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_리뷰에세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미지의 세계를 말했다. ‘쿠빌라이 칸’이 의문을 제기했듯 누구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선분 AB에선 그런 기이한 모습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미줄 사이나 나무 말뚝 위의 마을, 호수에 반사된 쌍둥이가 존재하는 세상이 어떻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의심은 현실을 옹호하는 동시에 남다른 걸 배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구미를 당긴다.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이 상상력이 감성과 만날 때 판타지는 성립된다. ‘팀 버튼’의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다. 거짓말이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믿고 싶은 씨앗이 움트지 않은가. 기대심리가 혹은 무모한 꿈이 세상 밖의 반직선 AB로 나간다.
지금까지 반직선 AB는 ‘뫼르소’의 반항, ‘자라투스트라’의 구도, ‘마르코 폴로’의 판타지로 나타났다. 그들은 현실이라는 선분 AB의 도덕과 정의와 권력을 배척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다닌 셈이다.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만족했을까? 반직선 AB에 안착해 선분 AB 따윈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일말의 의구심이 생겼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밀란 쿤데라’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이탈한 ‘뫼르소’와 달리 타의적 이방인이었다. 조국 체코에서 강제 추방돼 이국 땅에서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그의 초기작 <농담>에 그와 닮은 ‘루드비크’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단지 치기 어린 농담 따먹기에서 비롯했다. 강압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묵살된 개인의 자유에 대한 반발심을 눈치 없이 떠벌렸다. 그러다가 학교와 당에서 추출됐다. 그는 타의에 의해 선분 AB에서 쫓겨났다. 부당함은 점차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밀고했던 ‘제마네크’를 비롯해 자신의 첫사랑과 사랑에 빠진 ‘코스트카’, 전통을 지키기 위해 이상적인 ‘야로슬라프’를 헐뜯었다. 그들이 자신을 몰아냈다고 믿었다. 신세 한탄에 빠졌고 선분 AB 속 과거의 영광을 곱씹었다. 되돌리고 싶었으므로 낯선 이방인으로 되돌아왔다. 그 시선으로 현실을 관망했다. ‘제마네크’는 강경한 공산주의자에서 스탈린의 몰락 후 기회주의자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코스트카’는 한 여인을 구원하다가 그릇된 믿음을 깨달았다. ‘야로슬라프’는 민족 부흥의 상징인 모라비아 민요를 계승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대중성에 타협했다. 그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흔들리고 변명 같은 타협점을 찾고 있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예술로부터 이상으로부터 소외됐다. 한 마디로 거짓된 현실이었다. 어쩌면 신념이란 영원할 수 없는 허상이었다. 오히려 반직선 AB 이방인의 눈에서 명료하게 보였다.
체제에 불만족하고 뜻대로 되지 않아 미워한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악순환이 저주받은 운명이 되어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고 보상받지 못하는 지옥으로 인도했다.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였다. 분노 때문에 스스로를 망칠 거라던 ‘코스트카’의 말이 맞았다.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모든 속박과 굴레에서 자유롭게 웅크린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 첫 시도가 농담 아니었을까? 그는 그것으로 인해 반직선 AB으로 나갔다. 체제에 대한 반발과 누군가로 향하는 증오에 시달렸지만 돌아와 보니 그는 친구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에 방점을 둔다면 분노로 얼룩진 지옥 속을 탈출한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삶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자 체제와 본성에서 합일하지 못하는 괴리와 모순에서 허무해졌다. 성찰의 순간 고독한 ‘야로슬라프’와 함께 합주했다. 한발 물러나 예술 안에서 초연해졌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루드비크’를 통해 그렇게 내디뎠다. 다시 말해 농담은 선분 AB 밖으로 튀어 나가기 위한 도움닫기였다. 삐딱하게 도약대에 올랐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다. 우스개 같은 반발이 시공간을 초월하고 낯선 공간으로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던져진 콩알탄이 어떻게 다가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의도와 다른 인과 관계가 성립됐다. 그는 실소를 터트렸다. 원망스러운 과거를 모조리 찾아내 갈기갈기 찢고 싶은 심정이었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나오는 잃어버린 편지처럼. ‘미레크’는 첫사랑인 ‘즈데나’에게 보낸 편지를 돌려받길 원했다. 기억의 저편까지 지우고 없었던 일처럼 망각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러시아 반군이란 자신의 과거와 못생긴 여자가 첫사랑이란 기억을 지우려 했다. 추억은 보통 목가적이고 감상적인데 그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타미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프라하에 두고 온 남편의 수첩을 가져오고 싶었다. 죽은 남편의 추억을 간직하고 희미해지는 진실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가져다주겠다는 ‘위고’의 유혹에 흔들렸다. 그럴수록 남편의 기억조차 불쾌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리토스트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불현듯 발견한 비참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 즉 자기 연민을 의미했다. 그녀가 사랑을 영원하고 소중한 가치로 여길수록 고통스러웠다. 남편의 거취 문제로 망명했던 사실이나 가부장적인 체제에 복종했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을 망각하고 단지 목가적으로 기억하려 했다. 그러나 미지의 땅에서 원치 않은 ‘위고’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연민에 빠졌다. 어쩌면 수첩 속 추억 조차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금속성의 반지가 떨어질 때 그녀가 영원한 서약이 아니라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을 보라. 반직선 AB에 안착하려면 모든 흔적을 지워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녀는 그럴 수 있을까?
그걸 알기 위해선 상반되는 시점이 필요했다. 이야기는 비약적으로 흘러갔다. 이번엔 ‘타미나’가 아이들만 있는 섬에 갇혔다. 아이들은 알몸으로 생활하고 그녀를 놀리고 만지는 걸 서슴없이 했다. 사랑과 성에 해방되어 놀이와 흥미로 그녀를 천진하게 대했다. 말 그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반직선 AB였다. 원하던 바였지만 그녀는 즐길 수 없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머리 속에 박힌 선분 AB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박장대소했다. 악마의 웃음인가, 천사의 웃음인가? 그것은 양면적이다. 선분 AB에선 어른을 놀려먹는 비아냥처럼 보이지만, 반직선 AB에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신기함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연극으로 올려야 하는 여학생 둘이 있다. 그들을 시기하는 친구가 작은 복수를 벌였다. 연극이 엉망이 되자 친구는 악의적 웃음을, 관객은 박장대소했다. 전자는 사물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그들의 연극이 예술을 가장한 속 빈 강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것도 모르는 후자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즐거워한다. 저자처럼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양쪽 모두 해맑게 느껴지지 않는다. ‘타미나’처럼 과거를 망각하고 싶거나, 복수한 친구처럼 조작하거나, 연극을 준비한 여학생들처럼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거나, 관객처럼 무지하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무언가를 깔아뭉개고 있다. 선분 AB에서 지켜야 하는 가치판단이나 도덕이다. 그것이 삶을 옭아매고 비정상적이고 사사로운 욕망을 억압할수록 현실은 즐겁지 못했다. ‘루드비크’처럼 걸고 넘어지면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반직선 AB의 아이들만이 순수한 웃음을 날렸다. 경계선 너머로 웃음의 의미가 달라졌다. ‘밀란 쿤데라’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농담으로 도약하고 웃음으로 선분 AB와 반직선 AB를 오갔다. 때론 복수를 벌이고 무언가를 조작하며 악마의 웃음을 날렸다. 또한 의미가 없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는 웃음 속에서 조롱과 무지, 악과 선의 모호함을 발견했다. 어느 하나에 속할 수 없어 양면적인 걸 선택했다. 반직선 AB에 불시착해 선분 AB를 갈망하는 대신 그 경계선을 서성였다. 그러자 욕망과 순수를 오갈 수 있었다. 그건 <무의미의 축제>에서 드러난다. 히피 성향의 ‘알랭’ 어머니와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전자 앞에는 유토피아를 꿈꿨던 실패한 혁명가 스탈린이 있다. 그는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진지한 세상을 절대 권력으로 형성하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다. 그의 혁명은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광란 이후의 역사적 허무주의처럼 낡은 모순으로 귀결되었고, ‘루드비크’의 농담처럼 작은 빌미에 전복됐다. 역사는 또 다른 이상향을 위해 새로운 반항을 허용했다. 그게 ‘알랭’의 어머니였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자신을 수동적이게 할 의무와 굴레를 거부했다. 그를 낳자마자 농담처럼 사라졌다. 진지함을 강요하던 시대는 농담을 허용하는 시대로 다시 웃음이 난무하는 시대로 변했다. 서로 다른 속뜻을 품은 채 웃었다. 단순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허영의 시대가 되었다. 가면을 쓴 배우처럼 살아갔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다르델로’, 연기자인 ‘칼리방’, 사랑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쥘리’처럼. 칵테일파티에서 자기과시로 위장된 우스갯소리를 날렸다. 홀연히 나타나 주위를 맴도는 깃털 하나에도 환호하고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다. 불현듯 공중 위로 떠오른 깃털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내려다보며 잡힐 듯 말 듯 체공했다. 스탈린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버텨온 ‘라몽’만이 과장된 연극을 조용히 비웃었다. 깃털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마치 좋은 기분처럼 공중을 떠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떨어진다. 집착하는 인간 역시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존재이다. 그들은 보이는 것에 쫓을 뿐 진실을 망각했다.
진실은 무엇인가? ‘스탈린’에게는 권력의 지겨움이었고, ‘알랭’의 어머니에게는 예속에 대한 염증이었다. 그들은 피로했고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낯선 사냥꾼이 되어 사라졌거나 히피로 휩쓸려 다녔다. 한때를 풍미했지만 영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속되는 건 ‘알랭’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는 여자의 배꼽에 집착했다. 가슴, 엉덩이, 허벅지와 같은 성적 매력이 아니라 태아를 생성했던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녀를 원망하는 대신 한결 같이 변함없는 본성을 그리워했다. 아득하고 힘겨운 현실로 인해 일탈하고 싶은 반항, 그러나 반직선 AB로 나가도 되돌아올 수 있는 이정표 같은 선분 AB. 성숙한 ‘라몽’은 이렇게 말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찮음은 가면과 허영의 시대에 일회적인 속성이었다. 가벼움이 본질이라고 깨닫는 순간 당황과 허탈함에 실소가 피어났다. 포기할 수 없기에 살아야 했다. 그 일회성이 반복되고 용기가 됐다. ‘루드비크’가 모순 속에서 성찰의 순간을 맞이했고 예술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초월했던 것처럼. 삶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었다. 혼령으로 나타난 ‘알랭’의 어머니, 세상이 만들어놓은 의미를 혐오했던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받아들였던 아들의 긍정적이고 관조적인 모습에 소리 내어 웃었다. 반직선 AB와 선분 AB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모순적인 경계선에서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망각할 수 없고 농담 삼아 조롱할 수 있으며 악의 찬 웃음을 날릴 수 있다. 아니면 순수한 웃음소리를 낼 수 있다. 사실 어디에 있느냐의 의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따진다. 자유를 갈망하면서 어느 층위에 있는지 따진다. 결국 선분 AB에선 가면을 벗을 수 없고 반직선 AB에선 자유의 범위를 규정하고자 한다. 그렇게 따질수록 무기력하고 하찮다. 진지하거나 농담처럼 가벼워져도 그 순간뿐이다. 체공을 하던 깃털이 떨어지듯 영원한 건 없다. 다시 무의미해진다. 그 이치를 깨닫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언젠가 또다시 떠오른다. 신선처럼 초연한 웃음이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무의미하고 하찮음을 인정하는 것조차 무색하게 만든다.