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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l 25. 2017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가?

12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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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읽는 이유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봄으로써 나와 비교하게 된다. 내 앞에 떨어진 불똥과 앞으로의 향방, 어쩌면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설지 모를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한편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뜻이다. 확신할 수 없는 마음과 마그마처럼 분출할 틈을 호시탐탐 노리는 욕망을 문학이란 길잡이와 이정표에 의지하는 것이다.



학은 현실의 민낯이다. 허구지만 얼마나 인간적이냐에 따라 공감되지 않는 서사는 외면된다. 읽는 이는 자신과 비교하거나 반면교사한다. 황당무계한 SF나 미스터리 류일지라도 그 안에 현실이 있다면 나와의 교집합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서 전쟁과 사랑의 배신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위장했던 ‘테리’는, 한편으로 다양한 조직과 울타리를 거치면서 다른 태도와 관점을 갖게 된 나와 닮았다. 더 나아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같은 이야기는 모티브가 된다. 주인공이 잔상처럼 출몰하는 희미한 상점의 불빛을 더듬는 모습에서, 무언가 간과해버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진실을 외면하고 위장한 채 살았던 사람들은 정체성의 위협으로부터 고민했고 방황했으며 불안했다. ‘자크 라캉’은 자신이고자 하는 주체성과 타인과 상상력으로 부여된 자아 속에서의 간극이라고 말했다. 농락되지 않고 오히려 인지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시니피앙을 찾는 것은 존재로서의 용기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 탐닉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체와 자아의 틈새는 미지의 욕망, 무의식의 파편,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과 연결된다. 소외와 도피, 분신과 변신으로 좌절하고 변질된다. 상당수의 서사는 현실과 자아의 파찰음, 파장에 주목하면서도 타인의 삶과 취향에 할애한다. 그런 류의 특징은 주관성이 배제된 채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태도를 고수한다. 작가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관찰하며 검토함으로써 약간의 거리감으로 결정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전지전능하게 구현할 수 있으므로 어떤 부분은 과장되고 과감하게 생략되어 낭만적인 동시에 익살스럽기도 하다. 독자는 그런 언문일치의 허구 속에서 타인의 삶을, 사회의 현실을 습득한다. ‘가라타니 고진(이하 ‘가라타니’)은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세상의 모든 현실이 아니라 보이는 게 기준인 반쪽 짜리 허구라고 말한다. 소비하는 오락으로의 문학은 고대의 시학처럼 미학적인 기준이 될 수 없고 윤리적 역할을 떠안을 수 없다. 즉, 근대성의 내면을 담당했던 역할을 갖지 못했으므로 도덕적 과제와 사회적 책임을 상상력으로 밀어붙인다. 



는 오히려 사소설처럼 자기 고백과 특이한 감성으로 밀고 나가는 뚝심을 희망적으로 본다. 현실을 통째로 씹어 삼켜 있을법한 통속과 풍자로 그려내거나, 꿀떡 삼켜봐도 잘 넘어가지 않는 체증과 응어리 같은 관조와 해학을 품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처럼, 권력을 가진 교감인 ‘붉은 셔츠’의 표리 부동한 패권 의식을 까발린다. 오히려 정의는 늙은 하녀 ‘기요’가 포기하지 않는 오롯한 신념에 가깝다. 그들의 대비는 극단적인 시니시즘과 극단적인 나이브함, 궁극의 무감동과 열정적 몰입, 변칙과 원리 원칙, 가벼움과 진지함 등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작가의 감수성과 도전인 셈이다. 객관적인 묘사나 사태 파악이 아니라 외면과 내면으로 분기되는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집요함과 감각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그런 허구 리얼리즘의 깊이는‘레이어’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어는 말 그대로 겹겹이 쌓인 얇은 막을 의미한다.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릴 경우 그것을 활용해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세한 덧칠과 세심한 묘사가 추가되고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해진다.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고하면서 카니발적인 내면 소설 혹은 사소설을 치켜세웠지만,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레이어의 정밀함 속에서 보편적인 공감대와 감수성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레이어의 첫 번째 기준은 작가의 밀착된 시점이다. 1인칭 시점의 경우는 대부분 인물이 작가를 투영함으로써 심리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들 사이의 레이어는 습자지처럼 얄팍하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처럼 그의 이명(異名)인 ‘소아레스’가 직접 화자라면, 일상을 의심하고 내면 깊이 꿈틀대는 기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낼수록 작가 특유의 감성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절망과 불안의 밤을 지새우고 써 내려간 칠백 여 페이지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솔직한 심정이다. 육체로부터 이탈해 유영하는 영혼처럼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인간적인 모습 속에서 도리어 본능과 무의식에 접합되는 일탈이다. 저자는 ‘소아레스’를 통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대리 만족을 경험하고 허구적 교시를 이룬다.



1인칭 시점의 경우, 대개 작가가 주인공과 이명동인 임을 유추할 수 있다.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전자의 감성이 후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표출된다. 반면, 3인칭의 경우-특히, 전지적 시점-, 전자의 능력은 결국 후자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무의식 속에 도사린 욕망과 억압을 캐내는 것이다. 이미 그들 사이에 수많은 레이어가 존재한다. 다만 전자가 파고들수록 투명도가 높아져 후자의 형체가 뚜렷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는 도플갱어를 통해 또 다른 삶을 꿈꾼 전자의 ‘게르만’이 등장한다. 그를 통해 러시아 출신의 망명작가와 영원한 이방인이란 기표가 정체성인 작가 자신을 투영한다. <변신>의‘그레고르 잠자’ 역시 유복한 혼혈성과 가장의 책임감이란 양가감정에 시달린 ‘프란츠 카프카’ 자신을 답습한다. 굴레와 속박에서 자유를 꿈꾸는 그들은 창조적 자아의 좌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작가나 주인공 모두 타자화된 자아로 살아야 할 운명을 넘어서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남는다. 



라서, 레이어의 두 번째 기준은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 사이의 완급조절에 있다. 어떤 시점이라도 덧씌워진 레이어의 수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밀착된 감성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지만, 대놓고 작가가 주인공이라는 공식을 적용한다면 서사의 긴장도는 떨어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적정한 거리감을 가진 채 묘사하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 내지는 자발적인 해석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등장하는 쌍둥이는 세계 2차 대전이란 공통분모 덕분에 작가의 유년시절의 연장선으로 보기 쉽다. 그러면서도 갸우뚱하게 만드는 건 분열(쌍둥이)과 거짓말이란 지점이다. 후자는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평생 거짓된 삶을 살았다. 마치 한 인간의 겉과 속처럼 암수 한 몸으로 보인다. 진실을 외면한 도피와 갈망의 꿈은 소통하지 못한 채 모순적인 딜레마로 얽히고 극복되지 못한다. 자신을 모른다면 거짓말과 위장, 헛된 꿈을 좇다가 마감해야 하는 운명임을 시사한다. 즉, 작가는 전쟁 후 붕 떠버린 정체성의 갈망을 쌍둥이에게 투영한 것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프랑스 언어를 사용했던 양면적인 모습과 삐끗 대는 삶의 근원을 파고드는 것이다. 딜레마는 그렇게 된 연유 혹은 왜에 대한 깊이가 부재할수록 해소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쌍둥이가 누구인지-내가 누구인지-를 놓지 못한다. 



면, <채식주의자>에서 작가 ‘한강’과 주인공 ‘영혜’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전편 격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여자를 그린 바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한 이상적인 존재로 남았을 뿐이다. 그에 반해, ‘영혜’는적극적인 모습으로 비인간적이지만 초월적인 욕망으로 나간다. 작가는 전자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꿈(이상)을 한걸음 더 들어가서 바라본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자의 식물화란 꿈이 비현실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실현 과정이 현실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반면, 후자는 이상적인 이미지인 나무를 꿈꾸면서 과감히 자신의 속박을 벗어난다. 그녀가 행했던 방식들, 이를테면 음식 거부와 극단적인 방법으로의 자해, 형부가 제안하는 파격의 예술 행위와 도덕적 범주에서 이탈한 패륜 등은 일반적인 범주의 허용 지점을 초과한다. 비도덕적이란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직시하고 발현하려는 주체성 속에서 대부분이 잃어버린 진짜 인간의 의지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다. 작가는 속물성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한층 자유로운 상태에서 ‘영혜’를 놓아줌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귀의하는 내면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즉, 그녀를 집요하고 세밀하고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그들 사이의 레이어를 뚫어버린다. 이 책이 공감할 순 없어도 사유가 되는 건 천공기 같은 작가의 도전에 있다.  



이어의 세 번째 기준은 현대인이 다중 인격이라는 점에 있다. 현대 사회는 한 가지 모습을 고수하면서 살기 힘들다. 누군가의 자식, 부모, 배우자 혹은 사회에서의 위치, 지인과의 관계에 따라 다른 기준과 행동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평범했던 삶도 혼란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유달리 사랑에 집착했던 남자가 우발적인 실수로 살인자가 되고(<악인>), 갑작스러운 해고로 한껏 예민해진 탓에 살인을 저지른다(<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범죄로 심판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누구도 그들의 인과 관계를 동정하지 않는다. 이때, 저자가 관조하는 지점은 한 끗 차이로 범인(凡人)과 범인(犯人)을 오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타인 지향적이다. 나만 예외라는 생각은 무지한 자만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 다양한 위치와 층위, 구성원의 신분이 존재하는 한 녹록하고 만만하지 않다. 복합적인 인성과 다중적 취향을 인정하고 선보이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앞서 말한 레이어들이 인물 외면과 내면 사이에 흰색의 그것이 얇게 혹은 두텁게 쌓여있는 거라면, 다중 인격은 오색 빛깔로 둘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 화려한 겉모양 때문에 점점 내가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게 만든다. 영화 <클로저(2004)>를 떠올려보자. 욕구 표출에 거침없는 ‘래리’는 음흉하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그의 아내였던 ‘안나’는 속물적이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진실하다. 딱 그들의 중간 사이에 있는 ‘댄’은 즐기면서도 뭔가를 재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망설인다. 그러나, 진짜 반전은 순수해 보였던 ‘앨리스’가 그들 모두를 속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또 다른 삶을 찾아 떠난다. 앞의 세명이 흰색 레이어의 두께를 쟀던 거라면, 그녀는 빨간색을 벗어버리고 노란색으로 돌아가는 격이다.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민낯을 보여주더라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하다 못해 눈썹을 그린채 쌩얼이라 우기지 완전한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밑바닥까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매 순간 또 하나의 레이어를 덧대거나 다른 색깔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다중 인격은 숙명일지 모른다.



가는 문학 속에서 인물의 레이어를 조명하고 조절한다. 전자가 후자를 동일시함으로써 혹은 내면을 파고듦으로써 가능하다. 또, 하나의 레이어를 투명도나 깊이로 사유하거나, 여러 빛깔의 그것을 얼마나 감추고 드러낼 수 있는지 실험한다. 과감한 결단은 자신만의 감지력과 감수성이다. 어쩌면, 문학을 고르는 기준은 유행이나 이슈가 아니라, 레이어의 여부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써 내려간 리뷰에세이는 그런 책을 조망하기 위한 몸부림-물론 허술하지만-이었다. 대부분은 같은 색상의 레이어와 그 심도에 치중했었다. <클로저>를 보면서, 다채로운 빛깔 속에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인 척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과연 그들에게 진실은 있을까? 레이어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작가는 다중인격의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포장하는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까? 그것도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위한 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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