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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ug 21. 2017

변곡점 위의 카멜레온

13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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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클로저>의 ‘앨리스’가 가발을 벗어던지고 옅은 미소로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를 미궁 속에 빠트린다. 모두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거나 접촉했던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일지 모른다. 누구든 바라보고 싶은 대로 평가되는. 극 중 ‘댄’, ‘안나’, ‘래리’ 전부 그녀를 달리 알았던 것처럼. 바로 그 점을 노리고 탄생했을 것이다. 그건 분명 우리의 운명,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어필하고 변화무쌍하게 변신해야 하는 속사정과 맞먹는다. 



신 겉과 안쪽에 레이어를 덧대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그런 류는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변장이나 도플갱어, 또 다른 욕망으로의 변이마저 허용한다. 설사 그만큼 파격적이지 않아도 대부분 자신의 바람막이인 레이어 속에 숨긴다. 누군가에게는 화장이나 가발 같은 패션 소품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직업적 명분이나 사회적 지위일 것이다. 그것이 정체성인 양 운운하지만 사실 영원불변하지 않으므로 일시적이다. 가족에서도 자식에서 출발해 누군가 운명의 단짝이 되었다가 아이의 부모로 변한다. 한 사람에게 드리워진 굴레란 단순하지 않다. 대개 굴곡의 꺾이는 지점을 지날 때마다 변화를 감지한다. 그 환경에 맞춰 서서히 색깔이 변하는 카멜레온처럼. 변화에는 분명 이유나 계기가 있다. 자신의 레이어를 한 꺼풀 벗겨내 옅어 지거나 다른 색상으로 변해야 하는 변곡점. 어쩌면, 자신의 레이어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목해야 할지 모른다. 



이먼드 카버(이하 ‘카버’)’의 단편[1]은 평온한 것 같지만 이미 미묘하게 분열되는 지점을 주목한다. 언뜻 심심풀이 농담 거리나 한번 듣고 흘려버릴 에피소드 같다. 특이한 한 사람의 인생을 주목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질곡을 주시하는 듯하다. 기가 막힌 희로애락으로 풀어내는 대신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생선장수처럼 펜을 휘둘러 가장 애처로운 한 토막으로 완성한다. 누군가에게 던져지고 야금야금 곱씹으면서 그의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그건 레이어를 둘러매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허울에 관한 것이다. 분명한 건 누구나 해당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사실이다. 나만 예외라는 생각은 편협한 오만이다. 나만 잘한다고 해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없는 게 레이어의 숙명이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될수록 교묘히 색깔이 변하고 자신을 모를수록 두터워진다. 



대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일이 한두 개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기치 못하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가 있다. <깃털들>에서 화려한 딩크족이었던 부부가 불현듯 아이를 갖게 되자 여느 평범한 가정으로 변해간다. 그 변화는 우연히 찾아간 동료의 집들이에서 보게 된 못생긴 아이와 공작새가 합작하는 괴이한 울음소리와 관련 깊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분과 감정에 휘말린다. 이처럼 미묘한 일탈과 객기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불러들이고 지금과 다른 국면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런 상황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레이어를 꺼내 들고 차선책을 찾는다. 인지하지 못했던 또 다른 레이어를 발견하는 건 우연한 계기와 사건에서 비롯된다. <보존>의 아내는 처음에 남편의 실직에 대수롭지 않지만 점점 신경전을 벌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급기야 어제까지 멀쩡하던 냉장고가 고장 나면서 음식과 고기가 녹아내리자 더 이상 이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새로운 냉장고로 바꾸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좀 더 참고 지켜봐야 할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적절한 질문과 답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미묘한 변이 속에 있다. 그녀는 여태껏 스스로 참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남편의 무능이 드러나자 잠재된 속물성과 의심과 불안을 드러낸다. 금단의 상자를 얼어보지 말라는 것을 어기고 열었던 ‘판도라’처럼. 설사 원상 복귀된다 하더라도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도덕적인 잣대나 원칙적인 결론을 말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뷰파인더>의 남자처럼 가족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모든 추억을 집어던져버리거나, <한 마디 더>의 남자처럼 떠날 것을 종용하는 아내 앞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할 수 있다. 가족이 떠나기 전에 혹은 밀어내기 전에 진작 진심을 알아줬더라면 어땠을까? 서로의 레이어를 인정함으로써 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에 비해, 단절은 어긋난 레이어를 고수한 채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놓인 것이다. 평생토록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다른 생각과 의중을 알아채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 이외의 모든 것에 의심할 뿐이다. <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의 여자 역시 한밤중에 열린 대문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저 문 밖에 기웃대는 불특정 대상의 탓으로 돌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의 불안은 이유가 없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문과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섣불리 걱정하는 것이다. 의혹으로부터 발현된 불완전한 생각을 진실이라 믿는다. 그 방어벽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그 속에 갇힌 그녀는 평생토록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을 보내야 한다. 



이 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는 순간 다른 색깔의 레이어로 바뀌었거나 그 두께가 두터워진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거나 완전히 탈바꿈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마치 헤어진 후에야 지난 사랑을 알게 된 것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그와 그녀는 극복하지 못한 지난날을 회상하고 후회한다. 나이를 먹어 충분히 성숙해졌을 때, 비로소 원치 않더라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한다. 차라리 그들처럼 사랑의 타이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거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또 다른 이는 어떤 사랑을 좌절이었고, 아픔이었으며, 아쉬움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재혼한 커플인 ‘테리’와‘멜’은 죽음을 위협했던 전 남편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전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한때 그들을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의 진실을 알게 된 후에야 그 어떤 틀로 정의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탄력적이어서 무한대로 늘어났다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간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어떤 이별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른 국면에 접어든 레이어의 변곡점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변하기 시작한 기류 속에 편승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대성당>에서는 아내의 맹인 친구에게 TV 속 대성당을 설명해야 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망설이는 걸 눈치챈 친구는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우는 일은 끝이 없어. 오늘 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라고 말한다. 자신의 넋두리인 것 같지만 남편에게 던진 말이기도 하다. 타인을 이해시키기 위해 눈높이를 맞춰본 적 없던 것에 관한 일깨움. 그게 자극이었다는 것이 깊이 뇌리에 박힐 것이다. 물론 무엇이 더 중요하는가에 따라 삶의 무늬가 조금씩 달라진다. <목욕>과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생일날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지켜봐야 하는 부부를 다르게 조명한다. 전자는 평탄했던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좌절을 마주한 순간 모든 감정과 기능이 멈춰진 상태를 주목한다. 아들을 잃을지 모를 두려움에 압도된 부부는 사라진 가해자, 속수무책인 의사에게 분노하긴커녕 서로 위로하는 것조차 잃어버린다. 감정의 늪에 빠져 소통하지 못하고 따뜻한 물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반면, 후자는 사정을 모르는 빵집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생일 케이크로 화를 내고 괴롭힌다. 뒤늦게 모든 것을 알게 된 그가 진심 어린 사과로 한 잔의 커피, 갓 나온 롤빵을 건넨다. 삶은 예기치 못한 나락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긋나고 균열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건 오해나 숨김이 아니라 진심과 위로다. 



신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서로의 감정을 다독여줄 격려나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럴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무기력하고 나약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것에 집중하며, 그들에게 벌어진 상황을 인정하기 않거나 방치한다. 그 상태론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레이어를 바꾸거나 두껍게 벽을 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카멜레온도 그럴만한 환경에 맞춰가는 것이지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변곡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묘한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타인보다 나를 위한 내면의 작은 울림, 혹은 모두를 위하려면 달라질 수 있는가의 의지를 살펴야 한다. 작가는 그것을 위해 인물의 레이어를 세심히 들여다본다. ‘카버’의 인물이 그런 상황에 얽히고설켰다는 것과 그게 낯설지 않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히려 이전의 내 경험이고 지인의 것 같은 삶의 한 단락이기에 더욱더 피부에 와 닿는다. 생각보다 많은 변곡점 속에 놓여있는 사실이 놀랍고 두려울 지경이다. 마치 분장을 벗어던진 ‘앨리스’를 봤을 때의 충격처럼.

 




    

[1] 여기서 언급된 ‘카버’의 책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과 <대성당(1983)>이다. 전자에는 <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 <한 마디 더>, <뷰파인더>, <목욕> 등이, 후자에는 <깃털들>, <보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성당>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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