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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07. 2017

허구가 정체성을 소비하는 방식

15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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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히 늪지대로 빠져들거나 태풍이 휩쓸어버린 이후의 어떤 인생을 봤다(‘레이먼드 카버’). 무대 위에 있는 줄 모르고 들뜬 가면 속의 배우들과(‘존치버’), 보이고 누리는 삶이 개성인 양 착각하는 속물도 봤다(‘조르주 페렉’)[1].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 듯, 그 속에선 자신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야 그게 보인다. 우리는 자신 앞에 드리워진 허울과 허식을 인식하지 못한다.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남들도 마찬가지니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책과 매체를 통해 그 속에 숨겨진 양면성과 껄끄러움을 파고드는 걸 확인할 때다. 그게 잘못이라면 왜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단 말인가? 그것에 대한 확실하고 명확한 답은 선뜻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 궁금하고 알아야 한다면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다. 



행히 그런 류의 책은 꽤 있다. 위에 언급한 이들의 작품도 그중 하나다. 그들이 제시한 변곡점, 무대, 가면, 속물이란 키워드가 현대인이 살아가는 방식-일부이긴 하나-을 대변한다. 그중 일부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그것과 충돌할수록 방황했다. 그들은 허례허식을 몰랐고 깔맞춤 하느라 덧씌워진 레이어를 몰랐다. 껄끄러운 나머지 신경쇠약 혹은 정신분열 같은 병리학적 불안으로 시달렸다. 그런 이에게 괄목할만한 점은 미세하게 꿈틀대는 예민함이다. 무대나 인생 굴곡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한다 쳐도, 내면 깊이 동조할 수 없는 뭔가가 꿈틀댄다. 예를 들어, 몸에 좋다고 먹기 싫은 김치를 억지로 먹였을 때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수용할만한 원칙이 아니라 억지스러운 강요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건 정체성의 비상사태로 넘어간다. 



체성 위협은 ‘클로드 M. 스틸’에 관한 글[2]에서 언급했듯이, 남들과 다르다는 낙인으로 두렵고 불편하며 의욕 상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수의 기준에 따라 연령, 계층별로 특별한 가치관을 부여하고 상호 주관성(상식)으로 판단한다. 사실 정체성은 주관적인 목표가 아니라, 타인과 사회로부터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게 된 개성에 불과하다. 보편성이란 미명 아래 타자적이고 객관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는 건 사회인으로서 포기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 정체성 위협을 느낄까? ‘천운영’의 단편집엔 그런 이야기로 빼곡하다 [3]. <노래하는 꽃마차>에선 전도의 목적으로 전국을 누비는 가족이 등장한다. 엄마는 종교 맹신주의에 빠져 아이들을 이용한다. 구걸을 하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팔아넘기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착취를 당하는 딸은 속상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인지 근원 모를 불편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엔 어떤 만용이 숨겨졌다. 내 몸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강박관념이 타자와 자아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악용된다. 그것이 종교나 가족 같은 박애주의적 사고에서 왜곡되고 비틀어진 논리로 가격한다. 보호자와 아이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란 도식으로 대치되나, 특정 집단이 가진 통속적인 정신 때문에 희석된다. 설사 딸의 기민함이 눈치를 채고 표현한 들 어떤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 관행 속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내가 쓴 것> 역시 마찬가지다. 글쓰기 수업에서 교수와 제자가 실랑이를 벌인다.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전자는 파행적인 후자의 글을 비판하고 수용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 권력자와 피지배자란 도식이 관행적으로 성립된다. 그 역학 관계를 지켜보는 제자들 중 누구도 중립적이지 못하다. 여기서 진실은 현실의 냉혹한 실체는 힘 있는 타인이 주체이고 나머지 자아(정체성)는 객체일 뿐이다. 그것의 부당함을 감지하더라도 겉으로는 아무런 동요를 보일 수 없다. 위의 제자처럼 거스른다는 것은 그곳에서의 생존을 포기할 수 있는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응시하고 정체성을 가격하는 힘을 깨닫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아이러니다. 



러나, 정체성을 강요하고 위협하는 아이러니를 한발 물러서서 보는 건 국면이다. 알지 못해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감지하기에 강박관념과 휘둘리는 자아 사이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혼혈이란 장벽을 넘기 위해 강력한 한방을 가진 복서 ‘알리’처럼되고 싶은 소녀가 있다(<알리의 줄넘기>). 아버지는 차별을 힘으로 맞서라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통해 생존 자체를 연민하게 된다. 어차피 그녀를 억압했던 정체성은 그녀의 이질성을 비난했던 속물주의와 냉소나 불신이다. 그 속에서 자책하는 것보다 밟고 일어서는 게 낫다. ‘알리’라는 은유는 최고의 복서가 아니라 어떤 위협이라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자신만의 비기(秘器)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오빠의 방황을 죽은 동생의 혼과 결부 짓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씐 거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완고하고 배타적인 가부장성에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여자의 눈물이란 구태의연한 습관을 선택하기 싫다. 눈물이 말라버린 그녀에게 성장을 멈춰버린 동생의 혼령이 있다는 건 모든 것을 초월할 의지인 아니무스-무의식 속의 남성성-인지도 모른다. 그것과 교감할수록 자신만의 은밀한 주체적 의지를 밀고 나가게 된다. 타자를 욕망하되 놓아줄 수 있고, 세상과 교섭하면서도 스스로의 방식으로 발설하며, 자신이 아닌 것으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한다. 차라리 배설(소변)을 선택한다. 고집쟁이 아버지도, 나약한 어머니도, 접근 불가한 은밀한 자기 구역이 생긴다.



상이 강요했던 정체성이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때, 위의 그들은 오뚝이와 배설을 선택한다. 자신만의 방식인 레이어다. 스스로 타자와 자아 사이를 오롯이 볼 수 있을 때 주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한 기류에 휩쓸려 전혀 다른 곳에 표류하더라도 자신만의 레이어를 내세울 수 있을까? ‘손보미’의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변곡점처럼 예상하거나 의도하지 못한 사건의 불시착점이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지 않은 계기로 나간다. <침묵>에는 먹고살기 위해 포르노 번역과 술을 포기할 수 없는 부부가 등장한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지만, 아이를 갖고 일거리를 찾는 일이 녹록지 않자 질책하기 바쁘다. 서로에 대한 의심, 소외, 불신이란 틈이 커버려 삶의 형태가 틀어졌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 공허한 불안은 점점 자기합리화를 위해 이기적이고 비타협적으로 만든다. 그들의 변명은 정체성 위협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를 원천 봉쇄하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연장선 상에서 놓인 <폭우>, <육 인용 식탁>, <여자들의 세상>의 인물들도 우물 안 개구리다. 첫 번째에 등장하는 남편은 아내의 의심을 알면서도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숨기려 한다. 희귀 템으로 알려진 잡지 때문에 아내의 의심과 아들에게 일어난 불상사를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두 번째의 아내는 자신을 내버려둔 남편을 향해 바람피웠다고 확대 해석한다. 세 번째의 남편은 아내의 취미활동을 위해 전 여자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느라 만난 죄책감과 아내에 대한 서운함에 시달린다. 그들 모두 엇갈린 의심과 질투를 하거나, 이기적인 감정과 착각에 사로잡혔다. 진실을 보지 않고 오직 각자가 보고 판단한 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상대의 마음이 아니라 물질적인 증거에 주목한다. 그것에 집착하고 어긋날 때마다 상대를 탓하고 비난한다. 중산층을 연상시키는 넉넉한 삶과 쇼윈도 부부 행세 속에 자기중심적인 속물주의를 감추고 있다. 자각하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기에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에 비해, <그들에게 린디합을>에서는 자신의 허상을 마주하기 시작한 지점으로 이끈다. 고인이 된 감독의 마지막 작품을 놓고 유작이냐 아류작이냐는 해석으로 분분하다. 그의 생전 스타일과 전혀 다른 기법이었고 촬영한 지 오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엉성한 필름 속엔 잭앤질이란 춤 속에 녹아든 춤꾼들의 열정과 희열로 빼곡하다. 왜 다시 편집하거나 출품하지 않았을까? 그는 분명 무언가를 발견했던 것이다. 춤을 통해 인생을 뜨겁고 치명적으로 만드는 우연적이고 찰나의 화학반응을 목격했다. 게다가, 그 속에 완벽히 스며든 여배우(아내)의 미묘한 심리적 변화까지 발견하고 말았다.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가와 불륜을 두고 볼 것인가가 팽팽해질수록 감독과 남편 사이란 갈등에 빠졌다. 없었던 일로 무마하는 것으로 자기합리화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불시작점으로 표류해 마치 허상을 비추는 거울 속에 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해야 할까? 결국 그는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고 방치해버렸다. 만약 그가 이질적이고 껄끄러운 것을 마주하고 나아갔다면 어땠을까? 



림칙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의 은유는 다른 공간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것으로 흐른다. <담요>와 <애드벌룬>에서는, 공연장에서 아들을 잃은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아들이, 마치 다른 차원에서 분기된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미련을 담요로 집착하고, 후자의 아들은 아버지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서로에 대한 마음은 새벽 놀이터에서 떨고 있는 젊은 부부와, 공상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커다란 애드벌룬을 마주치면서 드러난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한시름 놓고, 아들은 아버지의 잠꼬대 '운이 좋았다'와 '더가까이 가선 안돼’를 떠올린다. 젊은 부부와 담요, 애드벌룬과 잠꼬대는 거울처럼 서로의 감정을 비추고 드러낸다.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인 인과성은 다른 삶이 얽히면서 간과했던 속내를 수면 위로 끌어내 마주칠 순간을 허용한다. 애드벌룬은 아들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을 오히려 젊은 부부에게 드러낸 담요의 반어법으로, 후자에서 수면 중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아버지의 진심과 맞닿는다. 그제야 이해하게 된 아들은 피해의식으로 더 이상 좌절할 수 없어진다. 타자와 자아 사이의 주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서 어떻게 레이어를 드러내고 사용하냐에 따라 조금씩 방향이 틀어진다. 어떤 레이어는 타인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운영’의 정체성 위협에 대한 자각과 ‘손보미’의 주체를 인식하는 계기는 작은 균열에서 출발한다. 세상이 제시한 기준의 꺼림칙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반항하고 일탈하며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꺾이고 좌절하다가 다시 일어섰으며 혹은 공상의 세계로 날아갔다. 제삼자의 모습으로 관조하거나 과감하게도 새로운 레이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건 소설로써 도전하고 제시할 수 있는 상상력의 일환이다. 즉, 허구가 정체성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뒤틀고 비틀며 변형함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개성의 실체를 까발린다. 제대로 사유하고 걸러진 묵직한 예술적 체험은 기름틀에 깨를 넣고 압착한 맑은 참기름처럼 진한 향기로 퍼져 가슴을 울린다. 어떤 서사는 남겨진 깻묵을 재활용해 또 다른 낚시질을 한다. 그런 밑밥인 강요된 정체성이란 소재의 주요 공급처다. 곱씹을수록, 그런 미끼를 물은 채 살아간다는 걸, 낚일수록 헤어날 수 없는 그물 같은 굴레로 내몰린다는 걸 깨닫는다. 


      



[1] 그들에 관한 글은 리뷰에세이에 쓴 바 있다. ‘레이먼드 카버’에 관한 글은 <변곡점 위의 카멜레온>,
      ‘존 치버’와 ‘조르주 페렉’의 것은 <무대 위 연기자들>이다. 

[2] 해당 글은 리뷰에세이 중 <편견의 위협, 그것을 넘기까지>이다. 

[3] 이 글에 인용된 소설은 ‘천운영’의 단편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2008)>과
      ‘손보미’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20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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