난다. 오히려 퇴폐적이고 삐딱한 부정성은 사회의 허위성과 그에 휘둘린 인간성에 대한 치밀한 묘사다. 솔직한 고백 속에서 그의 숨겨졌던 욕구가 드러난다. 그의 본심은 자신의 피해의식과 과오 속에서 껄끄러운 잣대를 폭로하는 것이다. 자신을 짓밟는 세상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 허세와 패권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본능을 무력화하는 사회적 요구와 잣대를 비웃고 경고한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p41)



면, ‘나쓰메 소세키(이하‘소세키’)’의 <도련님>은 ‘오사무’보다덜 극단적이다.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어디선가 봄직한 이들이다. 그만큼 세태 풍속에 가깝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세상이 있다. 주인공을 도련님이라고 칭하는 유모 ‘기요’가 있는 곳과, 그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박쥐 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원래 그는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다. 아버지와 형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녀석이라 하고, 처음 부임한 학교의 선생들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며, 제자들조차 기싸움을 벌인다. 보통의 인물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좌절하거나 회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받을지언정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은 모두가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성립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남이 사죄하거나 사과하는 것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사죄하는 것도 임시방편으로 사죄하는 것이고 용서하는 것도 임시방편으로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하다. 만약 진심으로 사죄하게 할 생각이라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된다.(p145)



절하게 타협하고 묻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그렇게 맞춰야 한다. 그는 그게 적성에 맞지 않다. 속물주의와 기회주의를 간파한 것이다. 순수하고 성실하면 오히려 업신여기고 이용당한다. 애인인 ‘마돈나’를 교감인 ‘붉은 셔츠’에게 뺏긴 후 고향을 등졌던 영어 교사 ‘끝물 호박’처럼. 차라리 자기 주관대로 밀고 가는 게 최선이다. 막무가내 같은 면은 한편으로 말썽꾸러기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선 올곧은 성품이다. 세상의 잣대라면 전자처럼 보겠지만, 진면목을 볼 줄 아는 ‘기요’의 시선에선 후자처럼 해석된다. 그에게 가해진 이중적인 잣대는 세상의 이치가 얼마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자의적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전자에 굴하지 않고 후자를 수용한 것은 삶의 이질성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 역설을 증명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 그래서,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호기로운 수학교사인 ‘고슴도치’와‘붉은 셔츠’와 그 일당의 은밀한 행각을 잡아내고 벌한다. 그 난잡한 속물성과 표리부동을 뒤로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기요’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항이니 데카당이란 말을 붙이는 게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구를 속물적인 세상에 타협하지 않았던 점은 일맥상통한다. 옳지 못한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자의적인 세상에 불응함으로써 굴복하지 않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나 형 혹은 ‘붉은 셔츠’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기요’를 저버릴 수 없다. 즉, 그의 욕구는 믿음이란 동력을 업고 내면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 비록 얻는 것이 없어도 마음 깊숙이 스스로 만족하면 그뿐이다. ‘기요’처럼 바르고 올바름을 지향하려는 자기 존중, 정의에 대한 존경심이 내재한다. 일종의 도덕성이다. 인간은 그것으로 내면의 자율성을 일깨워 바른 행위로 나간다. 신뢰와 양심이라는 씨앗으로 퍼진다. 



세키’가 속박과 허울에서 벗어나는 욕구를 믿음 속에서 찾았다. 도덕적 자정 작용으로 이어져 의지와 뚝심이 된다. 삐딱하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영웅처럼, 검은 속내를 숨긴 무리를 응징한다. 올바름을 갈망하는 데카당은 생물적 인과성과 자연적 필연성에서 벗어나 선한 의지와 자유를 꿈꾼다. 그와 반대로, ‘오사무’의 그것은 비도덕성으로 상처받은 영혼의 일탈과 파국을 보여준다. 즉, 거리낌 없이 무기력한 죄의식을 수용한 대가가 가져올 파국과 아이러니를 입증한다. 과감하게도 자신의 죄를 담보로 속박과 허울을 드러냄으로써 벌한다. 스스로 저항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데카당의 이름으로 불의를 심판대에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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