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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Oct 24. 2017

직감을 잃어버린 이들

18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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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아이라’와 <포르노그라피아>의 ‘프로데릭’에게서 느꼈던 건 어디선가 봄직한 껄끄러움이다. 어쩜 저렇게 양면적일까 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의 데자뷰 같아 께름칙하다. 하루 아침에 말 바꾸는 정치인이나, 겉으론 대단한 은총을 베풀면서 뒤로 딴짓을 일삼는 사이비 교주의 모습도 얼핏 스친다. 그만큼 과감했고, 더 나아가 자기합리화에 빠져 타인을 농락했으며,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열외 시켰다. 우직하고 논리적인 겉모습과 달리 음흉한 속내를 가진 표리 부동한 진지함은 자신들이 저주했던 꼰대질과 배타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서 나중에라도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것과 이율배반적으로 사회나 조직, 가정 곳곳에서 존재하고 있다.  



들의 모순과 외설의 나르시시즘엔 일관적인 알맹이가 빠져있다.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좌지우지하지만, 그것이 일으킬 결과에 안중에도 없다. ‘아이라’가 자신의 욕망과 야욕을 감추고 은밀히 조정했던 것이 언제까지 감춰질까? 또, ‘프로데릭’의 계략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젊은이에게 지속적으로 먹힐 수 있을까? 브레이크 없는 질주 속에 반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언젠가 고꾸라질 운명인 셈이다. 그들은 스케이트를 신고 살얼음판 위를 질주하듯 위태롭다. 그것이 독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한편으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원하는 방향을 위해서 좀 더 건설적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신중함을 넘어 예기치 못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것을 뛰어난 자는 눈치가 빠르다. ‘융’이 말하는 인간의 성격을 좌우하는 요소 중에 감각과 직관이 있다. 이중 전자는 세상에 무엇인가 존재하고 그것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알아채는 능력이다. 후자는 그것에 논리적인 사고와 경험이 쌓여 인과 관계를 예측한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어떤 능력이 덧붙여지고 키워지는가에 따라 시너지를 낸다. 인식론에서 후자를 중요시하는 ‘데카르트’는 그것의 주의와 집중력에 따라 합리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고 말한다. 그 능력은 그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눈치가 얼마나 체화됐나에 달려 있다. 그게 바로 전자에서 향상된 직감이다. 직감이 발달하지 못하면, 사물이나 삶의 변화를 눈치챌 수 없다. 또, 자신 앞에 드리워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 등장하는 ‘데이비드’와 ‘해리엇’ 부부는 행복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직감을 간과해버린 케이스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추구했던 가치관은 즐거운 나의 집 같은 화목한 대가족이었다. 이혼한 부모 밑에서 외로웠던 그와 모성애 강한 엄마 밑에서 자란 그녀는 그게 인생의 전부로 생각했고, 그것의 선행조건을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 런던 외곽 지역의 빅토리아 풍의 대저택을 구입했고, 해마다 일가친척들을 불러 모아 가족 모임을 주최했으며,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누군가 가족생활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세뇌의 일종이라고 말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대로 행복의 자만심에 빠졌다. 불행한 가족을 가진 친척들을 동정하면서도 속으로 그들이 잘못된 결혼 탓에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없다고 운운했다. 



들의 방종과 무절제한 과시욕은 '이런 행복한 생활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란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기이한 외모와 폭력 성향을 지닌 다섯째 ‘벤’을 낳으면서 시작했다. 그녀는 보통 아이로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고스란히 다른 가족에게 피해를 입혔고 급기야 비난과 비판을 들어야 했다. 길들여지지 않는 ‘벤’의 괴팍함과 파괴력은 단란한 가정을 들쑤시고 말았다. 왜냐하면, 화합할 수 없는 그의 이질감이 흔히 보통 사람에게 있을 법한 통념의 평균치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감한 ‘데이비드’와 가족들은 위기의식과 신변 보호를 위해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을 수긍하면서도 모성애란 도덕적 잣대와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이 아이를 낳은 여자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통속적인 사고와, 격세유전(隔世遺傳)-대를 이어 특이한 형질이 유전되는 현상-이라는 결과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억울해 미칠 지경인 감정과 ‘벤’을 낳은 어미로써 그를 버릴 수 없다는 죄책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있었다. 급기야 이질적인 존재를 낳았던 자신을 타인에게 설득시키지 못하자 오히려 자신 몰래 작당한 가족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녀는 확신 없고 억울한 감정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만인이 이해하고 납득할만한 모성애를 선택했다. 허나 노력하고 회복하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승진을 핑계로 밖으로 돌고,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녀의 품을 떠나 자신들의 삶을 꾸려갔다. ‘벤’을 버릴 수 없는 엄마로서의 본능과 다른 아이들을 내버려둔 무책임을 곪아 터진 종기 마냥 밖으로 터졌다. 그 비난이 그녀에게 몰리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엄마가 되었다. 게다가 통제 불가능한 ‘벤’조차 점점 포기하게 되고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내려진 주홍 글씨는 극복할 수 없는 윤리적 문제와 맞닿았고 그것을 타파할 만큼 정의롭고 바르지 못했다. 단지 정상인의 거부이자 이질성에 대한 공포였으며 그런 아이를 낳았다는 죄책감이었다. 그것이 점점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파괴하자, 그 대상에 대한 연민과 책임회피에서 갈팡질팡했다. 만약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그들이 계획한 행복한 가정이 유지되었더라면, ‘해리엇’은 평범한 엄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죄책감이나 회피보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가족애가 작은 파편 조각에 무너질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그녀가 아이에 대한 욕심을 덜 부렸더라면, 혹은 행복한 가정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으로 내달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힘겹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안정에 길들여진 나머지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많이 가질수록 풍요롭고 남보다 많이 누리는 자본주의의 논리로부터 파생되어, 그에 따른 행복론으로 맞춰진 것이다. 행복의 기준이 자기만족보다 사회적 잣대에서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은 그 속에 있을 땐 알 수 없다. 다만 낯선 두려움과 만날 때 극명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그만큼 개인 특유의 직감을 발휘할 기회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성에 젖어 직감을 잃어버린 사람은 예기치 못한 이질감을 회피하고 혐오하기 마련이다. 집착이나 강박관념으로 예외 상황을 극복하거나 포용하지 못한다.



들은 구태의연한 통념을 담보로 자기합리화에 빠져 있다. ‘해리엇’이 통속적 모성애에 맞춰졌다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등장하는 ‘토니’는 기억을 조작한다. 그건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추억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몰랐다고 잡아떼는 식의 변명이다. 학창 시절 친구였던 ‘에이드리언’과 여자 친구 ‘베로니카’가 자신을 배신하고 사귀는 걸 알게 된 후 보낸 치기 어린 편지가 나비효과처럼 파장을 일으켰다. 40여 년이 지나 되돌려 받고서야 그것이 기억 이상으로 잔인한 내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대해 타의가 섞여 있음을, 특히 자신의 순간적인 질투와 악의로 시작된 일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맹세코 자신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일기를 찾으려 하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연락했다. 어쩌면, ‘토니’는여기서 멈춰야 했는지 몰랐다. 기억하지 못한 죄로 인해 감당해야 할 진실은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무심한 말들이 예언처럼 현실로 나타나, 친구와 사랑했던 그녀의 인생을 망치고 친구의 불완전한 후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것이 밝혀진 순간, 60대 ‘토니’의 기억으로 재생된 과거가 모두 조작됐다고 드러났다. 그의 말대로 ‘시간은 접착제가 아니라 용해제’였던 것이다. 그의 착각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를 뺏기기 싫었던 친구에 대한 질투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쏙 빠져나가려는 이기심이나, 그녀와 보낸 하룻밤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던 무책임이 있었다. 늘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앞섰다. 그것이 그들을 실망시켰고 결과적으로 힘들게 만들었지만 몰랐던 양 굴었다. 한참 후에야 깨달았고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인과 관계에 축척과 책임의 문제가 있었지만 거대한 혼란만 있었다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착각이 일으킨 혼란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상을 했건 못했건 그것으로 야기된 결과에 대해, 인간은 책임지거나 회피하거나 한다. 특히 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둘 중 하나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 하거나, 완전히 벗어나려 하거나. 전자는 ‘토니’다. 자기중심적 변명과 방어기제로 무책임의 죄가 성립됐다. 적당한 도덕과 위선 때문이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을 추구한 결과다. 친구의 자살과 그의 불운한 아들의 인생 앞에서 참회 대신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에 비해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책임 회피의 죄를 선택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가 우연한 실수로 얻게 될 결과 즉, 나이 많은 부인과 아이로 발목 잡혀 세인의 눈요기가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우연은 그의 인생을 흔들어버렸다. 우연이란 얼마나 기막힌 굴곡인가? ‘베로니카’가 ‘토니’가 아닌 ‘에이드리언’을좋아하게 되고, ‘토니’는 어처구니없는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며, ‘에이드리언’이 의외의 인물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게 되는 상황은 모두 뜻밖의 일이다. 인간의 삶은 순리에 맞게 양심과 도덕으로 밀도를 맞추는 듯 보이지만, 의외의 상황 앞에서 무너지거나 견디며 새로운 무늬를 새겨 놓곤 한다. 피한다고 해도 살아 있는 한 책임이 뒤따른다. 그는 이 우연 앞에 도덕적 양심을 결부시키지 않았다. 책임을 떠안지 않고 죽음으로써 책임질 이유에서 멀어졌다. 이기적인 선택이다. 그럼에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직감하지 못한 불찰에 대해 스스로 죗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면, ‘토니’가 그 업보를 몰랐고 끝까지 우기다가 모두에게 외면당한 채 홀로 남겨졌다. ‘해리엇’도 통속적 가족애와 모성애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변명과 착각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직감을 잃어버린 이들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다. ‘융’은‘인생이란 우리 각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특별한 물음에 답해야 하는 개성화(자기실현) 과정'이라고 말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제발 그만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며 조금씩 밝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이끄는 힘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결국 내면의 울림을 따라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세상을 오롯이 바라보는 감각을 터득한다. 그것을 간과했고 반(反)했던 ‘해리엇’과 ‘토니’의 이야기는 대척점에 있는 셈이다.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은 그들의 이야기가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할 때다. 그중 흐릿한 일부가 부정확한 기억 속에서 불충분한 확신에서 서성일 때, 행여 몰랐던 진실이 있었을까 두려워진다. 개인의 판단이나 합의에 의해 결정된 사실도 망각과 시간의 흐름 앞에서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진실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공포다. 두려움은 여기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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