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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n 29. 2017

낙인들

09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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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히 나란 사람은, <인간 실격>이나 <도련님>과(科)가 아니다. 그런 상황도 없었거니와 그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용복’ 어린이가 무장공비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과연 그런 용기가 있을까? 오히려 화합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곤 했다. 이념이나 역사관에 문외한이라도 사는데 지장 없고 간과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오직 개인 사나 잘 챙기면 되는 행운아다. 그래서일까? 그런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괜히 이상적이거나 개념적으로 흐를 때가 있다. ‘반항해도 된다’, ‘정의로워야 한다’를 쉽게 읊는다.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



렇지만, 그런 이야기에 끌린다. 뭔가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믿는 구석을 담보로 한 호기심이다. 한편으론 제법 기회주의적이다. 여전히 뭔가 못 미더운 것이다. 삶이란 거친 물결이 없어도 찰싹찰싹 밀려드는 파도가 존재한다. 인류를 구렁텅이에 몰고 갈만큼 거시적이지 않아도 크고 작은 도랑을 누구나 건너야 한다. 가치관의 문제가 늘 걸리적거린다. 아직도 세상살이는 거칠고 인내를 시험한다. 어떤 우연성과 그 필연적 굴레로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든다. 시대나 역사처럼 큰 사건이 아니어도, 콩알탄처럼 뜬금없는 역공을 펼치므로 어리둥절한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려면 궁금증을 발휘하고 염탐하며 캐낼 수밖에 없다. 아마 문학만큼 좋은 정보원도 없을 것이다. 



런 류는 대체로 실존적이다. 삶의 인과관계를 구조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저변에 깔린 본성과 욕구, 감정을 파고든다. 우발적인 역습이 일상을 무너뜨리면서 서서히 인성까지 잠식한다. 전자는 어떤 식으로든 회복될 수 있지만, 후자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좌절을 경험한 자는 적어도 나락의 미궁을 안다. 심리적, 정신적 영향력은 적지 않다. 위협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자기긍정이 이미 상실된 상태다. 실제 세계에 대한 전체적 의심과 소유하지 못했다는 의심으로 발전해 소외되거나 자기 독단에 빠트린다. ‘폴 틸리히’는 그것을 공허와 무의미의 불안이라고 말한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세상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목적을 잃게 된다.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도피를 감행하려 들고 그것의 걸림돌을 해치우는데 죄책감을 갖지 못한다. 



시다 슈이치’ 소설 <악인>의 ‘유이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탓에 유달리 사랑에 집착한다. 애인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자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한테 버림받았지만 자신을 양육했던 외조부모에게 가장 노릇을 했던 청년이다. 단지 애인과 그녀의 내연남이 보인 괄시로부터 우발적인 범행을 저지른다. 여기엔 묘한 이분법이 숨어있다. 살인을 저지른 그는 죄인이지만, 실질적인 원인 제공자였던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됐다. 살인은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그렇게 몰고 간 악의는 죄가 아니다. 누구도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예의 없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직 죄질과 행동으로 판단한다. 고아라는, 호구라는, 살인자라는, 인질범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결국, 이 이야기는 누가 악인인가를 말하는 대신, 범죄의 결과론 속에서 인과 관계상 묵과된 지점을 주목한다. 흔히 결손 가정의 아이가 애정 결핍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범죄의 전형처럼 생각한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념이나 개인적 성격까지 불순하게 몰아버린다. 그러나, 그이면엔 가족, 애인,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있다.



론 ‘유이치’는 불안정하고 삐뚫어진 심리를 가졌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결핍에 대한 욕구 지향적 인물이었다. 태생적으로 터득한 공허한 불안으로 피해의식이 심했다. 환경이나 인격의 구조적 요소로 해결될 수 없는, 마치 화약고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신경과민적인 갈등과 번뇌였다. 그들이 그것을 건드리자 참지 못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어긋난 판단과 행동을 저질렀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위, 자기 긍정을 지키려는 자기합리화는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어떤 자극에 의해 잠자던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나갔다. 허무하고 무의미한 공포에 갇혀 떠돌 수밖에 없다. 그런 과오와 실수가 이기적인 본성과 만나 악의 가능성을 만든다. 누구나 그런 우연적 사건과 필연적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잣대와 맞물려 예측불허 해지니까.



<간실격>의 주인공이 불행을 일탈과 반발로 풀었다면, ‘유이치’는 방어기제 차원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전자가 저항의 욕구를 분출한 것이라면, 후자는 좌절했기에 그릇된 방식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악인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낙인 중 어떤 것도 그의 진면목이 아니다. 단지 자기 긍정과 도덕성을 잃어버린 외톨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찾고 싶었던 것만큼 사랑받고 싶었던. 그럼에도, 그의 죄는 부정될 수 없다. 오히려 살인자라는 평가보다는, 어떤 이유에서건 도덕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남은 생애는 좌절뿐이다. 진작 만났어야 할 그녀를 생애 마지막에 만난다. 다시 말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가장 가혹한 벌이다.



항의 이유는 소외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혹은 소외된 것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있다. ‘페터 한트케(이하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등장하는 ‘블로흐’다. 그는‘유이치’보다 더 우발적이고 과격하다. 아무 말도 없었는데 현장 감독의 눈빛만으로 자신이 해고됨을 감지한다. 어떤 정보 교류 없이 스스로 속단한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극장 매표소 직원이 무심코 던진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란 말에 덜컥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의 말을 지나치게 왜곡해서 받아들인 탓이다. 그는 불통이다.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잘못 이해한다. 항상 자신의 의도와 다르고 일치하지 않아 불안하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는 자기 안에 갇혀서 타인의 것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친목이나 의사결정을 힘과 상황의 논리로 행동할 것이다. 상사, 친구, 자식과의 대화가 다른 것처럼. 그는 일상조차 단절됐고 일방적이다. 그의 비정상과 우발성은 뭔가 석연치 않다.



유경쟁은 승리자 뒤에 낙오자를 만든다. 목표 지향적인 삶에 익숙해진다. 계획을 지키며 성과우선주의에 빠진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공만 집중하는 격이다. 그 와중에도 그것이 들어갈까 노심초사한 채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가 있다. 누가 보든 말든 간에 항시 준비 태세로 움직이고 선수들을 위해 대답 없는 외침을 한다. 발로 직접 뛰는 여타의 축구 선수와 달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 하므로 고독하다.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공-성공 혹은 좌절-을 기다리고 방어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기다리다 제풀에 꺾이거나 자칫 잘릴 경우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이미 자신의 의지로부터 멀어진 상태이므로 공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블로흐’의 돌발 행동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는 한때 유명한 골키퍼였지만 하루아침에 현장 노동자로 전락해 인생의 좌절을 맛본다.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찾아오자 불안감으로 이어졌고소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가 저지른 살인은 극단적이기는 하나 그 정도로 절박했음을 암시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 대부분 사회와 조직이라는 지푸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것이다. 



자는 성공과 좌절의 기로에 선 골키퍼의 숙명과 소통 불안에 시달리는 ‘블로호’를 통해, 소외감을 위장한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역설적으로 그린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그의 심리 상태와 사건의 전말을 생략하고 감정 이입할 요소를 배제한 채 거리감을 둔다. 오히려 독자는 그의 불안한 심리에 의지해 서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의 예측 불허한 행동으로부터 의사 불통을 간접 경험한다. 언어와 사고의 등식에 길들여진 우리로서, 그것에 어긋난 비정상적인 언어 행태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비로소 소통이나 언어도 형식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저자의 계략은 공감 대신 차이를 인정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겪는 소통 장애는 소외와 낙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어디서 튕겨올지 모를 공을 기다리는 골키퍼의 심리처럼 외롭고 탈진 상태이다. 



트케’는 스스로를 잃고 대화에서 차단된 인간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경고한다. 공허한 ‘유이치’나 소외된 ‘블로흐’처럼, 소통이 힘들면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발적인 행동으로 비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힐 수 있으며, 형식과 편견에 빠질수록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다.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인도주의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병들고 지치면 본인만 손해다. 그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성찰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굴레다. 바로 고독하고 소외된 현대인이라는 낙인 속에 내재된 메시지다. 단순히 소설이나 타인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누구나 처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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