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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l 07. 2017

도플갱어로의 도피

10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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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나 <악인>은 자칫하다간 공허하고 소외된 낙인에 빠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 늪을 피해 다니는 현대인이란 만성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릴 운명인 셈이다. 피로회복제나 영양제 광고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혹자는 그 고립된 피로를 위해 타자화된 자아를 되짚고 가려진 주체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살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 같은 비유나 회유로는 성찰은커녕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날지 모른다.



상으로부터의 압박과 피로를 벗어던지는 확실한 방법은 현재의 자신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의도치 않거나 우발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자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허구에선 가능하다. 문학은 창조적 자아를 허용한다. 창조적 자아는 자신을 산산조각을 내고 균열되면서 거듭된다. 또 다른 나 혹은 분열된 자아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야기는 <롤리타>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이하 ‘나보코프’)’의 작품에서 종종 출현된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작가의 예술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여권이다’란 문장 속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귀족 출신으로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혁명으로 타국을 떠돌았던 러시아 출신의 망명 작가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러시아, 귀족 출신, 망명에 대한 시니피앙(기표)이 따라다닌다. 한편으로는 몰락, 이방인이라는 시니피에(기의)와 연결되고 정체성이 떨어져 나간 유령성을 내포한다. 이 시니피앙이 중요한 이유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낯선 인물의 신세임을 은유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를 하나의 존재로 정착할 수 없고 지속적으로 갈라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대체로 그와 닮았다. 정확히 말해 분신이다.



의 작품인 <절망>은 주인공인 ‘게르만’이 자신과 닮은 ‘펠릭스’를 만남으로써 두 개의 자아를 형성한다. 전자는 그 사실에 놀라기커녕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어떻게든 그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 한다. 전자는 거울을 통해 후자의 모습을 종종 연상한다. 자신의 부모가 투영된 그의 부모를 떠올리며 어떻게 자랐을까 추측한다. 자신이 잠자리에 누운 모습을 보고 후자의 죽음을 상상한다. 꿈속에 후자를 등장시켜 가족과 친지를 조롱하기도 한다. 여기서 닮은꼴과 거울이란 외형이 전자의 자아 분열을 가중시키지만, 정작 그 사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닮음은 전자가 고집과 강요일 뿐이다. 그에게 윽박지르고 동의를 구하면서 난폭하거나 친절한 이중적 면모로 오락가락한다. 표면적으로 그의 심리는 자신의 확신에 대한 과대망상이거나 동질감을 갈구하는 애정결핍처럼 보인다.



기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전자가 보이는 후자에 대한 애착은 일종의 정략적 계획이다. 자신의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해있자 때마침 나타난 후자를 끌어들여 보험사기극을 벌 일 생각을 한다. 그가 연고지 없는 부랑자 신세이므로 사라져도 문제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 뿐만 아니다. 추가적으로 덧붙였다는 마지막 장에선, 지금까지 나열했던 일화가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반자전적 이야기이라고 밝혀진다. 맨 앞장에서 자신을 유능한 작가라고 언급했던 것과 연관된다. 사실 그는 부유한 귀족 태생이자 유능한 초콜릿 사업가가 아니라, 농민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소상공인이다. 결국 이야기는 무엇을 위한 조작이었나에 대한 진실 게임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르만’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이라는 표상이다. 그의 옷을 입고 죽은 ‘펠릭스’를 보며 누구도 그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똑같지 않은 제삼자를 자신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스스로도 체면을 건 셈인데, 범행을 위해 찍어놓은 여권 사진을 보면서도 자신과 닮았는지 갸우뚱하기 때문이다. 분신 살해를 통한 신분 세탁하려는 저의는 현실보다는 거울, 죽음과 같은 이면의 지점에서 떠올랐다. 현실 초월과 실재의 욕망이 투영된 카타르시스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주이상스가 잃어버린 대상을 무의식 속에 숨겨진 분열된 자아가 아닌 속물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결국 돈이라는 물질 만능에 대한 갈망으로 지금의 현실을 저버리고 더 나은 지점, 이를테면 부르주아지란 계급으로 향하고자 했던 이치에 맞닿는다. 분신은 숨겨진 자아의 이면이 아니라 다른 층위로 뛰어넘고자 한 계급적 욕망이 되고, 이중적 속임수-분신에 대한 강요와 분신으로 인생역전하려 했던 조작-였던 것이다. ‘게르만’은오히려 진짜를 잃어버린 어중간한 제삼의 존재로 전락한다. 그에게 분신은 삶의 변화를 꿈꾼 환상의 산물이자 그릇된 일탈이었다.



르만’이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분신이란 수단은 ‘나보코프’의 망명자란 운명을 거스르고 싶었던 욕망의 표출이다. 그럴 수 없는 절망과 좌절이 분신을 허용한 변곡점이 된다. 문학이나 허용할 수 있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지점이다. 현실에선 잘 다니던 회사에서 난데없이 잘리게 되거나 불의의 사고로 큰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지더라도 술 한잔에 비애감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 털어내야 한다. 그에 비한다면, 문학은 내재된 체념을 왜곡하고 비틀며 부풀리는 셈이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하는 이도 있다. ‘프란츠 카프카(이하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느닷없이 벌레로 변모된 채 깨어난다. 새벽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가야 하는데 흉측한 모습으로 도저히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순간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여 빈대처럼 방안을 돌아다니고 가족을 곤경에 빠트리는 짓을 하기 일쑤다. 여기서 주된 줄기는 그의 변화된 생활이 아니라, 가족을 책임졌던 주체가 불필요한 객체로 뒤바뀌면서 평화로웠던 일상의 축이 어긋났음을 미세한 감각으로 감지해가는 과정이다. 능력자였던 그가 버러지 같이 불필요해짐에 따라 평소에 눈치채지 못했던 가족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읽게 된다. 여기서 느껴지는 미묘한 자극이나 슬픔은 예견된 그의 죽음이 아니라, 언제든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되는 인간상이다.



 이상 가장의 노릇을 할 수 없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적응해간다. 부정했던 가족들은 그를 숨긴 채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가 없었으면 굶어 죽을지 모른다 아우성이었지만 어떻게든 살 사람은 살게 마련이다. 그런 이변과 체념, 회생에 대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변화할 수밖에 없는 지점을 허용하면서 자기모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찮은 처지에서 삶을 바라볼 때 오히려 인간의 모순적 생리가 잘 부각된다. 변신이라는 은유는 처지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우리가 어떤 본성을 갖더라도 그 의도대로 살지 못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놓인다. 그래서, ‘카프카’의 소설에선 속물성으로 휘둘리는 인간의 양면성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 그 자신이 누리고 느꼈던 삶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공의 내러티브나 의식의 흐름은 작가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다. 법학도였고 잘 나가는 보험회사의 법률고문으로 낮에는 직장인이자 늦은 밤 글쓰기에 골몰했던 작가라는 두 가지 삶을 살았던 남자. 폐결핵을 앓아 한 여자와 두 번을 파혼했으며 특유의 예민함과 완벽주의로 죽기 전 일부의 글을 파기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던 남자. 단편이나 미완성의 글 속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써의 고독과 이질감이 공존했던 남자. 그런 그가 써 내려간 일탈은 유대계 이자 독일인으로서의 혼혈성과, 유복함을 물려받은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서 느꼈던, 양면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그 이질적 처지에서 피어난 감성은 굴레와 속박을 벗어날 자유를 갈망한다. 그럼으로써 현실이 아닌 공상 속에서 변화의 시초를 이룩할 만한 변곡점으로 이어진다. 좀 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러기 때문에 아이러니한 틈새와 체계를 반추하는 것이다. 변신이란 정체된 삶을 쑤시고 찌르는 자극이자 아픔 속에서 개화된 역설적 상상력이다.



보코프’나 ‘카프카’는 좌절과 절망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분신과 변신을 활용한다. 전자는 타자를 자신이라 우기고, 후자는 제삼의 존재로 대입한다. 그것은 도플갱어(Doppelgänger, 영어로는 Double)와 일맥상통한다.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다. 흔히 전해지는 설(說)로는, 살다가 그것을 만나면 얼마 후 죽게 된다고 한다.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거나 생존에 관한 의구심에 시달려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 속에는 죽음의 충동이 서려 있다.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아란 아무래도 내면 속의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이다. ‘게르만’이 자신이라 우겼던 ‘펠릭스’를 살해하고 죽음에 처한 것도, ‘그레고르 잠자’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벌레로 남았다는 것도, 어쨌든 현실 속 원본이 사라질 운명인 것이다. 창조적 자아를 허용했지만 결국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에 귀속되어 벗어날 수 없는 타자화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즉, 주체화하지 못한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자아와 만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완고한 주체는 분신과 변신을, 즉 도플갱어를 원치 않는다.




데칼코마니(르네 마그리트,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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