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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Oct 26. 2017

직감으로 더듬은 잔혹한 여운

19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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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째 아이>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예견할 수 없는 인생살이에서 어떤 것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을지 곱씹게 한다. 직감할 수 있다면 가능할까? 진실을 모르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엄청난 충격이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일일이 간파하고 모든 것을 주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세를 예측하고, 누군가의 스캔들이 다른 사건을 덮기 위한 조작 임을 간파하기엔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진실을 아느냐, 모르냐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공기의 흐름이 바뀐 걸 알아챈다. 만약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가 ‘베로니카’가 자신을 피하는 것에 이유를 눈치챘더라면 더 이상 집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행간 안에 숨겨진 의미를 읽으라는 말이다. 수많은 사건과 정보를 꿰뚫지 않고서도 뭔가를 감지하려면, 들은 풍월이 많거나 다양한 일을 겪거나 섬세하게 느껴야 한다. 직감은 타고 나는 부분도 있지만 학습과 경험으로 축척될 수 있다. 학대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전수전을 겪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공감하는 것처럼. 공감의 크기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채롭다. 남의 얘기를 내 일처럼 느낄수록 직감력이 뛰어날 것이다. 결국 그런 이가 누군가를 돕고 일으키는데 앞장서기도 한다. 직감은 감정에 소구해 기복을 넓히고 유연하게 하며 포용력을 키운다. 어쩌면 광대역으로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에 질식하거나 꾸역꾸역 소화하는 우리로썬 그게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점점 누군가의 갈무리에 의지해 판단하려 한다. 육감으로 형성된 유연한 공감력과 다양한 소통 기제는 턱없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잘못 의견을 냈다가는 몰매 맞기 십상인 디지털 메커니즘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도 언급했지만 감은 체득하는 것이다. 모든 걸 다 경험할 수 없는 우리는 대개 예술로 간접 체험한다. 많이 보고 느껴야 다채롭게 성찰할 수 있다. 육감이 말랑말랑 유연해지려면 새로운 자극에 동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혜영’의 <재와 빨강>이 떠오른다. 내용은 마치 <환상 특급>이나 기담처럼 기이하다. 주인공은 외국으로 장기 파견을 떠났지만 마치 불시착한 듯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로 전락하고, 고국에서는 전 아내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렸으나 전혀 기억할 수 없으며, 탈출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전전긍긍하다가 운 좋게 임시 방역원으로 발탁되어 새 삶을 살게 된다. 이국 땅과 바이러스, 고국과 살인 사건, 쓰레기와 방역이란 굴레는 전혀 이질적인 것처럼 맞물리지 않는다. 그가 마치 턴테이블 LP판 위에서 아무런 매개체 없이 A 트랙에서 B 트랙으로 건너뛰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배경이나 시간적 흐름조차 현재인지 미래인지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화법은 명료하지 않다. 도착한 타국의 파견지도, 그가 살았던 지역도, 자신과 동료의 이름조차 모두 무의미한 알파벳과 지시대명사, 혹은 별명으로 지칭된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시공간과 무대, 다시 말해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이미 허구이기에 그럴지 모른다. 그 허무맹랑하고 모호한 설정 위에서 그가 지껄이는 말 자체도 신빙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키우던 개가 걱정돼 자신의 집을 방문하라고 한 친구에게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게 만들어 놓고선, 진실로 자신이 그녀를 해코지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손엔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멍 자국이 있고, 집 근처 쓰레기 장에서 그의 지문이 묻은 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의 이야기가 믿을 수 없을수록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 모르거나 숨기고 있다. ‘토니’처럼 감을 잃고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어떻게든 궁금해하고 찾으려 했으나, 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자신이 이국 땅에서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로 치부된 것인지, 정작 아내 살해범이란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을 파헤치는 일 따위를 하지 않는다. 살인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국 출장지로 넘어왔고, 거기서도 수세에 몰리자 도망가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널뛰기를 하고 있다. 그 상태에서 진실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의 직감이 발현되는 그 상태가 두려워 회피하는지 모른다. 만약 그 점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다면 이제 독자가 자신이 느낀 감에 따라 진실 혹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넋두리 대신 진실의 증거를 포착해야 한다. 그가 말한 것 중 자명한 사실 중 하나는 그의 손에 남은 멍 자국, 그의 지문이 묻은 칼이다. 문뜩 떠오른 기억의 파편과 꿈속에서 칼을 쥐었던 감각을 떠올린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방역원이 된 후 알 수 없는 연유로 저지른 살인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가 부인했던 이야기가 진짜일지 모른다.



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을까? 그가 파견 발령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지사장의 집에서 쥐를 잡았기 때문이다. 쥐는 그가 일하는 방역회사에서 파괴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쥐가 가진 생명력은 생각 이상으로 끈질기다. 자연재해가 벌어지기 전 그것의 움직임만 포착해도 무슨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정도다. 바이러스와 방역 덕분에 땅 위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되자 지하 세계에 숨어들어 터전을 구축한다. 그는 그것을 죽였고 그 덕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국 생활의 기회를 얻었지만, 살인이 발각되는 바람에 결국 지하세계로 흘러들어 그것과 함께 생존하게 된다. 마치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감각 하나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어떤 인과성과 가능성을 가늠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 대신 쥐의 습성 같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건 직장이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다소 껄끄러운 것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느끼는 거리감, 아내가 자신에게 대화하지 못하고 홀로 삭혀야 했던 외로움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원숭이가 그들의 소지품을 앗아갔을 때 억지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는 그 모든 원인에 대해 자신이 아닌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것을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다. 쥐를 처치한 것도, 아내를 살해한 것도, 이름 모를 노숙자와 여인을 죽인 것도 그랬다. 



는 그가 우발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 본능이자, 다른 도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생존력이다. 그 결과에는 반드시 살인이라는 빨간 피가 함께 한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재로 만든다. 이혼 후 아내와의 흔적을 없앴고, 노숙자를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버렸으며, 방역처리 후 잡아들인 쥐들을 불태웠다. 그 모든 것이 우연처럼 다가왔다고 말하지만 모두 그의 내면에 자리 잡아 은근슬쩍 좌지우지 하나 도무지 들여다보지 않는 감각에 의해 필연적으로 조정된 것이다. 그것은 아내의 수첩에서 발견한 문장을 속죄하듯 환기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직감을 무시하고 자기합리화를 내세우다가 무의식적인 반발에 의해 소멸(빨강)하고 인멸(재)한다. 그 대가는 도돌이표 같은 고독이다.  



기까지 유추한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연민이나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주인공 앞에서 독자가 그것에 다가갈수록 단서와 직감으로 유추하게 되고 더 나아가 껄끄러움에 직면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이질감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힘겹고 피곤한 기운이다. 이처럼, 직감은 감정이입이나 공감으로 나아갈 순 없어도 어떤 인상이나 윤곽을 형상화한다.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런 감정일 것이란 추상적 추론을 새긴다. 그건 세밀화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일 듯 말듯한 안개 같은 아련함으로 남는다. 모양과 색깔이 아니라 빛이 투영하는 실루엣으로 형상화한 인상파화풍처럼 인상이나 여운으로 표현한다. 여운은 직감을 발휘하고 도전하게 하는 묘약이다.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읽어갈 때 극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런 체험은 <소리와 분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난해한 것은 진짜 주인공인 ‘캐디’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세 명의 형제와 유모에 의해 전해진다. 그러니, 그녀는 각기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남동생 ‘벤지’는 현재와 과거의 경험이 오락가락한다. 사물과 감각을 매개로 자유롭게 연상하기에 마치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말하는 것 같다. 특히 냄새로 상황을 파악한다. 젖은 속옷의 그녀를 나무 냄새 혹은 인동덩굴 냄새로 연상하는 식이다. 그녀를 흰 독말풀이나 하얀 새틴 슬리퍼로 대입시킨 채 순결하고 강인한 모성애로 생각한다. 오빠인 ‘퀜틴’은 하버드대생답게 지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현재의 시간과 문뜩 떠오르는 과거 회상이 교차되는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어 어떤 부분은 상세히 설명된다. 또 어떤 것은 분기점을 끊기 어려울 정도로 뭉뚱그려 있다. 누군가에게 발견될지 모르지만 이미 자신에 대해 다 알 것이란 전제가 있고 그렇기에 허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흔적이 다분하다. 내면 깊숙이 견고하지 못한 자아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흔들리는 가치관과 심리를 보여준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캐디’에 관한 회상이다. 동생 이상의 감정을 극복할 수 없기에 괴롭다. 



면, 그들과 극명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남동생인 ‘제이슨’이다. 그에게 ‘캐디’는 한마디로 잡년이다. 그녀의 결혼으로 자신의 미래가 밝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자 그녀의 딸인 ‘퀜틴’을 떠맡게 됐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역할까지 했기 때문이다. 조카를 미끼로 누나에게 양육비를 받아 뒷돈을 챙기고, 자신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고 독재자로 군림한다. 그러다가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가 듯 조카에게 속아 전 재산을 도둑 맞고 빚더미에 앉아 희망 없는 가정과 미래를 짊어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이 그녀 탓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모였던 ‘달지’는 진실에 대해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주인집 네 명의 아이를 키웠 듯 그녀를 품었다. 어린 시절 젖은 속옷을 벗겨 감싸줬고 ‘제이슨’ 몰래 그녀의 딸을 만나게 해주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지켜봤고 관망해왔다. ‘달지’가 내뱉는 ‘나는 시작을 보았다. 이제는 마지막이 보여’란 말속에는 진실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흉측한 가족사가 ‘캐디’의 젖은 속옷에서 시작됐다면,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말로가 비극 임을 말이다.



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을 조합해야 한다. 첫 단서는 ‘벤지’의 공감각적 연상에서 출발한다. 순결한 듯 보이지만 젖은 속옷을 입었던 ‘캐디’의 경험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떻게 이끌지 일깨우는 대목이다. ‘퀜틴’에게 인동덩굴 냄새는 슬픈 냄새로 기억된다. 서로의 첫 경험을 질투한 나머지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 주변의 남자들 문제나 임신 때문에 선택한 결혼을 자책한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근친상간의 감정만이 아니다. ‘벤지’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늘 아픈 엄마 대신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녀에게 모성애와 형제애 이상의 감정을 오간 것 같다. 똑똑한 ‘퀜틴’은 그 감정의 실체가 모호해서 아버지에게 토로하지만 오히려 부정당한다.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그가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남동생인 ‘제이슨’의 장래를 위해, ‘캐디’를 부잣집 도련님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무마하려 한다. 사실 그의 반발심은 아버지의 독단과 자식들을 방치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다. ‘캐디’에 대한 에로스와 플라토닉도 그들이 심어준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는 타협할 수 없는 부모님의 구속과 부당함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 그것은 거침없고 폭력적인 ‘제이슨’ 에게도 드러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형만 챙겼고 어려서부터 반발심을 가졌다. 오히려 병약해서 무시당한다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엄마는 ‘퀜틴’과 반대 성향의 그를 싸고 돌았다. 그 절대적 지지 덕분에 다른 형제들과 구분됐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삭빠르고 이해타산적이 되었다. 비정상인 동생을 안아준 적 없는 그는 누구도 따뜻하게 품어본 적이 없다. 차별이 몸에 밴, 가부장적 태도로 일관된 그는 그토록 원망하던 아버지의 독단과 자신의 면죄부처럼 키운 엄마의 이기로 물든 최악의 결과물인 셈이다.



사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관대하지 못한 아버지, 나약하다는 핑계로 가족에 태만했던 엄마, 기대와 호기심 사이에 중심을 잡지 못하는 ‘퀜틴’, 엄마의 편애로 삐뚤어진 ‘제이슨’, 정상적이지 못해 외면당하는 ‘벤지’. 이 불행한 가족 속에서, ‘캐디’는 그들의 구원투수가 아니었을까? 좀 더 직감을 발휘해보자. ‘캐디’ 역시 장애로 태어난 동생을 돌보지 않는 엄마와 무자비한 청교도적 습성의 아버지에 반발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자신의 사랑을 나눠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달지’를 제외하고 그 누구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을 것이다. 젖은 속옷으로 돌아다녀도 혼나거나 관심받지 못할 만큼. 그녀의 모성애가 성녀로 만들었다면, 상처가 탕녀를 허용했을 것이다. 사랑이 필요했던 여자 아이는 어느 곳 하나 마음을 두지 못해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나마 구심점이었던 그녀가 떠나자 가족 전체가 흔들렸다. 아버지는 술로 생을 마감하고, 엄마는 손을 놓아버렸다. 남겨진 형제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벤지’는 절망의 소리로 분노했고, ‘퀜틴’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무의식적으로 분노했으며, ‘제이슨’은 남은 가족에게 화풀이로 분노했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소리와 분노는 그녀에게 죄책감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식됐고 이용됐기에, 어떤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의 형제들은 괴성 같은 소리를 내거나 분노했지만, 그 조차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청교도적이고 가부장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에 물든 한 백인 가족의 이기로부터 희생된 것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여성성을 요구하는 객체로 머물러야 했다. 그녀를 마리아나 이브, 타락한 광신녀로 몰아세운 것은 그들이다. 자신들이 보는 방식으로 그녀를 규정했다. 그러니, 그녀가 입을 연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녀의 침묵에 대해 곱씹을수록, 우리는 소름 끼치는 비극과 무기력을 조금씩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을 간파했던 어린 ‘캐디’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감히 그 심정에 감정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그녀에 대한 연민을 처음에는 내 친구의 경험처럼 바라보다가 나 자신을 투영하거나 내 아이의 아픔으로 대입하다 보면, 연민은 공포로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여운은 꽤 잔혹하다. 



<와 빨강>처럼 직감하지 못한 이에게 남겨진 고독이란 업보나, <소리와 분노>처럼 세심하고 순수한 연민을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기 식대로 악용하는 것은 잔혹하다. 그래도, 이 모호하고 진절머리 나는 내러티브는 나름의 아우라와 여운을 남긴다. 책들을 덮은 후 전자의 쥐나, 후자의 젖은 속옷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공감각적 환기는 시궁창 같은 역겨움에서 암울하고 외로운 연민에 머물렀다가 어찌할 바 모르는 무방비와 무기력에 던져 놓는다. 그걸 느낀 것으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린다. 어딘가에 생채기를 남긴다. 오직 시간만이 체험 속에 허덕인 진실과 내러티브를 망각으로 흘려 보낸다. 그 사이 상처는 자생적으로 치유하고 흉터만을 허용한다. 모든 것을 잊어도 그것만큼은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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