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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ug 28. 2017

무대 위의 연기자

14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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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먼드 카버(이하 ‘카버’)’의 단편은 인생의 굴곡에서 마주치는 변곡점과 미묘한 변이를 살핀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1998)>처럼 판이하게 달라진다. 생일날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지켜봐야 했던 부부의 다른 선택과 행동이 불안과 희망(위로)으로 극명하게 갈렸 듯이. 인물들이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거나 묵인하는 과정의 스펙트럼은 ‘카버’가 꽤 섬세한 작가라는 점을 반증 하나 한편으로 그의 창조물인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심경의 소유자임을 말한다. 



 지점에 도달하면 어쩔 수 없이 ‘존 치버(이하 ‘치버’)’의 인물들이 떠오른다. 은근한 변덕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중첩된다. 그들 역시 코 앞에 닥친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감추기 식의 레이어론 진짜 원하는 바를 모른다. 그러니까 허울이란 무대 장치 속에서 남보다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연기자에 불과하다. 당혹과 불편 속에서 서서히 변하는 ‘카버’의 인물들과는 달리, 그들은 변곡점을 방치하거나 이용하고 마는 막무가내다. 오히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숨기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내세운다. 그러나, 타인에게도 허용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대 위와 아래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표리 부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버’의 이야기는 마치 무대 위에 커튼이 열리면서 자기 이야기하기 바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언가에 고군분투하는 것 같지만, 대체로 사회적 편견과 자아 사이에 시달린다. 일례로 비슷한 성격의 두 단편, <많이 배운 미국 여성>과 <네 번째 경보>[1]를 살펴보자. 여기의 여성들은 한 가정의 어머니가 아닌 성공한 여성에 집착한다. 전자는 불균형의 사회와 소외된 계층을 위해 대외활동을 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하고, 후자는 자신의 재능을 썩힐 수 없어 가족 모두 내팽개치고 타지에서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모호한 연극에 도전한다. 사실 목표지향적인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다. 문제는 타인, 이를테면 가족 구성원에게 해가 되지 않거나 양해가 된 상태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명예나 정체성이라는 목표도 가정과 또 다른 무대인 사회에서 돋보이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아닌가. 그 삐뚤어진 맹신과 허상을 가늠하기 위해 작가가 내세운 장치는 부조리이다. 



 번째는 자아 정체성에 집착하는 대신 본분을 저버렸다는 점이다. 전자는 아들이 병에 들고 아파서 죽어가는 사이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죽은 후에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이고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알지 못한다. 모성애도 도덕적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물러서 있다.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던 친정엄마와 남편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책임 회피하거나 죽음의 원인을 그녀에 돌리고 비난한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했던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낭떠러지 끝에 몰린다. 사실 가정 파탄과 회피는 그녀를 지지한 척한 남편도 해당된다. 겉으론 자상한 아빠이자 남편이었으나 그 역시 아들의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 단지 분노와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가장의 권위에서 안전한 남성우월주의다. 모성애의 부재를 여권 신장의 폐단으로 보고 기다렸다는 듯 가격하는 치졸한 가부장적 모순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조리다. 작가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견고해진 가부장권이나, 성차별에 반기를 든 페미니즘이나, 자기중심적인 모성애의 논리 속에 진심이 있는가를 반론한다. 옳았다면 그들처럼 회피하거나 책임 전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나 이념을 위해 여권이나 정체성을 농락하는 불합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걸 개성과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회가 부여한 개성과 자신이 믿는 자아 사이엔 작은 불빛조차 투과되지 않는 레이어가 겹겹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랑의 기하학>의 주인공은 불만 가득한 채 툴툴대는 아내와 불협화음의 결혼 생활에 전전긍긍하는 친구 부부의 실마리를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풀어보려 한다. 그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강박적 권태와 부부 사이 불신의 평행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작 자신을 조정하는 남성 우월이나 지적 허영 안에서 이상적인 무대를 되찾으려고 한다. 그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보이는 모습에 치중할수록 진정한 해답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연장선 상에 있는 <마리토 인 치타>의 남자는 가족들이 여행을 떠난 동안 모처럼의 고독을 즐기겠다고 다짐한다. 그것도 잠시 우연히 찾아온 유혹 앞에서 무너진다. 그 일련의 사태에 대해 양심과 일탈의 온도차 속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 바쁘다. 가족이 돌아올 시점이 되자 부적절한 관계를 끝내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불륜을 죄책감이 아닌 실수로 치부하고 어떻게든 가장의 책임감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가정만 지키면 된다는 귀소본능은 잘못 주입된 강박관념에 불과하다. 그는 단 한 번도 주체적이지 못했다. 가족과 유혹 앞에서 마음 내키고 흘러가는 대로 휩쓸렸다. 자신을 빼놓고 떠난 여행을 이해하는 마음 좋은 아버지로서, 불륜의 장소에서는 욕정에 사로잡혀서. 그리고선 자신의 탓이 아니라 상대방, 가족여행을 떠난 가족과 불륜녀에게 돌린다. 어차피 그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무대 장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표리 부동은 결국 무대 위에서 필요에 따라 가면을 바꾸는 모습이다. ‘카버’의 인물들이 삶의 변곡점에서 카멜레온처럼 레이어를 덧댄다면, 그들은 가정, 조직, 간통이란 무대에서 가면을 뒤집어쓴다. 성인군자처럼 행세해도 결국 허례허식이나 이해타산 속에 타협하고 만다. 그런 이야기가 보편적이지 않고 파격적이라 와 닿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로 내 이야기 같은 ‘조르주 페렉(이하 ‘페렉’)’의 <사물들>이라면 나을까? 여기의 ‘제롬’과 ‘실비’는 이제 막회사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이다. 젊은 몸뚱이란 사실을 제외하곤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초짜가 허름한 아파트와 낡은 원피스와 다 떨어진 스니커즈에서 탈출하려면 악착같이 일해야 한다. 점점 사회가 길들이는 가치관과 감수성에 물들어간다. 외모를 가꾸고 유행하는 스타일을 섭렵할 수 있는 잡지나 신문을 읽기 시작하며, 서로의 수준을 공유하기 위한 친목 도모에 열을 올린다. 자신의 삶이 타인의 것과 어느 정도인지 비교하고 집착한다.



공하려면 그에 합당한 지위뿐만 아니라 넉넉한 자금이 뒤받침 되어야 한다. 결혼하고 더 좋은 집을 살기 위해 착실히 적금을 붓고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한다. 예기치 않는 상황으로 모은 돈을 잃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돈 불리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덧 아늑한 보금자리, 마이너스 인생이지만 뭐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월급, 남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세련된 외양, 일 년에 한두 번씩 출혈을 마다하지 않는 휴가, 적당한 추억과 농담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목적의 인맥이 생긴다. 그들이 지향하는 삶은 이 책의 1부 1장에 있다. 풍요로운 집안 풍경, 품격 넘치는 일상과 넉넉한 여유의 삶. 그 금빛 같고 포근한 이미지가 누구나 꿈꾸는 행복의 단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산층에 접어들어도 이제 됐다는 만족감은 없다. 그럴수록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발버둥 친다. 가장으로서, 보호자로서, 자식으로서, 사회인으로서의 명목은 일정 수준의 품격을 위해 깊고 넓어진 의무를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것에 지친 ‘제롬’과‘실비’는 파리를 떠나 귀천에 대한 적당한 거리감과 이방인으로서의 특권이 주어진 튀니지로 떠난다. 그렇지만, 일탈은 딱 거기까지다. 속세를 떠나 산속과 귀농으로 귀의하는 사람들도 정작 누려왔던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자연 속에서 나약하기에 아무것도 아닌 무(無) 존재성과 낯선 환경 속의 제약이 가져오는 공허함을 납득할 수 없다. 앞날이 창창한 그들로서는 그런 무의미함을 수용하지 못할뿐더러 그렇게 살아갈 수조차 없다. 막막함은 원상 복귀를 요구할 뿐이다. 정체기를 딛고 마음과 허리를 단단히 졸라맨 채 다시 새로운 일터로 나가야 한다. 다시 한번 사회에서 성공의 흔적을 좇아 수년간의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게 극복할 수 있다면 먼 훗날 자신의 아이와 친구에게 들려줄 단골 무용담이 될 것이다. 



렉’은 현대인의 자화상 속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된 모습을 끄집어낸다. 그들은 성공하고 싶었지만 의식주와 품격에 집착함으로써 스스로의 의미를 잃어간다. 즉, 걸친 옷이나 신발, 살고 있는 위치나 집의 소유권, 교류하는 집단과 문화생활로 판단한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사들인 사물이나 일궈낸 지위와 맞먹을 수 있단 말인가. 사회가 만들어낸 혼란한 지각들,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물질 만능의 착오들, 업그레이드된 기기로 새로운 감각이 충족된다는 기만에 종속되어 한편으로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것이 지금의 나와 주변의 누군가, 혹은 익히 봤던 르포르타주에 등장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수록 몸서리 처진다. 우리의 인식능력이 어느 정도 상실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속물성으로부터 말이다. 



버’의 표리 부동한 가면, ‘페렉’의 속물성에 대한 고찰은 상당히 풍자적이다. 무대 위 개성과 자아도취의 연기자일수록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재고 좀 더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따지는 순간에도 있어 보이는 자신에 치중하느라 진심을 알지 못한다. 누가 그렇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로써 내 안의 레이어는 좀 더 복잡해진다. 인생과 나 혹은 나의 외면과 내면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다양한 무대를 허용함으로써 개성-획득되는 정체성-과 자아-본연의 나라고 믿고 있는-틈을 허용한다. 그만큼 우리는 다채로운 역할 속에 복잡한 레이어를 쌓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자신을 아는 건 점점 불가능한 도전처럼 되어버렸다. 


      



[1] 그의 단편 소설을 엮은 <사랑의 기하학>에 수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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