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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Sep 29. 2017

나르시시즘의 역습

17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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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은 가난과 버거움 속에서 하찮음을 눈치챘다. 번번이 구겨진 늪에 빠진 듯했다. 내면의 그림자가 슬며시 일어나 자아를 역습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멈춰서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관망은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기이자, 낯설게 하기이다. 어떤 감정을 투영하는 대신, 바람에 나부끼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 속에선 일말의 자기애를 발견하기 힘들다. 



르시시즘 없는 투명막은 미사여구나 수식어 없이 있는 그대로를 주목한다. 때론 나쁜 녀석이고, 한편으론 둘도 없는 바보라고 말한다. 심보 고약한 친구 아버지를 팼고, 모자란 동생을 구박하면서도 챙겼던 ‘앨리시어’는 살려고 그랬다. 단순히 무례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감정을 거둔 채 평정심을 가지고 수평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를 관찰할 수 있다. 그건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한다. 연민도 수많은 서사와 내러티브를 접하면서 터득한 규칙이자 선입견이란 점이다. 즉, 저자가 인물과 서사에 감흥으로 몰입하는 것도 타성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르시시즘이란 레이어를 드리우지 않았을 것이다. 



신분석학에서는 나르시시즘을 자신이 리비도(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 유아기 때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던 욕망을 성장하면서 점점 타자에게 향한다. 그러다가, 그것에 실망하면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이기적이고 자기 과시적 자기애로 풀이한다. ‘한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말했듯, 나르시시즘은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타자의 사랑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있다. 선입견, 편견, 사회적 관습 따위를 자기 식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애인의 배신으로 더 이상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면, 다른 사랑이 찾아와도 의심부터 할 것이다. 나르시시즘 속엔 자의적인 시선이 있다. 



런 의미에서 선택한 작품은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다. 작가인 ‘네이선’은 은사였던 ‘머리’ 선생님과 오랜만에 만났다. 회포를 풀던 중 그의 동생인 ‘아이라’의 안부를 묻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답고 의협심이 강한 그를 흠모했었기 때문이다. 기억과 달리, ‘아이라’는 속물적이고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매정한 가족, 학교에서의 좌절, 16살 때 우발적 살인, 대공황의 나락으로 파탄에 빠진 도망자였다. 과거에 대한 원망과 변화의 열망을 자본주의와 대치 상태인 공산주의에서 찾았다. 그러면서도, 무대 위에서 미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링컨을 연기함으로써 뜻밖의 명성을 얻었다. 그때, ‘이브’를 만났다. 그녀 역시 가난한 유대인 출신을 숨기고 부르주아지와 결혼해 신분상승을 이뤄낸 인물로, 정숙한 여배우 이미지와 지적인 감식안으로 사교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이라’라는 짐승을 길들이면서 얻게 될 순순한 이미지와 방송에 대한 야심으로 재혼을 강행했다. 개방적인 성격과 당의 비밀주의에서 혼란스러웠던 전자와, 현모양처와 사교계 여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후자의 공생관계는 반항적이고 냉소적이며 경박함을 가진 그녀의 딸 ‘실피드’에 의해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목적을 위해 수단만 존재했던, 안정적인 삶과 신분상승을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그들에게는 도덕적 신념이나 권위가 있을 리 만무했고, 그것을 비웃는 반체제 세력(딸)에게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대의와 권력의 끈을 쉴 새 없이 조정하는 ‘그랜트’ 부부가 전자를 반격했다. 폭로가 두려웠던 후자는 그것에 가담했다.



들이 연기자라는 설정은 가면 속의 인물임을 드러낸다.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서 링컨과 우아한 여신으로 군림했으나, 그건 살인자와 가난한 유대인이라는 속사정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라’의 방탕함(동물성)과 ‘이브’의 허영(속물성)은 잘못 끼워진 단추 구멍 사이로 삐쳐 나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고 타협 불가능한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생이 타인의 시선에서 칭송될 만한 명성과 자만을 가져왔음에도 좁혀지지 않는 취향적 대립이 있었다. 그것을 유지하려면 각자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것, 즉 사적인 욕망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만천하에 드러나자 ‘이브’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인 허영을 지키기 위해 그를 파멸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안위 속에서 나르시시즘을 숨기고 그렇지 않은 듯 거짓 연기한 그들은 본질적인 것, 즉 인간다운 삶과 행복, 자아로부터 멀어졌다. 결국 부부애와 공인으로서의 도덕성까지 처참히 무너졌다. 



리’ 선생님은 그것을 체념한 듯한 관조적인 모습으로 설명한다. 그는 살인자 동생을 보호하고 참 교육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옳은 것을 위해 분노할 줄 아는 본질 주의자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논리를 자의적이고 악용하는 ‘아이라’와 ‘이브’ 같은 나르시시스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근본조차 무너짐을 깨달았다. 선생이란 도덕적 사명감과 형으로서 비롯된 형제애에서 벗어나자, 중립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한때 호기로운 ‘아이라’를 추앙했던 ‘네이선’ 역시 동경했던 건 ‘아이라’의 나르시시즘임을 깨닫고 허탈했다. 스스로에 대해 나약하고 미숙하며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는 명료한 심장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기합리화는 ‘아이라’ 부부처럼 모순을 허용한다. 또 다른 조작을 가동하여 허구하고 왜곡할 수 있다. 그건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의 이름인 ‘곰브로비치’를 딴 작중 화자와 친구인 ‘프로데릭’은 사업차 동료의 집에 방문했다. 거기서 그의 딸인 젊은 ‘헤니아’와 일꾼인 ‘카롤’을 만났고, 그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어떤 가능성에 가까운 것으로, 굳이 따지자면 이제 막 여성성과 남성성이 피어 오른 육체이자 성(性)스러운 기운이었다. 그건 성장통을 겪은 어른만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감성은 미학적이면서도 위험하다. ‘헤니아’와 ‘카롤’을 관음의 대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자신들의 쾌락에 치우친 나머지 상대방의 감정 따윈 감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발화하기 위해서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토’마저 이용했다.



 그들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고 설계자 혹은 공모자로 남으려 하는가? 여기에는 이중적 속사정이 숨어 있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나치에 지배받는 폴란드 국민으로서 수동적인 일상과 공허한 현실 회피 속에서 살아왔다. 무능한 방관과 타협한 나머지 어떤 감흥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젊은이들의 은밀한 관계를 통해 봉인된 방어기제가 풀리는 순간 내재된 욕망이 터져 나왔다. 그 희열이 갑자기 지친 삶에 활력소가 됐다. 게다가 아는 사람만 아는 은밀함이기에 간접적으로 해소할 완충장치가 필요했다. 그들이 집착하는 성에 대한 갈망과 탐구의 목표는 한 마디로 억눌린 현실에 대한 배설이다. 겉으로 관심 없는 듯하나 숨어서 염탐하는 위장술과 자위 게임이다. 그들은 새로운 돌파구로써 외설(포르노그라피아)을 선택한다. 현실 도피가 아니라, 그 속에서 공존할 자극이자 삶의 희망으로써의 외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옳은가,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욕망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조정하는 것으로 풀기 때문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이가 또 다른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처럼, 그들의 나르시시즘은 타인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불건전하고 건강하지 못한 욕망이다. 사람을 함부로 자극하고 난잡하게 하는 외설이다. 



‘프로데릭’의 계략을 ‘알베르토’의 어머니인 ‘아멜리아’가 눈치챘다. 그녀는 신과 도덕이 지배하는 질서와 체계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보수적인 존재였다. 그를 저지하고 무너뜨릴 대립각이자 위협이었다. 그들은 위선과 금욕으로 대치했다. 그가 그녀의 신념을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굽히지 않고, 마치 황야에서 사탄이 그리스도를 유혹하듯 그녀의 믿음을 실험대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 모순 속에서도 소신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방종한 이질성 앞에서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흔들리는 것은 의심의 딜레마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름시름 죽어갔다. 그것은 ‘프로데릭’에게 기회가 됐다. 이제,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도덕적 양심을 운운하지 않아도 됐다. 어머니의 죽음과 약혼자의 부정(不正)으로 흔들리는 ‘알베르토’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 그가 의심할수록 극단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에 의존하고, 변절자와 살인자에 대한 신중하고 공정한 판단 대신 우발적인 복수심과 결탁했다. 그는 바로 거기서 피어난 윤리적 인간의 자기모순을 놓치지 않았다. 도덕성이 욕망을 억누르는 사이 저항에 관대해짐으로써 자멸의 구덩이를 판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설의 타당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설은 신의를 깨부숨으로써 자기합리화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역설의 논리가 있다. ‘프로데릭’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순진한 남녀와 약혼자, 경건한 믿음을 이용했다. 세상을 모르는 미숙함, 보이고 옳은 것만 믿는 진지함, 선의에서 비롯된 성숙과 강단을. 그 속에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책임, 복수 후 감당하게 될 죄책감, 상대적 가치에 대한 딜레마라는 약점도 있었다. 그들이 그것으로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자기애를 알지 못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아니기에, 불건전한 힘과 권력으로부터 무너졌다. 그것은 외설의 본질이 아니라 역습이다. 새로운 권력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과 유사했다. 필연적인 힘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대치하는 헤게모니였다. 어느 순간 사라질지 모를 자연의 일시적인 속성인 셈이다. ‘프로데릭’의 억눌린 욕망이 언제나 표출된 것이 아니라,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발현된 것을 보자. 만약 그가 ‘헤니아’와 ‘카롤’를 몰랐어도 그랬을까? 은밀한 욕망을 노출하기 위해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상대적 반항이 절대적 윤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자신의 신념 없이 누군가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불안하다. 가치나 진실을 기만한다. 



국 <포르노그라피아>는 욕망을 자극하는 외설이 우발적으로 자리 합리화를 위해 도덕과 신념조차 농락할 수 있음을 호기롭게 제시한다. 자기합리화에 빠진 나르시시즘은 결국 타자의 원칙에 기회를 엿보는, 허점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기애일 뿐이다. 그건 욕망과 일시적인 모략으로 외설을 허용하기에, 농락당하는 이는 부지불식간에 휘말린다. 그중 누구도 진짜 자기 자신을 모른다. ‘아멜리아’의 신념도 금기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자 자폭했다. 끝없는 변칙을 허용함으로써 천하무적의 궤변을 끌어들이므로, 원칙과 논리로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좀 더 물러나 바라볼 수밖에 없다. 화자인 ‘곰브로비치’가 가담하는 대신 관망하고 관찰함으로써 그 내막을 파고들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머리’ 선생님의 관조와 ‘네이선’의 성찰도 비슷한 맥락이다. 음흉한 속물주의와 나르시시즘이 결합한 ‘아이라’ 부부의 위선은 그것을 이용하려는 ‘그랜트’ 부부나 ‘실피드’의 잣대로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한때 추앙했던 ‘네이선’의 혼동이나 형제애에 빠진 ‘머리’ 선생님의 믿음도 자기 안위나 자기 기준에서 비롯된 자기합리화였다. 도리어 깨닫고 인정하는 쪽이 솔직하다. 한발 물러서야 평정심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저자들이 자신의 인물들을 끝까지 밀어붙인 뚝심이다. 그 힘이 독자를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그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감정 이입하지 못하게 한다. 피로하고 답답하게 만든다. 문학이 살아있는 인간의 삶을 다루는 도구로써 존재의 어둠과 나약함을 비추는 사이 그것과 중첩된 자신의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독자의 위안과 위로는, 여기서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공허한 거리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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