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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Nov 12. 2017

타인과의 시간

20_리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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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분노>에서 ‘달지’는 말한다. “인간은 기타 이런저런 것들의 총합이야. 불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제야. 이 문제는 끈덕지게 변함없는 무(無)로 이끌리는데, 이 무는 흙과 욕망의 교착상태야.” 욕망은 자신의 근간을 뚫고 나와 타인을 정복해도 멈출 수 없다. 즉, 이도 저도 아닌 제로썸(zero-sum)이자 허무다. 그건 경험하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짐작할 수 있다면 남 보다 뛰어난 육감을 가졌다는 소리다. 뭔가를 미리 감지한 자는 떠벌리기보다는 침묵한다. 절망했던 ‘벤지’와 껄끄러웠던 ‘퀜틴’, 억울했던 ‘제이슨’이 소리치거나 분노했던 반면, ‘캐디’가 끝까지 함구했던 것처럼. 그들이 기억하는 그녀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밖에 보지 않는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소리칠 수 없다. 그것이 거짓이나 허상이라고 반박해도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만족을 채워줄 수 없다. 직감한 그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디’의 침묵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눈먼 자들 가운데 눈뜬 자는 뭐가 잘못인지 말하지 못한다. 직감하지 못한 자는 자신 속에 갇혀 있다. 자신이 보는 바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반박해도 뚜렷한 증거를 내밀지 않는 이상 믿지 못한다. ‘벤지’나 ‘제이슨’은 비합리적이고, 하버드 출신인 ‘퀜틴’조차 무의식과 현실 사이에서 몽상가처럼 방황한다. 그녀에게 모성애를 느꼈거나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 믿었지만 어긋났다. 억지스럽게도 그녀 탓을 한다. 증오는 타인을 뚫고 나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두려움까지 파고든다. 결국 스스로에게 화살을 던지는 꼴이다. 여기서 두 번째 시사점이 도출된다. 타자의 부정은 원한이나 불안에서 파멸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녀로 인해 자아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지만, 그 핑계 속에는 공허한 원한과 불안이 맴돈다. 진실되지 않고 알맹이를 잃은 느낌이다. 그들 누구도 자신들과 엮일 사건의 계기, 그러니까 젖은 속옷의 그녀를 직감하지 못했기에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진실은 그녀의 무음 속에 있다. 그걸 알 수 없어 떠들어대는 그들의 변명이 진짜가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잔혹한 운명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캐디’의 침묵은 부정된 타자의 공허함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든 자들의 허위를 입증한다.



은 속옷을 직감하지 못한 자는 오히려 회피하거나 무시하다가 파멸되고 말았다. 타자의 부정은 역설적으로 자아 부정으로 이어진다. 이 말은 반면교사로서 타자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들의 귀추를 일일이 주목하고 있어야 진실을 직감하거나 눈치챌 수 있단 말일까? 한편으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 상반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대부분 이타자에 대한 추종이 정체성 위협, 낙인과 도피로 이어졌다고 말해왔으니까. ‘자크 라캉(이하 ’ 라캉’)’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듯이, 타자란 주체적 욕망을 대리하고 투영하는 대상이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타자로부터 출발한다. 종종 타자는 사회의 관계망에서 비롯된 공공연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된다. 그것을 기준으로 비교하다 보면, 유혹으로써, 파괴나 고통으로써, 욕망의 이름으로써 되돌아온다. 무분별한 추종과 집착, 향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아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자존감과 의욕을 낮춰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론 형편이 나아지거나 새로운 도전을 통해 극복되기도 한다. 그와 비교한다면 자아의 부정은 구조적으로 주입된 관념과 그로부터 머리 깊숙이 파고든 잠재의식 속에 박혀있다.  



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오늘날 자아의 부정성은 SNS의 ‘좋아요’ 열풍 속에서 단면적으로 드러난다고 언급한다. 귀천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그것은 일상과 취미를 공유하는 신변잡기식 유희로 넘쳐난다. 신기하고 예측 불허한 콘텐츠를 보급하고 참여시켜 잘만하면 매체에 오르내리고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도 될 수 있다. 정보와 놀이라는 어중간한 콘셉트과 개성과 허세의 스펙트럼 때문에 억지스럽고 오버스러워도 웃고 넘길 수 있다. 소통하는 대부분은 지인이거나 팔로우를 늘려야 할 소기의 목적이 있는 자들이다. 따돌림당하거나 소속감을 잃지 않기 위해 진심 없는 댓글이나 예의상 ‘좋아요’에 관대하기도 하다. 무작정 같은 것을 추구하고 어떠한 제한과 제약 없이 맹목적으로 뚫어지게 지켜본다. 조금이라도 한눈팔 경우 나만 모르거나 배제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같은 것 속에서 습관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자아는 점점 유명무실해진다. 오히려 주체(나)가 타자(사회적 편견)를 통해 위협당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것이다. 정체성을 쉽게 취득할 수 있는 개성이나 취향으로 풀어내는 것은 일종의 감염이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그렇지 않은 타자(다른 개성)는 이해 불가능한 처사다. 그것을 지적당하는 게 껄끄러우니 방어적이며 배타적이다. 같은 것의 긍정에는 그렇지 않은 타자의 부정이 깔려 있다. ‘좋아요’로 뭉쳐 타자를 수세에 몰고 가 추방하기에 이른다. 타자의 추방은 ‘장 보드리야르’가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 말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은 것끼리 무리 짓기 혹은 지속적인 같게 만들기 문화는 타자를 추방한다. 그렇지 못한 타자를 솎아내고 몰아내기 위해 같아질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 문제도 따지고 보면 그것의 일환이다. 원작자로서 자아를 가치화 해 유일무이한 상품처럼 만들지만, 디지털 네트워크 속에서 댓글이나 ‘좋아요’에 호소함으로써 개인 브랜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동질적인 행위나 의견으로써 유행이나 개성을 선동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면하지 않고 매체에 의존하기에 실체가 없는 상상적인 것이다. 손 끝이나 머리 속에서 존재하기에 비교할만한 대타자가 없다. ‘라캉’은 주체란 대타자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발현한다고 했다. 타자 없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은 비교 대상 없고 실체-실제 자신의 모습-가 결여된 공허한 외침이자 메아리다. 같은 것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그거 말고 이게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없다. 두려움, 수치감, 죄의식, 공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진짜 자신만의 특기를 뽐내고 싶은데 알아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끼리 소통하다 보면 다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다. 그것을 말하고 싶어도 어떻게 말하거나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만장일치의 강요는 남다름의 갈등을 알지 못한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성장과 성취감에 이르지 못한다. 만약 운동이나 경기처럼 경쟁에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경우 남들만큼 해야 한다는 실패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경우 각종 신경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것 말고도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크고 작은 경쟁과 도전이 많은가 생각해보면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니다. 동의를 강요하는 삶은 내적 갈등과 일상적 노파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병철’은 현대인에게 닥친 자기부정은 나와 너 사이의 문턱과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와 네가 구분 없는 공간은 장벽 없는 비밀도, 낯섦도, 수수께끼도 없는 과잉 소통의 상태다. 모두가 맞다고 해서 습관적으로 따르는 것은 자의지의 판단이 아니다. 지각의 절대적인 소멸 상태다. 인터렉티브한 탈현실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소비할수록 ‘좋아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또,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잃었기에 가볍고 즉흥적이다. 현실처럼 디지털 상에 모든 인프라가 갖춰 있기에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먹을 것부터 연인까지 언제든 마음대로 원하는 시간에 처리할 수 있다. 점점 오프라인 기반이 불필요해지고 무너지게 되므로 그 물질적 묵직함과 질량, 고유한 무게나 시간을 빼앗는다. 세상은 갈수록 반대의 부정성- 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같은 양면성-을 잃어간다. 동의만 있을 뿐 반대하는 타자가 없다. 같은 모습, 획일화된 유행에 맞춰 살기 위해 그렇지 않은 타자를 추방했지만 그러다 보니 자신의 고유성까지 유명무실해졌다. 동형성의 강요는 자신의 진면목으로부터 소외되고 침식된다. 결국 자기파괴적인 변증법으로 귀결된다. 같은 것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는 것은 타인이라는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고 잃었던 개성을 찾아내 홀로서기도 가능한 것이다. ‘라캉’의 말처럼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그것을 투영하는 대상을 이해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을 통해 가장 섬뜩하고 매혹적인 상대를 경험했던 것처럼. 실체가 없어도 타자는 존재감으로 압도한다. 한편으로는 시선과 음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2006)>에서 비밀경찰인 ‘위즐러’는 상부 지시로 극작가 ‘드라이만’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게 된다. 동독 공산주의에 절대적인 충성심과 신념을 가진 전자였지만, 후자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정의로운 소신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감화된다. 그의 훌륭한 인성과 태도에 매료된 나머지 진심조차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건 전자가 배경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오로지 도청으로 들은 후자의 진실된 목소리에서 깨달은 것이다. 음성은 의식 아래쪽의 심층을 파고든다. 주체 안에 깊은 균열을 만들어내고 전적인 타자가 자아 안으로 침입한다. 몸의 기호로써 소통하게 한다. 전자는 자신의 눈과 귀의 주관성 대신 타자(‘드라이만’)의 음성에 맡기는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타자와 마주할 수 있다. 그는 건너편의 시선으로 후자를 바라본다. 그것에 대한 비유는 그의 애인인 ‘크리스타’와 마주치는 것이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이자 에로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장관과의 불륜에 대한 죄책감으로 술집을 찾은 그녀와 마주쳤을 때 진심으로 설득하고 돌려보낸다. 그가 읊조리는 ‘이번엔 충격이 좀 크겠군’이란 독백은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주시했던 타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대한 주시는 자아가 객관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핵심적인 측면이다. 낯설게 바라보며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반대인 타자조차 바라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최소한의 예의와 친절도 베풀 수 있다. 나와 다름에 대해 편파적인 매장이나 외곬의 배척으로 의심하는 대신 그 상태로의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딘가에 이질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즐러’는 도청과 건너편의 시선으로 ‘드라이만’이라는 타자를 인정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로 마주치지 않는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그걸 입증해낸다. 그 자체로 이 텍스트는 영화 혹은 영상 예술로써 또 다른 타자로 던져진다. 우리는 그 속에서 감동적이어야 하는지 혹은 낯설게 보이는지 고민하게 된다. 오히려 전자처럼 한걸음 물러나 바라볼 수 있다면, 낯선 시선과 목소리 속에서 스스로에게 다가온 울림을 잡아낼 수 있다. 감정이 아니라 한걸음 뒤에서 관조할수록 자신의 욕망만큼 타자의 그것을 가늠할 수 있다. ‘위즐러’가 그걸 깨달은 대가로 ‘드라이만’에게 베푼 희생이기에 그만큼 값진 것이다. 결국 가치 판단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느냐의 스펙트럼 상에 있다. 그걸 이해할수록 나와 다른 사물의 고유성을, 그것과 다른 나의 고유성을, 그것이 얽히고 엮이는 삶의 수수께끼와 비밀을 감지하게 된다. 



자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나와의 이질감을 감지하고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때, 타자의 시간을 허락한다. 그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나는 타자에게, 그리고 그 앞에서 허약하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무기력 속에서 타자에 대한 욕망이 깨어난다. 어떤 능력도, 어떤 주도성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블로흐’는 타자의 부재에서 오는 무력감을 모른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무엇이 잘못인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벗어날 수 없어 되풀이된다. 좀비처럼 죽어도 죽지 못하는(undead) 과로 상태다. 그럴 바에는 있는 줄도 모르는 부정된 타자가 아니라, 실체가 있는 타자로부터 생성된 피로가 낫다. 주체는 목표에 도달해도 늘 또 다른 타자를 찾아 도전한다. 그건 사랑 찾기와 유사하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나와 다른 타자가 만나 하나가 되어가는 게 사랑의 전제다. 그 이원성은 자아 사랑에 필수적이다.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위즐러’의 도청, 대답 없이 듣기만 한 경청은 타자의 말하기를 초대한다.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과 치유의 공간,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핵심이다. ‘캐디’의 침묵 속에는 형제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독자에겐 스스로 진실을 찾게 하는 공명 공간이 있다. 그녀를 욕하든 지지하든 결국 비움 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부정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그들의 소리와 분노가 아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청은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한경철’은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를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라고 말한다. 화해 역시 친절함에서 비롯된다. ‘위즐러’가 자신 몰래 베푼 배려를 ‘드라이만’은 그의 방식으로 화답한다. ‘선한 이들의 소나타’라는 책 속에 서로 알만한 암호를 남겨놓는다. 경청은 친절을 베풀 뿐만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되돌아온다. 직감은 타자에 대해 욕망하거나 그것을 이해하게 보탠다. 타인과의 시간 속에서 자기 파괴와 고립이나 소외, 무력감을 되짚어본다. 빛바랜 고유한 흔적을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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