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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20. 2017

한걸음 물러나 관망하기

16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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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의 그녀는 여성의 습관적인 눈물 대신 배설(소변)로써 주체성을 인식한다(<그녀의 눈물 사용법>). 또, ‘손보미’의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담요>와 <애드벌룬>이란 매개체로 흉금 속 진심을 내비친다. 그들은 달걀 껍데기 같은 굴레를 깨닫고 눈 뜨는 중이다. 그러니, 주저하고 은밀할 수밖에 없다. 사춘기처럼 반항하고 일탈하다가 어느새 철들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것이다. 여기의 핵심은 예견된 해피엔딩이 아니라,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의 과정과 방법론이다. 견고한 세상에 맞서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의 모색은 지금까지 논의되지 못한 색다른 길일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면 굳이 어떻게를 논의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들과 다른, 이질적인 시선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인물들이, 다행스럽게도 있다. 그들은 2005년 등단한 이래로 꾸준히 선보였던 ‘황정은’의 작품 속에서 숨 쉬고 꿈틀댄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지 못한 부부, 부모한테 버려졌거나 학대받았던 아이들, 재개발 예정인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 애인을 잊지 못하는 원령과 남자, 속물을 바라보는 고양이. 얼핏 봐도 그들에게 감정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내 삶이 그렇지 못해서. 설사 그렇더라도 그 정도는 아니거나, 그냥 불편해서. 왜 들여다봐야 할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길 수 있다. 낯익으면서도 낯설고, 속내를 얘기하지 않으며, 허덕이고 힘겨운 이들을 마주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함구하는 그들에게 오히려 읽는 이가 슬쩍 다가가야 한다. 그들의 심경을 사건과 의식의 흐름으로 쫓아가고 스무고개를 하듯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그건 저자가 말을 거는 방식이기도 하고 독자에게 제안하는 독서법이기도 하다.  



들은 대체로 평범에서 조금 비낀 채로 살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이었던 <마더>의 ‘오’는 태어나자마자 종이 가방에 버려졌다. 태생적으로 낙오된 운명의 아우라를 지닌 그는 일하는 정육점에서 조차 외톨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소라’, ‘나나’는 산업재해로 아버지를 잃고 삶을 놓은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간다. 사랑에 목말랐지만 그것에 미덕을 믿지 않기에 회피하거나 구속을 거부한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시어’도 불안정한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항과 객기로 점철됐다. 그가 왜 그런지는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 시내와 시외의 경계이자 아기 셋을 잘라먹었다는 원한 서린 외지의 마을에서, 뒤늦게 새 장가를 든 노인인 아버지, 전처의 자식보다 어린 어머니, 발육이 남보다 느린 동생과 살고 있다. 불안정한 울타리는 그에게 태생적인 하찮음을 허용한다. ‘황정은’의 인물 대부분이 해당된다. 인간 자체가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터전과 태생의 기운에 의해서 업보처럼 물려받아, 어디서든 무난하게 적응할 수 없는 시작점이다. 그녀는 이미 그 자체로 세상과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전적 이야기처럼 보이는 <파씨의 입문>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로 차에 치인 토끼, 복수심에 온갖 악담을 담아 끊인 라면, 낡은 냉장고를 몰래 주워왔던 사연처럼 암울한 기억을 회상한다. 그게 고난의 전부일 줄 알았는데 더한 공포가 있었다. 집 한 채를 집어삼킬 듯 거대한 파도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기력함.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였다. 당황한 그녀를, 아버지는 말없이 낡은 자전거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그것으로 자신 앞에 드리워진 세 점, 평탄치 못한 현실과의 간극,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 어떤 책임감을 감지한다. 그 굴곡 사이로 변곡점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자신의 인생을 파씨(破枾)라고 말한다. 즉, 망가진 옷감처럼 주름 속을 거닐 운명인 셈이다.



린 시절 거대한 파도 앞의 두려움은 자각에 불과하다. 무언가로 표현할 수 없다면 먼지 묻은 채 쌓여가는 감정 속에 머물거나 희석되거나 변질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표와 서사로 시도한다. 주름이 그랬고, 또 하나는 그림자다. <백의 그림자>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를 따라가던 ‘은교’는 그게 자신의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옆에 있던 ‘무재’가 따라갔다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죽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여기서 그림자의 자립성은 역설적이고 은유적이다. 스스로 일어나 생명력을 부여하고 오히려 자아를 끌고 다니거나 이끈다. 그 순간 자아는 능동성과 자생력을 상실한다. ‘칼 구스타프 융’이 <무의식의 분석>에서 마음이란 자아와 그림자, 의식(외향성)과 무의식(내향성)의 대립이라고 말했지만, 이건 이치에 어긋난다. 그림자가 저절로 일어섰다는 건, 정체성과 레이어를 무시한 내면의 반란이자 반항이다. 마치 귀신에 홀리거나 유체 이탈의 영혼처럼 불안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왜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는가? 



기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낡은 전자제품을 수리하고, 부품을 만들며, 언제 철거될지 모를 불안 속에서 버티고 있다. 70~80년대의 일면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여전히 곳곳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존재한다.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 곳곳을 누비는 리어카의 고물상 할아버지나, 대도심지 공원 뒤편에 간간이 보이는 포장마차의 모습으로. 한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지만, 다양하고 전문화된 일과 향유 속에서 하나둘씩 사라질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자본과 이해타산에 의해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한마디로 한국 현대 사회의 피동적 디아스포라(이산자)다. 떠밀리는 상황에서 꾹꾹 참아내며 살아남아야 하는 인내와 불완전한 심리가 스멀거리다가 여기저기 부딪치고 낭떠러지로 밀리자 스스로 충돌해버린다. 의식은 스스로를 견디라 강요하지만, 무의식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절박한 심리가 삶의 무게를 억누르고 내면에 자리 잡은 두려움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림자로 출몰한 것이다. 



림자가 일어서는 건, 파씨를 예견했던 ‘황정은’ 다운 족적이다. 뿐만 아니라 ‘은교’가 그것을 마주하고 호기심을 보이지만 결국 한 발 물러나는 것도, 그녀가 삶을 바라보고 작품을 끌고 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치 물속에서 무언가를 보는 개구리의 투명막 같은 걸 앞세워 자신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 녹록지 않은 삶에 어떤 감정이나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은교’나 ‘무재’를 철거 위기의 이산자로, ‘소라’, ‘나나’를 누구도 돌보지 않는 외톨이로, ‘엘리시어’를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무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암울하고 시의적 분위기나 디스토피아의 우화가 아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된 것의 실존이다. 대부분이 간과한 현실의 민낯 중 하나다. 흙수저로 태어나는 것, 사업이나 빚보증을 잘못해서 하루아침에 몰락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소중한 이를 잃는 것도 모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다. 그걸 이겨내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숙제다. 정답이 없어도 그럭저럭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저자가 파씨에 도달했듯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다. ‘소라’, ‘나나’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엘리시어’는 둥지를 탈출해 부랑자로 살아간다. 그 선택은 스스로 헤쳐 나갔기에 타인의 가치판단을 거부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쯤, 독자는 어딘가로 도달한다. 있을 법한 실재감과 낯선 입체감에서 낙오된 심연의 정서와 심상으로. 이방인이 아니라, 그럴지 모를 가능태를 감지한다. 고난과 역경, 희로애락은 반복되고 그 변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살아야 하니까. 동정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필요하다. ‘황정은’의 투명막은 그런 인식에서 발현된 것이다. 



것은 피하지 않고 오롯이 지켜보기 위해 한발 물러선 곳에서 바라본다.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이방인의 시선처럼, 관찰하고 관조하며 관망한다. ‘무재’의 이야기 중에 러시아 인형인 마트료시카에 관한 것이 있다. 알을 품은 인형인 그것은 속에 조금씩 작아지는 또 다른 나를 숨겨놓고 있다. 커질수록 완성형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나 모두 꺼내야 진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억지로 열지 않고 틈새를 찾아야 한다. 찬찬히 살피고 감지해야 개봉할 시기를 알 수 있다. 다면적인 모순을 토로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마주하고 맞서야 한다. ‘은교’가 삶의 잣대와 그림자로부터 거리를 둔 것은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가족도, 일도, 사랑도, 어둠 속에 갇힌 섬의 출구도. 그런 의지 속에는 항성(恒星)이 있다. 항성은 무언가를 움직이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해 고유 운동을 한다. 그림자 의식(意識)이 힘겨운 삶을 분열시킬지라도 견디고 지켜봐야 움직일 때를 포착할 수 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근원을 찾고 인정하는 것은 감정이입이 아니라 성숙에서 비롯된 물러남이다. 그래야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덮치고 내동댕이 쳐도 휩쓸고 지나간 자취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름진 인생길에서 만난 간극과 두려움과 책임감을, 타협하는 이도 있고 흘려버리는 이도 있으며 극복하는 이도 있다. ‘황정은’은 희망의 계기를 끌어내거나, 주제 의식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찌질 했던 어린 시절의 단상, 머리 속에 어딘가에 처 박아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을씨년스러운 들판이나 빛바랜 사진을 끊임없이 조우한다. 어떤 정취나 정서의 언저리를 헤매고 끄집어 선보일 뿐,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건 없다. 머리카락을 스쳤다가 낯선 바람에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깃털처럼 나부낀다. 시선 끝에서 사라져 여운처럼 품었다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하는 실체는 불가항력이고 극복할 수 없지만, 떠나보내거나 흘려버렸다가 또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교감할 순 없어도, 바라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낯설게 보기는 하나의 감각이 된다. 말 그대로 관망의 학습이다. 유혹과 잣대의 세상을 맞서는 건, 담대하게 자신의 시선을 지키는 것이다. 객체나 매개체에 집착하지 않는다. 감정이입할 수없다. 나르시시즘이 없다. 결국 ‘황정은’은 문학이 추구했던, 자기애의 충족이란 허상을 없앤다. ‘이게 뭐지’하는 무감각한 얼떨떨함 속에서 남겨둔다. 그럼에도, 낯선 무언가를 계속해서 주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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