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징후독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비안 Jul 17. 2017

그들은 무엇을 상실했는가?

11_리뷰에세이

이전 글 ▶ 도플갱어로의 도피



느 날, 도플갱어를 만난 남자는 삶의 변주를 직감한다(‘나보코프’의 <절망>). 현실 부정과 돌파구 찾기는 자아에 대한 도피였다. 벌레로 변한 남자도 마찬가지다(‘카프카’의 <변신>). 아이러니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을 잃고 좌절의 늪에 갇힌다. 그들은 허구 속의 인물이지만, 이방인이었던 작가를 은유적으로 투영한다. 다름에 민감한 감각과 안정에 대한 갈망은 만족을 모르는 불감증과 극복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이어진다. 마음 한편엔 미처 여물지 못한 미숙아가 살고 있다. 그들은 왜 성숙할 수 없는가? 정체성에 대한 안달은 과시하고 보이는 삶으로부터 오롯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주의(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가부장적인 전통성이 생활양식에 밀려난다. 석연치 않은 의구심을 품어봐도 이내 현실의 장벽에 부딪친다. 뭔가 껄끄럽지만 딱히 알 수 없는 욕망 속에서 절망해 버리는 상실의 시대. 어떻게든 살려면 나사 하나가 빠진 것도 모른 채 체념해야 한다. 그걸 깨닫는 것은 잃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잃고 난 후다. 그래서, 상실이란 단어는 전후 세대 혹은 어떤 분기점에서 튕겨 나온다.



실은 끊어지거나 사라진 상태다. 살아남은 자에게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미지의 굴레로 인도한다. 많은 책들이 그 쓸쓸한 뒤안길에 주목해왔다. <절망>이나 <변신>은 좌절한 상태를 직시할 뿐 왜 그랬는가에 대해선 침묵한다. 오히려 상실에 대한 인과 관계는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에서 드러난다. 폐허의 잔재와 현대화된 건물이 공존하는 60년대 서울은 순박하고 촌스러운 인심과 뒷골목 뒤로 즐비한 퇴폐적인 본능이 동시에 꿈틀댔다. 작가는 그 화려한 이면 뒤 삐딱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전후(戰後)라는 시간차와 자유 자본주의로 물들어가는 공간에서 개인은 파도에 휩쓸려버린 나룻배처럼 유약한 존재였다. 그 은유가 주인공이 도피처로 선택한 ‘무진(霧津)’ 속에 그대로 투영된다. 자욱한 안개가 깔린 끈적한 늪지대란 이름처럼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임을 암시한다. 



인공은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신선한 햇빛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저온, 소금기가 섞인 해풍을 느낀다. 습한 촉각, 한두 발짝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시각, 미묘한 기운을 풍기는 후각은 공감각화 된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들어야 하는 개구리울음 소리와 초연하게 부르는 시골 음악 선생의 ‘어떤 개인 날(나비부인 中)’로 이어지면서 무력하고 피곤한 삶이란 심상으로 파고든다. 그 연상 장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가 ‘무진’을 찾은 연유를 뒷받침한다. 사실 그곳은 전쟁으로부터, 첫사랑으로부터, 나약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장소였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부과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마다 방황을 허용했고 무기력하게 무언가를 선택했던 곳이었다. 의무와 사랑보다 여건과 타협함으로써, 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해버리는 현실 속으로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를 희석해버렸다. 그나 서울을 동경하는 음악 선생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에 불안했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풍요로움과 맹목적으로 복종시키는 기회에 피로했고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진기행>은 만성적으로 시달리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무력한 상실감을 건드린다. 비약적인 근대화의 바람으로 구심점을 잃고 흩어진 개성, 욕망과 양심, 나약함과 책임으로부터 정체성마저 바람 잘 날 없다. 척박한 땅 위에 빈약하게 채워진 자본주의는 급진적이고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하면서 자아 부재라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관적이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한층 더 고립시킴으로써 무의미함과 무력함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전쟁과 분단이란 특수성을 추가시켜야 한다. 가족이 흩어졌고, 이념 투쟁이 됐으며, 그와 상반된 개념인 자유는 세대를 구별 짓는 개성으로 변화됐다. 그래서, 전통적인 윤리와 현대화된 도덕의 소용돌이로부터, 냉전 시대의 투쟁이 사라지면서 보수와 진보가 무의미해진 것으로부터, 문화 국수주의에서 네트워크와 세계화된 감성으로부터, 개인을 위탁해버렸다. 



것이 내면까지 장악해버리는 바람에 채워지지 않는 틈, 고독이란 심연의 구멍이 생겼다. 주인공은 생존하기 위해 진심을 감추고 기회주의적 타협을 선택한다. 무력한 현실이란 핑계로 자신의 욕망에 무지한 상실감을 안고 가는 운명인 셈이다. 그렇다고 전후 세대의 몫으로 할당되어 끝난 것이 아니다. 계속된 개혁과 압축 성장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 혼혈과 문화 남용이라는 혼란을 가져온다. X세대를 필두로 수많은 세대주의를 양산해온 90년대에는 처음 도래한 밀레니엄이라는 난제 속에서 속 빈 강정처럼 요란하게 들끓었다. 불만족한 싫증과 변덕은 어떤 욕망도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커뮤니티나 SNS의 발달로 취향을 십분 드러낼 수 있지만, 남들과 다른 이질적인 감성 혹은 내밀하고 개별화된 욕망에 대해 오히려 은밀할 수밖에 없다. 소통할 구실은 많아도 그 범주나 영역은 명확하게 그어진 편이다. 이 시대의 도덕이란 외면의 원리로써의 자율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 점에서 출발한다. 



실 이것의 모체는 2000년에 출간한 <내 여자의 열매>이다. 전자의 아내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종속되는 여자의 삶을 약육강식에 희생되는 사냥감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그녀의 상실감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이 억눌린 것에 대한 공허함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과 달리, 그것을 인지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돌파구를 모색할 수 있다. 환멸을 육식 거부로 나타내면서 힘의 논리와 상반된 식물의 변이란 반란을 꿈꾼다. 그것은 당하는 자의 나약함이 아니라 꿈꾸는 자의 희망이다. 푸른 줄기로 뿌리내려 찬란한 꽃과 열매를 피우겠다는 욕구이다. 꿈꾸는 이상주의로 탈속과 초월의 영역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꿈꾸는 식물이 된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에 자립할 수 없다. 입을 열어 욕망을 발설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손길로 물을 흡수하고 봄을 기다리는 피사체일 뿐이다. 



면, <채식주의자>의‘영혜’는 수동적인 나락에 정체되지 않고 적극적이고 과감한 시도로 진일보한다. 자기 앞의 현실을 거부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고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킨다. 전자의 아내처럼 상상계의 꿈꾸는 식물로 잔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범주인 상징계에서의 정면충돌이다. ‘영혜’의 식물화는 남성과 권위를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써 찾게 된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모험이다. 바꿔 말하면, 결속과 구속으로부터 자립할 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아 대신 현실의 뒤편인 거울 속의 꿈을 끊임없이 발설한다. 전자처럼 그녀도 초록빛 줄기에서 색색의 꽃, 그리고 나무를 꿈꾼다.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뿌리를 내려 뻗어나간 나무는 죽음까지 불사르는 의지다.



 추진력은 자신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욕망이다. 타인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기에 발설해선 안 되는 은밀한 욕망이다. 그것을 드러낸 그녀는 남들이 판단하는 자아 즉, 누군가의 아내, 딸, 동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기에 죽음을 불사르는 주이상스를 넘나 든다. 상실의 원형과 욕망의 근원인 물(ding)로써 그 흰 거죽 같은 몸에서 잎사귀가 돋아나고 앙상한 손에서 뿌리가 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영혜’의 식물화는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판단이 된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화자인 남편, 형부, 언니를 통해 추정되고 추론되는 지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녀는 미친 여자, 예술적 피사체, 연민의 대상이다. 즉, 타인이 보는 미친 것과 그녀의 욕망 발현은 동전의 앞과 뒷면에 붙어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존재로 변이를 허용할 수 없는-인간으로서의 생존을 강요하는- 타인의 방해로 죽기 일보 직전의 운명인 것이다.   



혜’의 상실감은 타인의 굴레 속에서 다중적 개성을 인정되기에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 때문이다. 좀 더 완고한 시대에도 상실감은 있었다. 전쟁과 이념 분쟁 속에서 도덕적 해이를 허용했고 누군가에게 무기력한 상실감을 선사했다. 전자가 미궁 속의 자아라면, 후자는 무기력한 자아다.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공허하고 허무한 개인이 발견된다. 타인과 환경이 규정한 무의미한 굴레 속에서 공회전할 수밖에 없는 피로감이 감지된다. 상실감은 결별과 화합할 수 없는 지점에서 맴돈다. 상실의 시니피앙에는 시니피에가 없다. 그 의미란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처럼 진리란 앎이나 인식이 아니라 주체의 욕망을 드러내는 자체 있을 뿐이다. 굴복하지 않았던 ‘영혜’의 의지 속에서 잠시나마 희망적이었다.



다음 글 ▶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도플갱어로의 도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