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동생은 키위를 먹지 못한다. 뭘 먹다가 구토와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며칠을 고생했는데, 알고 보니 키위가 들어간 소스 때문이었다. 가끔 잔치나 모임이 있을 때 음식 앞에서 연구소 직원처럼 관찰하는 그를 마주치곤 했다. 그는 반가운 눈인사 대신 설마 키위는 아니겠지란 시답지 않은 유머를 날렸다. 또, 초등학교 시절 수많은 안경잡이 중 유난히 큰 눈의 아이가 있었다. 대부분 시력이 나빴으나 그녀는 달랐다. 멀리 있는 작은 글씨를 거침없이 읽으면서 가까운 건 보지 못했다. 그녀의 원시용 돋보기는 짓궂은 아이들에게 놀림거리였다. 아마 할머니란 말이 걸렸던 모양이다. 단춧구멍 같은 근시 안경의 내가 부럽다 해도, 시큰둥했다.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구십구 퍼센트에 관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나만 내려진 것 같은 일 퍼센트의 불행 같은 것이다. 하고많은 과일 가운데 키위라는 것, 좋은 시력에도 돋보기를 써야 하는 것. 웬일인지 나만 손해인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 경우를 보자면, 그 일 퍼센트 저주는 하체 비만이다. 물론 연예인들처럼 날씬한 허벅지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튼실한 다리 때문에 고민이라는 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소리다. 저주라는 표현도 오버센스 일지 모른다. 그러나, 콤플렉스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수영장에서 비키니 위에 래시 가드를 입을 수 있고, 짧은 치마 아래에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부츠로 가린다. 단점은 맞지만, 방법 또한 많다. 생각의 차이다. 반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단 한 생각에 빠져 벗어나질 못했고 집착해왔다. 나는 정말 청바지를 입고 싶었다. 꼭 맞고 좋은 핏을 내는 그걸 찾아 헤맸다. 그동안은 그런 걸 입기 위한 여정이었다.
청바지는 흔한 스테디셀러 같은 아이템이고 누구나 적어도 한 벌 이상 가지고 있다. 갓난아이는 외출할 때 고무줄이 들어간 데님을 입고, 연세가 제법 된 할머니는 꽃 자수가 새겨진 걸 입기도 한다. 뚱뚱한 사람은 조금 넉넉한 대로, 마른 사람은 레깅스처럼 밀착시켜 입는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삼분의 이 이상이 입고 있지만, 패션과 스타일이 전부 다르다. 약간의 격식이 필요한 정장에도, 발랄하고 경쾌한 캐주얼과 무난하며, 가벼운 등산이나 산책처럼 운동 시 가능하다. 어떻게 입을 수 있고 무엇과도 어울린다. 사실 청바지를 원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입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입고 늘씬하고 싶은 욕망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바지를 사 왔는데 허벅지에 꽉 꼈다. 평균치 이상의 굵기로 허리에 맞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한두 치수 큰 걸 입어야 했다. 통도 어정쩡해서 다리가 더 두꺼워 보였던 볼품없는 걸 입고 다니려니 자존심마저 상했다. 그 이후론 꽤나 예민해졌다. 회사나 제품마다 같은 사이즈라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슬림 핏, 스키니 핏, 보이 핏 등 얼마나 다양한 디자인과 품이 다른데. 다른 건 몰라도 청바지를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주문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교복이 없는 관계로 청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더 통통해진 다리와 꽉 끼는 바지통 사이에서 아침마다 실랑이를 벌였다. 그럴 때마다 교복 입는 학교로 갔어야 했다고 자책하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선 얼마 동안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낙엽을 쓸고 다닐 것 같은 긴 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힙합 스타일이나 와이드 데님이 유행할 때면, 다리 굵기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어 행복했다. 조금 살이 빠졌다 싶거나 열심히 신은 하이힐 덕분에 괜찮아졌겠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쯤, 어김없이 청바지 매장을 찾았다. 대개 만족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이러다가는 영영 입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창 회식을 즐겼던 시절엔 고3 몸무게를 오락가락했다. 처음으로 다이어트라는 걸 했다. 오랜 사투 끝에, 허리에 맞는 청바지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생이 벗어놓은 바지도 맞았다. 게다가, 날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난생 처음 꼭 맞게 떨어진 일자형 청바지 속에 남방을 넣어 입었다. 그 모습을 본 동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군가는 다리가 길었구나라고 말해줬다.
한동안 청바지를 기피했던 게 맞았다. 들어가지 않으니까, 껴서 불편하니까 입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마다 하의를 뭘로 입나가 그간 절반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살을 빼고 나니 판도가 바뀌었다. 청바지가 들어가자 더 예쁜 걸 찾고 싶었다. 동대문과 백화점을 뒤져 보세부터 브랜드까지 여러 종류의 청바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생기나 활력면에서 최고로 물올랐던 시절이었다. 많은 이가 청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치켜세워줬다. 어떤 팀장님은 남자를 만날 거면 바지를 입으라 했고, 누군가는 하얀 티와 청바지를 입고 마주쳤을 때 반했다고 했다. 또, 그는 신혼여행에서 청바지를 입고 화장하던 뒷모습을 찍어줬다. 그런 칭찬과 찬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자신 없었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농담 같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듯한 진실로 탈바꿈했다. 마치 저주에서 풀리듯 홀가분해지고 괜히 스스로를 괴롭혀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날씬해지고 가능한 일이었지만, 거기에 누군가의 확신까지 더해지니 이상한 자신감이 차 올랐다. 꿈에 그리던 슈퍼카를 타고 아우토반에 오르니 별거 아니었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원하는 대로 해볼 여유가 생겼다. 무작정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해볼까에서 해보자로, 하다 보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과감하게 스키니 청바지도 시도했다. 상의마저 달라붙어 몸매가 드러났다. 일자다리처럼 쭉 뻗은 모습은 아니지만 봐줄 만하면 그걸로 된 것이다.
청춘은 눈 깜박할 사이 지나갔다. 안타깝게 예전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낳고 다시 늘어졌다. 자신감이 사라졌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의심이 고개를 내밀 때쯤 예전의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역시나 허벅지에서 걸렸다. 배는 그렇다 치겠는데, 늘어난 살은 왜 허벅지에 붙었을까? 저걸 입기 위해 다시 시작했다. 첫째 땐 그럭저럭 돌아왔으나, 둘째 낳고선 두 배나 걸렸다. 그때의 사투는 입에 담기 싫을 정도다. 식단 조절론 안돼서 처음으로 운동이란 것도 했다. 날마다 청바지로 확인했다. 언제쯤 맞을까? 불확신과 좌절 사이에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티셔츠를 넣은 청바지를 입고 한층 날렵해진 몸매를 드러낼 봄날이 꿈에서 재생되기 때문이다. 가끔은 꽃잎이 휘날리는 무협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쳤다. 번뇌와 희망과 여운이 버물린 소소한 에피소드들. 늘 나를 종종거리게 했던.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당장 입을 수 없고, 언제 될는지 모르는데. 일장춘몽이라면 필요 없다. 과감하게 정리하자. 유행이 지난 게 아니라 낡은 잔재이므로 미련 없이 포대 자루에 담아 팔아버렸다. 원하는 사이즈가 아니라, 당장 필요한 몸에 맞는 걸로 샀다. 맥주를 끊고 운동습관을 들였다. 한 치수 줄이면 선물처럼 하나 더 샀다. 점점 파랗고 잿빛이거나 검은색인, 찢어지거나 워싱이 들어간, 길이마저 다른 각양각색의 바지로 늘어났다. 유난히 추운 올핸 두둑한 기모가 들어간 두 벌로 버티고 있다. 비록 봄날 같은 그 몸매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맞는다. 지금의 청바지는 핏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쉽게 입고 벗을 수 있으며, 어디든 받쳐 입을 수 있는. 그렇게 결혼식장도 가곤 한다. 딱 이 선에서 멋과 실용성, 나름의 만족을 위한 선택이다. 그걸 위해 적당히 먹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나는 왜 하체가 이 모양일까, 그 일 퍼센트 같은 저주를 풀기 위해 골머리를 썩혀 왔다. 날씬해지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고, 다시 나아지면 또 번복되고. 그럴 때마다 청바지 입을 생각에 마음을 추슬렀다. 어떤 이상(理想)이자, 업보 같은 불행의 씨앗을 처단할 부적이었다. 그걸 소화할 수 있다면 격세를 뚫고 위풍당당한 자태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문에 취한 듯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그렇게 중요했던가 따진다면 할 말 없다. 날씬한 사람을 위한 유행에 동참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만인에게 아름답고 고고한 자태로 대접받으려 했었나. 혹은, 단점을 극복하고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과시욕이었나. 어떤 건 나름 선방했고, 또 한편으론 근처도 못 갔다. 해보지도 않아도 후회했겠지만, 겪고 나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아쉽다. 그동안의 노력이 다소 소모적이었기에. 나를 위하는 거였지만, 실은 타인을 어필하기 위해 외면적인 것에 치중하였으므로. 늘씬한 청바지에 집착하다가 다른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과감한 색상과 질감, 다채로운 길이와 폭의 옷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숨겨진 매력이 있었을지 혹은 장점으로 부각될지 몰랐다. 차라리 까짓것 하고 과감히 밀어젖혀야 했다. 포기나 타협보다는 재발견이라고 할까? 사촌 동생은 비록 키위를 먹지 못하나 다른 과일에 대해선-두리안처럼 고약한 것도- 호기심을 발휘했다. 돋보기를 꼈으나 화장으로 눈을 더 돋보이게 만든 친구도 있었다. 나도 저주받은 허벅지를 특별한 무언가로 바꿀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럴 발견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비욘세’처럼 허벅지 두께 따윈 아랑곳없이 당당하고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까?
올해는 나이, 처지, 상황 등에 맞추지 않을 것입니다. 풀어지고 여유로우면서 초연하게.
굳이 스타일로 따지자면 프리스타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