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_리뷰에세이
심연의 어둠에서 희미한 불빛을 발견했던 이는 두렵지만 조금씩 전진한다. 위장과 편견, 소외와 절망 속에 무언가 감추는 레이어를 발견한다. 덕지덕지 포장했던 가면과 나르시시즘을 한 꺼풀 거둬내니 직감을 잃고 자아를 부정하는 나약함이 드러난다. 연민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쯤 누군가의 초연하고 관망한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진실을 거울로 투영하고 고독한 감수성을 포용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생각해보면, 그들도 삶의 고통과 주름을 맞닥뜨렸다. 좌절하고 분노하다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멍울에 괴로웠다. 답이 없다면 차리리 감지된 걸 찾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 직감력은 민감한 자의 혜택이다.
민감성은 유행과 층위에서 염증을 느낄 줄 알고 그 틀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갈망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을 시도하고, 판단을 미루고 일탈한다. 새로운 유희에 편승함으로써 구태의연한 답답함에서 해방되고 탁 트인 전망으로 다가간다. 그것은 미적 행위인 예술과 맞닿는다. 그러니까, 한 걸음 물러나 레이어를 바라보는 이들은 특유의 감수성을 크리에이티브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들이 발견한 어둠 속 불빛은 각양각색이다. 때론 세상에 다채로운 미적 감각으로 빛나고 있다. 아름다운 이정표가 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방향지시등처럼 밝혀준다. 예술이 비현실적이라는 ‘오르떼가 이 가세트’의 말처럼, 현실에서 비껴간 매혹이자 이상향으로. 상상과 놀이가 공존하는 일시적인 행위, 허나 영원히 기억 속에 간직될 해방과 미지의 낙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어둠의 불빛을 감지하는 민감인에게 유리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서 예민해지나? 학교에서 배운 수학 문제가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듯이 이론과 실제가 어긋날 때 혹은, 뭔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마음을 추스를 없을 때일 것이다.
흔히 감수성은 부당함을 느낄 때 폭발한다. 어린 시절, 여동생은 내 옷을 물려 입었을 때마다 역정을 내곤 했었다. 왜 자기는 언니처럼 새 옷을 입지 못하냐는 것이다. 알뜰한 엄마의 논리론 설득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끔씩 회자되는 걸 보면 가슴 사무치게 응어리진 모양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둘째로 태어난 죄였다. 아마 그녀에게 감수성이 있다면 둘째라는 존재에 얽힌 예외적 어긋남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첫째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이렇듯, 감성이란 어긋나고 깨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민감하고 예민할수록 욱하고 말 것이 아니라 더욱더 치밀하고 치열하게 반응한다. 껄끄러워서 지나치지 못하고 골몰하는 건 누구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서 깊숙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 왜? 그래야 좀 더 나만의 감수성을 찾을 수 있고 그 실체를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까. 어둠 속 희미한 불빛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알베르 카뮈(이하 ‘카뮈’)’의 책 <안과 겉>에선, 일상 속 껄끄러움을 향한 곤두선 촉각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민감한 레이더망에 걸린 건 흔한 풍경들이고, 거기서 비거덕거리는 걸 예리한 더듬이로 파고든다. 화려하고 성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는 노파는 매주 자신의 무덤자리를 방문하며 흐뭇해한다. 어느 날 그 앞에 소담스러운 꽃다발이 놓여있는 걸 보고, 자신이 사자(死者)가 됐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죽음으로 내딛을수록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제대로 죽고 싶었던 그 갸륵한 생각은 타당한 사물의 존재적 가치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건물 사이로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지는 공존 속에서도, 현실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잠시 피했을 뿐인데도 그걸 기호(嗜好)라고 명명한다. 대개 그때의 상태로 판단하고 해석되며 그게 진실로 되돌아와 결국 부정하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다. 삶은 종종 그런 아이러니한 대치 상태에 있다.
프라하의 한 호텔에서 바로 아래층의 남자가 죽은 줄도 몰랐다. 그런 께름칙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묵을 수 있었을까? 소스라치는 잔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연이어 도착한 베네치아의 풍광 속에서 자연의 찬란함을 감탄하고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영혼 속의 죽음>). 또, 팔마의 야심한 저녁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정열과 쾌락의 여인으로부터 흥분과 도취 상태에 흠뻑 빠졌다. 방금 전까지 그곳의 정오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둘러싼 삶의 터전에서 건실한 노동을 즐겼고 순수한 웃음꽃을 활짝 폈었다(<삶에의 사랑>). 반전은 일상 속에서 날마다 혹은 간헐적으로 포착된다. 누군가는 비극적인 삶에 몸부림치다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감하지만, 그걸 알리 없는 누군가는 눈 앞의 낭만에 심취해 있다. 같은 울타리 속 군상이라도 부지런하고 금욕적인 태도와 즉흥적이며 퇴폐적인 일탈이 공존한다. 인생이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배우고 사회로 나가며 건실하게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 관습과 도덕적 범주로 부모와 자식 혹은 신분과 계층이라는 타당성을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관념이다. 실제로는 그것과 다른 이율배반과 아이러니와 모순투성이다. 불만 없이 이행하고 수호하다가 부당이익을 취한 누군가를 볼 때 와르르 무너진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에서 절망과 목마름으로 좌절하거나 갑작스러운 감동에 사로잡혀 환호성을 외친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고민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사람에게 터놓는 법이다. 수용하고 받아줄 넉넉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 한에서.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까, 혹은 어디까지 털어놓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삶에 대한 복종과 불신이 반복될수록 모순적인 허무감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는 어물쩍 넘기지 못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면서도 어떤 기대감을 떨치지 못한다. 어떤 이치를 터득하고 마음을 다독이다가 다른 껄끄러움에 고통스럽고 다시 성찰하고 극복해간다. ‘카뮈’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들처럼 빈곤과 태양, 기후의 불공평 같은 부조리를 발견하는 건 삶에 무관심하지 않는 것이다. <안과 겉>이 관통하는 어두운 터널 속 불빛은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믿음이다. 어긋난 이치를 깨닫을수록 절망하고 벗어나며 초연해지다 다시 이해하고 포용하게 된다. 결국 사랑으로 뻗어나가는 긍정의 진자운동이다. 그런 맥락은 그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이하 ‘그르니에’)'의 <섬>에도 나타난다. 섬이란 은유는 대단히 함축적이고 심오하다. 대부분에게 이상향처럼 모험과 동경의 대상이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갇힌다면 세상과 격리된 외로운 공간일 뿐이다. 그 경계를 두고 안과 밖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 이상향이냐, 고독이냐도 현실에 발을 담근 채 생각하고 기뻐하며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좀더 진일보하고자 한다. 잠시 발을 떼고 도약한다. 어린 시절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상을 보고 공(空)의 매력에 빠진다. 공이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인 몰입이다. 잠시 나란 존재를 잊고 집중하는 그것에 완전히 물아일체 되는 경험이다. 키웠던 고양이 ‘룰루’의 모습을 통해서, 낯선 도시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비밀스럽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아를 되찾기 위한 여행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게 된 계기를 통해서, 죽어가는 백정의 공허한 눈빛에서 느낀다. 그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물질적이지 않고 정신과 영혼에 있다. 탐욕적이고 속물적인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우주의 본질이 정신적으로부터 나왔으며 물질적 현상 조차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심론에 가깝다. ‘카뮈’의 감수성이 현실 속 모순에 집중한다면, 그는 삶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실체가 없이 뜬구름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집중하려면 삶으로부터 두 걸음 물러서야 한다. ‘카뮈’의 한 걸음 뒤 관망하는 시선에서 또 한 번 물러나 산속 도인의 마음가짐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를 둘러싼 탐욕을 볼 수 있다. 잠시 정신 속을 환기하고 야만적인 행복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 상처를 주면서 일어서야 했던, 지나고 보면 명성으로 남을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덧없는 허무함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거치고 이해하며 습득한 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공이라는 비움의 철학은 나를 둘러싼 가면과 장신구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체에 집중한다.
‘그르니에’의 감수성은 한편으로 신앙이나 교리처럼 보인다. 그는 공의 철학을 이끌어낼 때 인도의 불교와 그리스도교나 기독교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함이다. 과연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정신적 지향점은 결이었다. 결은 무언가를 쫓는 한결같은 상태나 바탕을 의미한다. 가장 적합한 말로 스타일(style)을 들 수 있다. 유행이나 패턴처럼 감각적인 개성과 같은 스타일리시(stylish)가 아니라 존재 양태로써 표면적인 형식을 넘어선 정신적인 수양과 감수성이 내재된 것이다. 예를 들어,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입체파라고 정의하는 걸 생각해보자. 그가 추구했던 추상성과 다차원적인 기법을 특징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작품과 세계관을 대변하지 못한다. 형식보다 중요한 건 비참한 하급 계층의 삶이나 전쟁의 이면 같은 의미다. 그가 위대한 예술가인 이유는 새로운 기법과 형식을 창조한 이상으로 시대의 흐름 속 인간군상의 처절함과 혼란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단지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수단이 형식이었다. 형식과 내용을 아우른 독창성이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다. 스타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파고들며 일깨우는 동시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을 알고 있다. ‘그르니에’는 존재성은 외연적 목적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예술이니 일상이니 규정하기 전에 알맹이나 심지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게 필요하다. 전적으로 직감이고 감수성의 몫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면 유리한 것이지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에는 그가 터득했던 일련의 비책이 녹아있다. 그 소재는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처럼 보편적인 것이다. 그는 구태의연한 시선 대신 알려진 것과 다른 숨겨진 이면을 파고든다. 여행과 산책이 주는 낭만적 쉼이 일상에서 낯설어진 시선을 느끼고, 습관처럼 하는 독서, 수면, 담배 속에서 단절을 두려워하는 의존적인 행위를 깨닫는다. 비밀과 고독처럼 본연의 모습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표출하고 싶은 창조성을 갖게 되고, 정점의 정오와 내려오는 뒤안길의 자정 속에서 인생의 순환을 이해한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의 마디마다 안과 겉이 주는 온도 차를 느끼고 그 미세한 차이를 기록한다. 신선하고 획기적이지 않지만 가늠할수록 어떤 감흥이 쌓이고 점진적으로 남다른 감수성으로 기의한다. 구체적인 사물처럼 무언가로 심상화함으로써, 적어도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영위한다. 그가 섬을 통해 동경 속의 고독이란 부조리한 심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현실 이면의 부당함과 그것을 감지하는 무의식의 허무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주입된 것에서 벗어나자 양식과 방식 속에 무엇이 숨겨졌는지 눈치챘고 자신만의 기호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사유의 과정이 ‘그르니에’에겐 결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과제였지만 결국 그것이 예술적 문체로 남아 누군가에게 자극이 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통속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나만의 결을 찾는 방식일 것이다.
누군가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반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자체로 남다른 감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카뮈’나 ‘그르니에’는 그런 업보를 성실히 수행한 셈이다. 그들이 부조리한 모순을 사유하는 방식이나 결을 추구하는 과정은 자신을 껄끄럽게 만드는 지점에서 현미경처럼 감수성을 들이대고 파헤치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차원적이고 환상적인 이질감은 없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행태와 풍경, 사건이 비범하거나 삐죽거리게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어떤 건 감흥이나 감탄을 자아내지만 또 어쩔 땐 나를 겨눈 보이지 않는 칼날과 자극, 함정일 수 있다. 롤러코스터처럼 다가오는 감정의 변이와 희로애락을 사유할수록, 감상자의 감수성은 말랑말랑해진다. 오히려 습관은 감지할 때마다 느끼고 휘발할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남기는 것이다. 그게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유희이자 도리다. 이 책의 평범하지만 괄목할 만한 문장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우리의 일상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여행을 하기도 하며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고독이나 침묵 혹은 비밀로 인해 사람들과 단절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 이 모든 존재 양태들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표면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들을 분석해 보면, 일상생활로부터 삶의 결 자체로 넘어가는, 나아가 예술 작품에까지 다다르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오솔길이 드러난다.’
감수성은 모순으로 터지고 결로 매듭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